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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81)화 (81/108)

81화

‘이렇게 평화롭게 레벨 업 했던 때가 있었던가.’

멍하니 허공에 뜬 선택 창을 보다가, 거울 보기를 끝내고 침대로 올라오는 애런의 손을 잡아끌어 앞에 앉혔다.

내일 우리는 수도에 들어간다.

그리고 수도엔 아이를 데려가려는 못된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을 확률이 높다.

나는 애런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어…… 애런.”

“응?”

그곳엔 널 데려가려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난 수도에 가야 해. 그리고 낙원까지도.

이 여정이 널 위해선 좋지 않은 선택이란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날 위해 이런 선택을 한 만큼…….

“지켜줄게, 꼭.”

“응!”

“…….”

얘 무슨, 지켜준다는 말이 앞으로도 계속 밴드에 그림이나 그려준다는 소리처럼 쉬운 일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내가 널 지켜준다니까.”

“응! 알아!”

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우렁찬 대답이다. 나는 조금 김이 샜다.

“그래, 알면 됐어.”

“응, 나 다 알아!”

“그래그래, 애런은 다 아는구나.”

“나도 벨 지켜줄 거야.”

“……그래. 고마워, 애런. 나도 애런 마음 다 알아.”

“너희들이 뭘 알아?”

“……!!”

난데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목 끝까지 올라온 비명을 꾹 삼키며 뒤를 돌자, 데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작은 스툴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아니 왜 여기, 이 밤에 도대체 자기 객실도 아닌데 왜, 무슨 귀신처럼 소리도 안 내고 왜 여기서 이러고 앉아 있는 건데요!”

놀라니까 말도 꼬여서 나왔다.

나는 놀라서 무심결에 덥석 끌어안았던 애런을 품에서 놔줬다.

“형 아까부터 저기 앉아 있었는데.”

“언제부터!?”

“아까 불 켰을 때부터 있었는데.”

“그런데 왜 말을 안 해줬어?”

“그게…….”

애런은 죄지은 사람처럼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형이 막 눈빛을 쐈어. 말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내 눈빛은 옆으로 슬슬 피했다.

“…….”

그런다고 진짜 입을 다물었어?

이놈의 남자들이 그냥.

나는 눈을 내리감으며 콱 입을 다물었다.

데일은 이때다 싶어 빈정거리는 투로 나불거렸다.

“‘지켜줄게, 꼭.’ 잘 봤다. 이야~ 감동적이더라. 통조림 주제에 사람을 지킨다니, 애틋하기도 하지.”

“그래서 그쪽이 여기 있는 이유가 뭐라고요?”

은근슬쩍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은 데일은 손끝으로 내 이마를 툭 튕겼다.

“우리 요정님 잘 계신지 야간 순찰 왔다가 그만 잠들었다. 됐냐?”

“…….”

데일의 시선이 물끄러미 침대 위를 훑었다. 애런의 이마에 붙은 밴드나 구급상자 같은 것들.

“요정아, 나도 다쳤다.”

“그래서요.”

“전에 열차 사다리 오르는데 돌기가 있더라. 손가락을 콕 찔렸네.”

“예, 그래서요.”

남자는 헤벌쭉 웃으며, 내 눈앞에서 제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붙여야지.”

나는 눈매를 좁혀 손가락을 노려봤다. 도대체 어디에…… 아, 상처가 있긴 있었다.

“거참 되게 아파 보이는 상처네요.”

“응, 아파.”

“…….”

“아, 나도 우리 통조림이랑 꼬맹이랑 지켜주다가 다친 건데에~”

이러다 자는 사람들 깨겠다. 큰 목소리를 내는 남자의 입을 틀어막은 후 구급상자를 열어 밴드를 꺼냈다.

제 새끼손가락 끝에 밴드를 감는 내 손을, 데일은 조용해진 채로 쳐다봤다.

“넌 애밖에 안 보이지.”

급 진지해진 목소리가 사람을 약간 당황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무심히 대답했다.

“그럼 뭐가 또 보여야 하나.”

“…….”

싹둑, 삐져나온 밴드 끝을 자른 후 데일에게 눈짓했다. 이제 옆방으로 가란 소리였다.

“잘 자요.”

“잘 자, 형아.”

“…….”

밤새 안녕하라며, 애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데일에게 손까지 흔들어줬다.

밴드가 감긴 손가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 또 이 자식이 내 이마를 톡 치려나 보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는데.

“나도 신경 좀 써라.”

남자의 큰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눈을 떠 머리를 쓰다듬는 데일을 올려다봤다.

그는 네가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싱겁게 웃었다.

“무신경하긴. 자라.”

