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자, 여기 앉아서 기다리자.”
마침 비어 있던 벨벳 소파가 보였다.
애런을 사이에 앉히고 에즈라와 나란히 소파에 앉자, 자연스럽게 레이스가 소파 옆으로 와 섰다.
단상 위에 올라선 아론이 보였다.
-12월 16일, 오늘의 저녁 집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연회장에 아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런대던 연회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늘이 12월 16일이었구나. 이곳에 와 처음 듣는 날짜였다.
몇 월 며칠인지 알 수가 없어, 낮과 밤 외에는 시간 개념이 사라졌었는데, 오랜만에 듣는 날짜가 반가웠다.
‘곧 크리스마스네.’
여기도 크리스마스가 있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따 데일에게 물어봐야겠다.
크리스마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랍시고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고르거나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그냥 기분을 좋게 만드는걸.
-오늘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곳에 거주 중인 사람들의 사소한 소식이었다.
옆 구역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굴러가는 돌멩이를 보고 적인 줄 알고 기겁해 뛰어가다 넘어져 발목을 삔 사람의 소식을 전할 땐,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로 작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아론은 얌전하고 고지식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잘못 봤던 모양이다.
돌멩이를 보고 놀라 발목을 삔 사람의 소식을 전하며 아론은 약간의 연기를 보탰는데, 그게 아주 실감이 났다.
아론이 연기할 때, 단상 아래 얼굴이 붉어진 이가 있길래 아래를 보니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당사자가 얼굴을 붉힐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였던 것이다.
데일도 아는 사람인가보다. 데일은 저 멍청이, 하는 표정으로 다친 이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가지, 이곳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들이 지나갔을 때.
아론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오늘까지 소식을 몰라 우리가 궁금해했던 스텔라와 헨리는.
아론이 데일에게 전해 들은 둘의 소식을 전했다.
아론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내용을 보아하니, 데일은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그저 둘의 죽음만을 전한 것 같았다.
“스텔라가…….”
“그럼 아이는…….”
“둘이 함께.”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겠구나.”
저마다 한 마디씩 뱉어내며 사람들은 둘의 죽음에 비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 죽음도 아니고 내가 사랑했던 이의 죽음도 아니었는데, 누군가의 죽음에 진심으로 통탄해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위안받고 있었다.
-잠시 묵례하겠습니다.
망자의 빈소도, 빈소에 내려놓을 작은 국화 한 송이도 주어지지 않았으나, 모두 짧은 시간을 이젠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고개 숙였다.
가장 침묵한 시간이었으나 마음만은 가장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고개 숙인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수치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수치는 반짝반짝 깜빡이며 흔들리다가…….
[희망감: 43 / 절망감: 56
⇒ 희망감: 43 / 절망감: 59]
‘절망감이 3 높아졌네.’
내겐 작은 위로를 주었던 시간이었는데, 돌아오지 못하게 된 동료를 생각하며 그들의 절망감은 조금 더 깊어진 것이다.
짧은 침묵 후 아론이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미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물러나는 아론 뒤로 데일이 올라섰다.
안타까운 소식에 슬퍼하던 이들이, 돌아온 반가운 얼굴에 마음을 달래고 있음을 변화하는 수치로 알 수 있었다.
[희망감: 43 / 절망감: 59
⇒ 희망감: 45 / 절망감: 59]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데일이 이쪽을 손짓했다.
-제 일행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가 앉은 소파로 모였다.
‘이 분위기 뭐야. 일어나야 하나?’
뻘쭘해져 에즈라와 눈을 마주치고 함께 어기적거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에즈라가 나에게 먼저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 벨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를 시작으로 간단한 인사를 이어갔다. 뻘쭘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는 나를, 단상 위에 선 데일은 피식피식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데일이 입을 열었다.
공원에서 그를 마중하러 나왔던 군인들이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 3채를 앞으로 밀었다.
수레에 그득히 쌓인 통조림을 보며 누군가는 고개를 뺐고, 누군가는 침을 삼켰다.
-당분간 식량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리로 오는 길에 통조림 공장을 발견했는데, 운 좋게도 아직 아무한테도 발견되기 전인 듯 보였으니까요.
