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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84)화 (84/108)

84화

이놈의 시스템이 나를 벌써 집단에 넣어버렸다. 내 의사는 어디 쓰레기통에 처박았나 보다.

물론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데일의 동료들과 합류하기로 계획하고 있긴 했지만.

나는 자기 멋대로 시작된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15명?’

이곳에 있는 명수를 다 세었다.

저쪽과 우리, 딱 15명이었다.

그리고 굶주린 사자들의 머리 위를 살폈다.

[희망감: 55 / 절망감: 41]

[희망감: 40 / 절망감: 35]

[희망감: 45 / 절망감: 45]

다섯 명의 수치는 다 제각각이었다.

그럼 저 희망감 55, 절망감 44는 이곳에 있는 모두의 평균인 것 같았다.

멀리서 이쪽을 보고만 있던 데일과 아론이 다가왔다.

그 둘의 머리 위에도 어김없이 수치가 떠 있었다.

군인 다섯의 희망감이 높은 편인지, 절망감은 낮은 편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다가온 둘 위에 떠 있는 수치를 보니 대략 감이 왔다.

아론은.

[희망감: 50 / 절망감: 70]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얼굴에 비해 가진 절망감이 컸다.

데일은…….

그의 수치를 확인하려니 어쩐지 긴장이 됐다.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그의 머리 위를 살폈다.

[희망감: 80 / 절망감: 20]

20이구나, 데일의 절망감은. 희망감은 80이나 된다.

안도감이 들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그가 많이 상심해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 며칠 전에 직접 본 것도 그렇고.

절망 수치가 꽤 높지 않을까 했는데, 잘 이겨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버스에 올라 나머지 이들의 머리 위를 살폈다.

에즈라는 희망 65에 절망 30

애런은.

[희망감: 95 / 절망감: 5]

내 새끼는 뭘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는 중이구나. 애는 그래야지. 그래도 저 정도로 높게 나온 게 신기하긴 한데, 뭐 어떠한가, 희망감이 높은 상태라 좋았다.

마지막으로 레이스도 확인했다.

[희망감: 70 / 절망감: 85]

희망감도 절망감도 동시에 저리 높은 게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쉽겠다, 이 퀘스트. 금방 클리어할 수 있겠어.’

데일 동료들의 식사 상태를 보니 잘 못 먹고 있는 모양인데, 그럼 배고픔만 해결해 줘도 절망감은 낮아지고 희망감은 쭉쭉 오르겠지!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지 않나.

“하하하하.”

“형수님? 크게 웃으시면 금방 배고파집니다.”

웃음소리가 절로 커졌다.

“하하하하, 걱정 말아요.”

절망감 44?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낮춰줄 테니.

배고파서 힘드신가요? 바로 통조림을 대령해 드립니다.

“아하하하, 태평성대가 어려운 일일까요?”

“예?”

내 속내를 모르는 군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8구역은 제국 귀족들의 타운하우스가 몰린, 가장 비싼 집들이 모인 곳이었다.

데일의 동료들이 터를 잡은 대저택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고급스럽고, 높은 가격을 가졌을 만한 곳이었다.

“밀런 공작가의 타운하우스야.”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장한 남성들이 일행의 차를 알아봤다. 그들이 확실히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아론이 차 창문으로 고개를 빼내 눈을 맞췄다.

무거운 철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끝도 없는 정원이 나타났다.

따듯한 날씨에, 정원사들의 손길이 닿았을 적엔 색색의 꽃들이 가득했을 정원이다.

현재는 다 시들어 색을 잃어버린 정원을 바라보며, 나는 그곳에 상상의 꽃들을 채워 넣었다.

“헤에.”

데일의 설명을 듣는 애런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리고 허둥지둥 뭘 찾는 듯해 보였는데, 아마 홀로그램 박스를 찾았을 것이다.

애런의 귀에 속삭였다.

“너 홀로그램 박스 찾았지 지금?”

“응.”

마치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애런은 귀엽게 웃었다.

“무슨 단어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타운하우스.”

대충 옆에서 대화 내용을 눈치챈 데일이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여기랑 비슷한 곳을 찾고 싶은 거면 성이라고 찾아야 더 가까운 이미지가 나올걸?”

“성, 그렇구나.”

데일의 말대로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고급스러운 저택이라기보다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 양식을 가진 화려한 고성에 가까웠다.

마치 저 높은 탑에 야수가 장미를 보관해 둔 방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성이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성 앞에 차를 대고 내리자, 앞차에서 막 내린 아론이 다가왔다.

“대령님, 우선 쉬고 계십시오. 같이 오신 일행분들과 쉬고 계시면 저녁 집회 전에 제가 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방은, 음 본관…….”

