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여주한테도 이런 식이었을 것 같다.
옆에 앉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데 이렇게 설레지 않기도 힘든 일이다.
“그래요. 그건 그렇고, 다른 손등에 상처를 만들어 줄 생각은 없으니까 대칭을 이루려면 빨리 나아요.”
레이스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남자의 금안에 기쁜 기색이 가득 들어찼다.
“이제 절 믿어주는 건가요?”
“믿는다기보다 막 대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
가는 길에 날씨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버스 차창에 매달려 회색 먹구름을 구경하던 애런이 차창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떨어진다.”
눈이 내리는 건 자주 봤지만 이곳에 와서 우박이 내리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투둑, 투둑, 투두두둑.
우박 알갱이가 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리 우산 없지?”
“없지.”
알면서 한번 물어봤다. 작아도 맞으면 아프겠는데. 우박이 그칠 때까진 영락없이 버스 안에 갇혀 있는 신세일 것 같았다.
나는 버스 차창을 때리는 우박 알갱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궂은 날씨를 너네가 한층 더 X같이 만들어주니 고맙구나.
“저거 뭐지.”
애런이 이번에도 무언가를 가리켰다.
커다란 널빤지가 푯말처럼 땅에 박혀 있었다.
데일이 버스의 속도를 줄였다.
널빤지에 천천히 가까워지며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낙원을 찾아왔다면 당신이 왔던 길로 돌아가시길 권합니다. 이 앞에 낙원은 없습니다. 당신이 기대하는 그 무엇도 없을 겁니다.-
날씨에 이어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푯말이었다.
떨어지는 우박 소리 사이로, 에즈라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데일도 그 푯말을 읽었을 텐데, 그는 그저 다시 버스의 속력을 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떴다.
[특정 지역에 도착하여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오픈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퀘스트가 오픈됩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 기울어진 시소
종의 요정은 소속된 집단이 절망으로 물드는 일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당신이 소속된 집단의 희망과 절망 수치를 관리하세요.
집단의 최소 인원 요구치(10명)]
[희망감: 최소 인원 요구치 미달로 수치 측정되지 않음
절망감: 최소 인원 요구치 미달로 수치 측정되지 않음]
‘어렵지 않겠는데?’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는, 연민하는 대상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복제하는 것.
어떤 집단이든 물자가 넉넉한 곳은 없을 거고, 그게 식료품이든 뭐든 나는 부족한 것들을 풍족하다 못해 넘치게 해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절망감은 감소하고 희망감은 오르지 않을까.
❅
수도의 16구역으로 들어가기 직전, 데일은 커다란 건물 뒤에 버스를 숨기듯 주차했다. 걱정했는데 내리던 우박은 가볍게 인사만 하고 사라졌다.
“잠깐 나오지 말고 있어.”
그가 무전기를 들고 운전자석에서 일어났다.
내 시선이 무전기 주파수를 맞추며 버스에서 내리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연락이 끊어졌을 때를 대비해 특정 주파수를 공유해 왔어. 만약 내 일행이 지금 8구역에 있다면 송수신이 가능한 거리야.”
버스 차창 밖으로, 무전기를 들고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일이 보였다.
그를 보다 그의 주위로 시야를 넓혔다.
너무 무방비하게 서 있는 거 아닌가, 저 남자.
도시 외곽의 숲 지역이라, 보이는 건물은 몇 없고 다 죽어가는 나무만 듬성듬성해 사람이 숨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왜 굳이 나가서 통화하는데? 위험하게.
‘오, 말한다.’
데일이 입을 움직였다.
“형아 통화하네. 근데 왜 몰래 해?”
“몰래?”
“우리 안 들려주려고 나가서 통화하는 거 아니야?”
허씨, 듣고 보니 그렇다.
애런의 얘기에 창문을 슬그머니 밀었다.
데일의 목소리가 열린 창을 통해 들려왔다.
“응. 응. 그래? 여긴 어른 넷 아이 하나. 많네. 응. 19? 아니, 16구역이라니까. 16구역에? 안 좋네. 17구역으로 올라가서 들어가야겠다. 응. 빨간 버스, 버스 번호는 429.”
무전기를 내린 데일이 버스로 다가왔다.
우리는 창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서 다가오는 남자를 기대에 찬 눈길로 구경했다.
“통화가 된 걸 보면 데일 동료들…….”
“어, 맞아.”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떨리던 남자의 입꼬리가 결국은 호선을 그리며 시원하게 상승했다. 오랜만에 부드럽게 웃는 데일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놈들 다 뒤졌을 줄 알았더니 징그러울 만큼 많이도 살아남았네.”
“다행이다.”
허술하게 풀려버린 눈망울로 남자는 날 올려다봤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 남자가 지금 이런 얼굴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데일.”
“…….”
