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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90)화 (90/108)

90화

[희망감: 59 / 절망감: 41]

“좋네요. 하루 푹 자고 일어난 보람이 있어요.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역시 좋네요.”

“좋아? 아무도 네가 한 줄은 모르는데, 그래도 좋아 넌?”

“그럼요. 그래서 좋아요.”

나인 줄 모르고 신의 은총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다음에 행하려 계획 중인 일도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놀랍고 신기하고 믿을 수 없는 일, 그 무엇이든 가능한 게 신이니까.

신이 했다고 믿어주면 오히려 좋다.

“기분 좋다.”

메인 퀘스트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머리에 닿는 손길이 느껴지길래 위를 쳐다봤다.

“넌 이럴 때…….”

“이럴 때?”

“…….”

데일은 제 코끝을 매만지며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입에 걸었다.

“역시 내 통조림이다 싶어.”

“하하. 그래요.”

실소를 흘리긴 했지만 싫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서 뭐든 다 용서가 되는 기분.

그때, 기도하던 여자가 기도를 끝내고 일어섰을 때였다.

[스킬 사용 대상이 감사해합니다.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왜 들어오지?’

능력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는 몰라도 이제껏 포인트가 들어올 때는 내가 대상에게 노출되었을 때뿐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포인트를 얻는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킬 사용 대상이 감사해합니다.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스킬 사용 대상이 감사해합니다.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수십 개의 창이 연달아 뜨며 포인트가 쭉쭉 들어와 내 생명력 게이지를 늘렸다.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어리둥절해 있을 때, 구석에 미처 보지 못한 알림이 보였다.

[미확인 알림 1개.]

곧바로 창을 열었다.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폭죽 터지는 이미지가 시야를 뒤덮었다.

[완료된 퀘스트 명: 선행에 비밀은 없다.]

[미확인 보상을 확인하세요.]

퀘스트 명에 설레며 상세 페이지를 펼쳤다.

[히든 퀘스트 ‘선행에 비밀은 없다.’

내용: 비밀스러운 선행에 당신의 생명력을 쏟아보세요. (1/1)]

[보상: 앞으로는 자신을 밝히지 않고 능력을 써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쓴 것보다 더 많은 양이 들어와 몸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헤헤.”

“왜 웃는데.”

“참 잘한 선택이었다 싶어서요. 어제 종일 자면서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마 굉장히 좋은 꿈이었던 거 같아요.”

빤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나를 안아 들었다.

데일이 내 이마에 콩, 제 이마를 가볍게 부딪쳤다가 뗐다.

“기분이 좋은 건 알겠는데, 앞으로 무리는 하지 말자.”

“왜요? 할 건데?”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의 얼굴이라기엔 데일은 너무나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위로 수도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팻말의 내용이 떠올랐다.

나쁜 사람들만큼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다는 걸 망각하게 만드는 팻말이었다.

팻말을 세운 누군가는 왜 그런 팻말을 세웠을까, 여긴 이렇게나 평화로운데.

식량이 부족해서 한 명이라도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세웠던 게 아닐까.

‘직접 겪지도 않았으면서 괜한 겁을 집어먹었던 거야.’

어쩐지 이번 퀘스트도, 앞으로의 모든 일도 순조로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날 밤. 남자 한 명이 몰래 타운하우스를 빠져나갔다.

그의 아내와 딸은 남자가 향하는 곳을 알고 있었기에 앞을 막아섰지만,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남자를 끝내 막지 못했다.

그는 9구역을 통과해 10구역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향한 곳은 19구역이었으나 그 앞인 10구역에서 멈춰야 했다.

19구역의 세력이 19구역은 물론, 항구가 있는 18구역과 10구역까지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소식을 나르던 이다. 막지 마.”

19구역의 관계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남자를 알아보고 앞을 막아선 이들을 뒤로 물리자, 남자는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께서 내려주신 은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습니다. 아껴왔던 식량을 제단에 올리고자 합니다.”

남자는 품속에 오래 아껴왔던 소량의 식량을 품고 있었다.

타운하우스의 사람들이 연회장 한구석에 신께 기도드리기 위한 작은 장소를 마련했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신은 신전에서 만나 뵙는 것.

자신들 사는 아무 곳에 신을 기리기 위한 장소를 만든다고 해서 신이 그 모든 곳을 다 방문해 줄 것이라는 오산이 남자는 가련하고 우스웠다.