아론은 제 상관의 거처를 어디로 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는데, 데일은 그의 답도 듣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론, 별관 3층을 누가 쓰고 있나?”

“……아, 별관은 비어 있습니다.”

“그럼 거기로 하지. 나랑 내 일행들 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애런의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가는 데일을 따라갔다.

예리한 감이 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데일, 여긴 구조가 어떻게 돼요?”

“여기 구조?”

“네.”

“넌 모르는 건 나한테 묻고 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는 무척이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을 했지만 나는 이미 직감한 후였다.

“데일이 이곳을 잘 아는 것 같아서요. 아론이 별관에 관해 설명도 안 했는데 별관 3층에서 묵겠다고 했잖아요. 전에 왔던 적이 있는 거 아녜요?”

“…….”

그는 모르는 척하려 눈동자를 굴렸지만 내 눈엔 다 보였다.

“이런 고성이 본관 하나로만 이루어진 곳은 드무니까 그렇지. 상식이라고.”

“아…… 그런가?”

나는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왜 너의 짧은 상식으로 사람을 의심하지?”

“아닌가 보네.”

나는 소설의 작품소개에서 보았던 그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데일 캐드. 27세. 은발에 벽안.

세간에 알려진 신분은 작은 공국의 대령이나 진짜 신분은 숨기고 있다.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다닌다.」

‘진짜 신분은 숨기고 있잖아, 너!’

데일이 이 집 아들이란 감이 왔다. 로판 독자의 감은 예사롭지 않단 말이다.

“캐드 대령님!”

멀리서 데일을 발견한 누군가가 오래전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데일은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먼저 가 있어. 아론이 안내해 줄 테니까.”

방향을 튼 남자를 보다가 나도 아론을 따라 발길을 돌렸다.

“밀런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소문으로 듣던 것답게 어마어마하군요.”

옆으로 온 레이스가 웃으며 내게 말을 붙였다. 머리 위엔 절망 85란 수치를 띄우고서 말이다.

“전 이보다 더 좋은 곳을 알지만요.”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중앙에 본관, 본관에서 날개처럼 돋아난 형태의 동관과 서관, 그리고 맨 뒤에 별관.

총 네 개의 커다란 건물이 사각형 구조를 이룬 폐쇄적 형태의 성이었다.

저녁 집회는 본관 1층에 있는 연회장에서 열렸다.

어스름한 저녁 불빛 속에서, 동관과 서관에서 나온 이들이 본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별관에서 나와 걸어가는 우리를 누구는 모른 척했고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흘깃거렸으며, 대다수는 지친 모습으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기운 없고 무기력한 모습들이었다.

‘이들의 행복감과 절망감을 보여줄래?’

시스템 창이 내 명에 따라 창을 띄웠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 기울어진 시소

당신이 소속된 집단의 희망 수치를 7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절망 수치는 30 이하로 낮추세요.

인원(52명)]

[희망감: 43 / 절망감: 56]

타운하우스로 오기 전, 15명으로 측정했을 때는 적어도 희망감이 절망감보다 높았는데.

이곳에 와 집단의 인원이 늘어난 후로, 희망감은 더 떨어졌고 오히려 절망감은 치솟았다.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폭이 더 커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아직 무언가를 하기 전이었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으니까.

빛이 새어 나오는 연회장 앞에서 애런은 처음 보는 환경과 사람들을 눈에 담기 바빴고, 에즈라는 조금 경직돼 보였다.

레이스는 조금 뒤에 서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애런의 머리통을 보거나, 흥미 없다는 동태눈으로 주위를 쳐다봤다.

“들어갈까?”

들어선 연회장은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입장해, 다 같이 춤을 춰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치스럽게 장식된 공간이었다.

2층 높이로 뚫려 있는 공간의 한가운데 단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아론과 우리보다 먼저 방을 나간 데일이 보였다.

동료들과 하하 호호 웃고 떠들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에 맞춰 제 팔을 방방 흔들어주던 애런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은 왜 우리랑 안 있고 저기에 가 있어?”

“데일 형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그럴걸.”

“흠.”

아이가 작은 입을 가로로 딱 다물자, 통통한 볼살도 자연스럽게 더 볼록해졌다.

애런은 지금 상황이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왜 흠, 이래? 형이 나랑 애런 옆에 없는 게 싫어?”

“흐으음.”

나는 아이의 가슴 부근을 톡 건드렸다.

“전에는 형이 친구들 만나는 모습 보니까 여기가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다더니.”

“그땐 그랬는데.”

애런은 자기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그랗게 오므린 입을 이리저리 빼죽거렸다.

“지금은 아니네.”

“풉.”

꼬맹이인 지금도 이렇게 질투가 많으면 나중에 커서 더 심해지는 거 아냐?

벌써 불같은 질투를 보이는 애런이 내 눈엔 그저 귀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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