내 능력은 숨기기로 데일과 미리 말을 맞췄다. 어떤 능력인지 알려지면 누군가는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저것보다 훨씬 더 있다는 말인가요?”
“너무 다행이에요. 허기를 참기가 힘들었는데, 당분간 배고파서 허리가 고꾸라질 일은 없겠어요.”
-모두 넉넉히 나눠드릴 테니 조급해 마시고 천천히 받아 가세요.
데일의 말에 사람들이 분주히 단상 아래로 모여들었다. 줄을 선 그들의 얼굴 위로 일말의 안도감이 피어났다.
‘수치가 많이 달라지겠지?’
머리 위 수치들이 반짝였다. 이제 곧 저 수치들의 평균이 뜰 것이다.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급한 문제는 없으니까, 기대감을 품고 사람들의 머리 위를 살폈는데.
[희망감: 45 / 절망감: 59
⇒ 희망감: 45 / 절망감: 57]
고작 절망감 2가 낮아졌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변동 폭이 작은걸.’
이래서 언제 희망을 70까지 올리고 절망을 30까지 낮춘단 말인가.
그때, 받은 통조림을 품에 들고 가는 몇몇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을 게 생겼군.”
“표정이 왜 그리 어두운가. 어렵게 구해와서 나눠준 대령님 기운 빠지겠네.”
“그래야지, 그래야 하는데……. 이것도 언젠간 다 떨어질 게 아닌가.”
“일단 오늘 내일만 생각하자고. 너무 멀리 생각하지는 말게.”
‘아…….’
눈에 보이는 식량의 양이 며칠 치밖에 안 되어서 그러한가.
오늘 내일이 아닌, 미래의 불안감까지 채우기엔 오늘의 식량이 너무 적었나 보다.
‘그럼 더 많이 채워주자!’
오늘내일 그리고 한 달 몇 달을 먹어도 충분한 식량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해준다면 이들의 절망감은 큰 폭으로 줄지 않을까.
채우는 건 자신 있다고. 나는 다 비어버린 수레 3채를 보며 기합을 넣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얼굴에 물을 끼얹자 점차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떠오른 건 어젯밤, 데일에게서 전해 들은 이곳의 상황이었다.
“수도 아래에 낙원으로 가는 숨겨진 길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네?”
최후의 낙원이 지하도시였던 거야? 아니면 해저도시?
그건 이제까지 데일에게 들어왔던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우린 대화를 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정보인 게, 데일의 동료들이 이미 바다 건너 최후의 낙원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군도를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8구역 사람들은 데일이 도착하기 전부터 19구역의 사람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수도에서 가장 큰 집단이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바로 옆인 18구역에 항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19구역 세력이 쇄빙선을 타고 군도로 향할 때, 다른 구역의 사람들을 일부 태웠는데 그중에는 8구역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는 크고 작은 섬들이 포진한 군도의 한가운데 멈춰 서서 몇 척의 구명정을 내렸다. 구명정을 타고 각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흩어져 낙원의 단서를 찾았지만…….
‘낙원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고?’
그 이후 불거진 소문이 수도 어딘가, 지하에 낙원으로 통하는 숨겨진 길이 있다는 말이었다.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그렇다면 무리가 점령한 구역이 아닌 빈 구역을 수색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길이 있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이미 그 길을 통해 낙원으로 갔을…….
-똑똑.
아침에 내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데일이 아니면 레이스였다.
어제 내 방에 와서 잔 에즈라는 지금까지도 정신없이 꿈나라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두 남자 중 한 사람이란 소리인데, 점잖게 방문을 두드리는 모양새로 보아 레이스일 것이다.
데일이라면 노크도 하기 전에 방 안에 들어와 있었을 테니까.
대충 올려 묶은 머리에, 수건으로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으며 문을 열었다.
어제 탐색해봤을 때 불우이웃으로 뜨길래 치료도 싹 해줬는데 뭔가 문제가 있었나?
“레이스 왜…….”
레이스가 아니다. 문 앞에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은 에메랄드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아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