신이 아무 곳에서나, 누구나 영접할 수 있는 존재라면 신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제대로 감사드리지 않으면 신께서 노하실 것이야.’

가족과 타운하우스의 사람들이 신의 화를 입지 않으려면 혼자서라도 이렇게 행동해야만 했다.

남자의 말을 들은 관계자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건물의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오는 그의 하얀 옷자락엔 금실로 성스러운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신께서 은총을 내리셨다고?”

“예, 저와 제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음을 알고 풍족한 식량을 내려주셨습니다.”

“…….”

신관은 이 말이 흘려듣지 말아야 할 일임을 직감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린 남자를 향해 자상하게 팔을 뻗었다.

“자네가 말한 신의 은총에 대해 더 상세히 듣고 싶네. 이 일을 주교님께 소상히 말씀드리지 않겠나?”

“제가 직접 주교님을 만나 뵙고서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답하는 신관의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도탄에 빠진 신도를 위해 뛰어들 것처럼 상냥해서, 남자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갈베스 주교는 제국의 최동단 지역인 동부 제3교구를 관장하는 주교였다.

동부 제3교구는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평화로운 지역이었는데, 겉으로라도 그렇게 보일 수 있던 이유는 주교 바로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보좌주교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보좌주교 리븐은 누군가 갈베스 주교의 만행을 까발리려 하면 귀신같이 찾아내 입을 막았다.

주교를 끌어내리려는 계획이 새 나가지 않도록 사람들은 쉬쉬하고 서로를 단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좌주교 리븐에게로 정보가 들어가는 일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러니 주교가 아무리 만행을 벌여도, 주교를 처단하려는 세력은 누구의 입에서 정보가 샜는지를 의심하다가 와해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종말 후 신도들과 함께 수도의 신전으로 거처를 옮긴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리븐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유리창을 투과해 카펫 위로 내려앉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워낙 밝아서 레몬 빛을 띠는 그의 머리카락은 가늘기도 가늘어서 햇빛 아래 서면 투명해 보이기도 했다.

연둣빛 눈망울도 물 빠진 느낌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피부 또한 매우 얇은 피부를 가진 건지, 창백한 피부 아래를 흐르는 혈관들의 색이 눈에 띌 지경이었다.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를 가진, 힘 하나 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내가 사람이면 부축해줘야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병약한 외형의 남자였다.

“너의 머리카락은 내리쬐는 햇살을 닮았구나. 따스한 햇볕은 신의 색이라는 것을 아느냐. 그러니 너는 부모 없는 아이가 아닌 신의 아이인 것이다. 알겠느냐.”

“예, 신관님.”

그때부터 리븐에게 있어 신의 색이란 제 머리카락을 닮은 밝고 환한 금색이었다.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도배된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현란한 햇빛은 어쩐지 신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단정하지만 따듯하고도 화려한 금빛. 신의 색이란 그런 색이지 않을까, 리븐은 생각했다.

리븐이 거울 들여다보기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쯤일 것이다.

내 머리카락 색이 햇살을 닮아 있었다니, 젊은 신관의 손에 이끌려 신전에 들어온 왜소한 고아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자꾸만 들여다봤다.

거리에 방치되어 못 먹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였다.

“아버지라 부르거라.”

“예! 예, 신관님!”

현 갈베스 주교가 젊은 주임사제일 무렵,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는 말에 리븐은 행복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쩔 줄 몰라 하며 크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보좌주교가 된 지금, 리븐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신의 색이며 햇볕의 색을 닮았다던 밝은 금발 머리카락은 여전했고 자신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째서.

‘지금 나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그가 속으로 물었다. 우스운 질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죄를, 내가 지은 죄를 다 어찌 속죄할까.”

리븐은 신을 섬기는 신관으로서 절대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을 지껄이며 희게 미소 지었다.

“용서를 빈다면 받아 줄 신이 있기는 하고?”

-똑똑.

그때, 누군가 리븐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소리에 놀란 그가 급하게 거울 속 제 얼굴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을 지워냈다.

“리븐 님, 방에 계십니까?”

“예,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찾으십니다. 손님이 온 모양입니다.”

“가겠습니다.”

리븐은 제가 앉아 있어 움푹해진 침대 자리를 정리하고서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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