나와 내 옆에 있는 꼬맹이, 그리고 버스 안의 둘을 보던 데일은 조용히 뒤돌아섰다.
“어, 형아 왜 뒤돌아?”
“얼굴 보여주기 싫어서.”
“왜?”
나는 대답 대신 상체를 좀 더 빼서 뒤돌아서 있는 데일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렸다.
얇은 은색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며 부드럽게 엉겨왔다.
“그만 안 하냐.”
“아하하.”
까르르 웃는 애런을 힐끗 쳐다보는 데일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기쁜 얼굴로 버스에 올라탔다.
❅
데일이 동료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은, 16구역은 이미 그곳을 차지한 놈들이 있는데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니 16구역이 아닌 그 위, 17구역으로 돌아서 8구역으로 들어오란 소리였다.
“17구역에서 조금만 가면, 8구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공원이 하나 있어. 그곳에서 만나 8구역으로 함께 갈 거야.”
버스가 천천히 17구역으로 들어섰다.
주거구역으로 보이는 17구역은 작고 긴 건물들이 줄지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최소 층수가 4층은 되는 것 같았다. 단층집은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가 좁았다면 높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좁아 답답하게 느껴졌을 텐데, 주택가로 들어오며 좁아질 줄 알았던 도로는 여전히 널찍해 답답함이 없었다.
널찍한 도로 위를 우리가 탄 버스만이 홀로 달렸다.
“집이 많아.”
애런은 패딩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버스 창 아래로 눈만 빼꼼 내밀고 17구역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했다.
나는 자꾸 그런 애런의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로사 마을에서 세바스찬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일이 생각나 염려가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눌러도 눌러도 애런의 머리는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어휴.
‘하긴 애런은 날아오는 총알도 멈추게 할 능력이 있으니까.’
물론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 걸로 봐서 늘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좀 안심이 됐다.
그래, 보라고 하자. 처음 보는 새로운 구역이 아이 눈에 얼마나 신기할까.
조심스럽게 버스를 몰며 데일이 설명했다.
“수도엔 이미 무리를 이룬 몇 집단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이 형성되어 있대. 우리가 통과하려 했던 16구역도 그 구역 중 하나고.”
하지만 17구역은 점거한 이들이 없는, 쉽게 말하면 공용구역에 가까웠는데, 데일의 동료들이 점거한 8구역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구역이라 알려져 타 구역 사람들의 출입이 낮다고 했다.
“오늘 16구역 사람들은 강 건너의 15구역으로 쳐들어갔기 때문에 17구역에 올 일은 없을 거라 말하더군.”
데일의 동료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스파이라도 심어놓은 걸까.
“데일의 동료들은 유능한가 봐요.”
“상관의 능력치를 닮아가는 법이지.”
그래도 가는 길에 어떤 이들을 마주치게 될지는 미지수다.
우리처럼 오늘 막 수도에 들어와, 이곳 소식을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저 아줌마처럼.’
아줌마?
어느 건물에서 방금 빠져나왔는지, 건물 출입문 앞에 중년 여성이 홀로 서 있었다.
“벨, 저기.”
“응.”
나처럼 막 여자를 발견한 에즈라가 두려운 목소리로 그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때, 중년 여성의 시선이 버스를 향했다.
“벨, 저 사람 다, 달려오는데?”
‘데일이 버스에 타고 나서, 출입문을 잠갔었나?’
나는 그 즉시 버스 출입문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갔다.
중년의 여자는 도로를 금방 가로질러 달려와 버스 출입문을 두드렸다.
“새로운 신도들이십니까?”
신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데일을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네놈들 신도가 아니구나! 이 악의 무리야! 악의 무리는 신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절대 태워서는 안 될 부류의 사람이었다. 말 안 해도 데일 역시 아는 모양이다. 그가 아주 천천히 가던 버스의 속력을 높였다.
“신의 인도 없이 낙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악의 무리야! 정신을 차리…….”
손바닥으로 버스를 치는 소리가 점점 뒤로 밀리더니, 어느덧 광인은 저 멀리에서 이쪽을 보며 소릴 지르고 있었다.
광인의 목청은 대단했다. 아주 오래오래 들렸으니까.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레이스가 창문을 열고 팔을 흔들었다.
“또 만나요~”
버스 출입문 쪽으로 다가온 에즈라는 내 옆에서 울상을 지었다.
“벨.”
“응.”
“나 수도 첫인상이 아주 별로야, 넌 어때?”
“나는 뭐…….”
나는 근심 가득한 표정의 그녀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예상했던 일이야. 오히려 아직은 예상보다 너무 별것 없어서 심심할 정돈데.”
“그래? 그럼 지금이 네 예상보다는 낙관적인 상황인 거니까 좋은 거지?”
“응, 에즈라. 그렇게 생각하자.”
“알겠어.”
그녀는 주머니에 넣어둔 총을 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버스가, 이전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