문을 닫고 방을 나가는 데일을 쳐다봤다. 무신경한 게 아니라 모른 척을 하는 거다, 이 남자야. 깨닫지 말아달라고.

‘어차피 헤어질 거 깨달아서 뭐 할 건데.’

“…….”

미뤄둔 선택지나 마저 선택하자.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루트2.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개방 시, ‘자기혐오’ 포인트가 적립될 위험이 있습니다.

선택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자기혐오 포인트라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하이 리턴을 원한다면 하이 리스크도 감수해야지 뭐.

나는 예를 눌렀다.

호수에 침수된 기관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안 되네요.”

“그러네.”

데일은 갑자기 호수에 코를 박은 열차를 끌어내 보겠다며 내게 기부를 요청했다.

그러나 원래 능력치의 20퍼센트가 활성화된 정도로 될 리가 있겠나. 턱도 없는 소리였다.

데일이 찝찝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네가 능력이 부족하네. 언제 다 개방시켜 줄래?”

“뭐래.”

열차가 꿈적도 안 한 게 뻘쭘한지 구시렁거리는 데일을 뒤로하고 객실로 돌아갔다.

잠은 얼마 못 잤다. 우리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나와 애런, 에즈라는 열차에 남고 데일과 레이스만 보내 차를 구해오게 할까도 생각했지만, 일행이 나뉘는 게 탐탁지 않았다.

결국,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서 다 함께 열차를 나섰다.

다행히도 차를 금방 발견했다. 버려진 버스였는데, 에즈라의 말로는 수도 안에서만 운행되는 버스라고 했다.

누군가 이 버스를 타고 수도를 탈출해 이곳에 내린 걸까.

어쨌든 다행이었다. 긴말 필요 없이 바로 버스에 기름을 채웠다.

열차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버스를 발견한 덕에, 우리는 돌아가 우선순위에 밀려 열차에 두고 왔던 짐을 챙겨 버스에 실었다.

그리고 쭉 길을 달렸다.

나는 애런과 버스 앞좌석에서 나란히 앉아 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맨 뒷좌석 창가 자리에 레이스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에즈라, 애런 좀 봐줄래?”

“응.”

에즈라에게 잠든 애런을 맡기고 뒷좌석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창밖으로 향해 있던 레이스의 시선이 슬그머니 내게로 향했다.

“어서 와요.”

옆자리에 앉아서 한동안 그가 시선을 주고 있던 밖을 함께 내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계속 묶여 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불편해요.”

레이스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우리한테 한 짓이 있어서, 내내 묶어놓긴 했는데 그래도 좀 걱정이 되던 차였다. 묶인 채 내내 데일에게 차이고 맞았으니까.

그렇긴 해도 질문을 다르게 할걸 그랬다. 불편할 것 같아서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참을게요.”

“…….”

“불편해도 벨 동료들이 안심할 때까지 참으면 돼요. 그걸 원하잖아요, 벨은. 그러니까 참을 수 있어요.”

남자의 다친 손등으로 시선이 갔다. 내가 낸 상처가 아직 덜 아물었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동안 데일이 레이스 옆에 딱 붙어서 감시한 탓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벨이 온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느냐? 그걸 묻고 싶은 거죠?”

레이스는 내게 제 손등을 들어 보이며 눈을 접었다.

“당신이 내 다른 손등에 똑같은 상처를 낸다 해도 그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

그 대답이 어이가 없어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레이스가 내게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또 낼래요? 원한다면 또 해요.”

진짜 얘 뭐야.

“그럴 생각 없어요.”

“아쉬워라, 대칭이 안 맞아서 아쉽잖아요. 해주면 좋을 텐데…….”

묶인 제 두 손등을 내려보며 레이스는 빙그레 웃었다.

레이스는 찐이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남자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버스 운전석에 달린 백미러로 뒷좌석을 주시하는 데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벨, 절 신뢰하기가 힘든가요?”

“신뢰가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요?”

그러자 레이스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여 나를 돌아봤다.

“내게 있어 벨은 유일하니까요. 나를 그곳에 데려가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요. 대체재가 없죠, 벨은. 그러니 나는 벨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벨을 이해할 수 없어요.”

“…….”

“벨, 그러니 언제든 내게 원하는 걸 말하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니까.”

왜 이 남자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걸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레이스도 남주 중 한 명인데, 과연 이 남자가 원작의 여주를 사랑했을까?’

그가 여주를 사랑했다면, 아니 사랑했다고 착각했다면 그건 수단으로써의 사랑이었을 것 같아서.

“레이스.”

“네.”

“누굴 정말 좋아해 본 적 있어요?”

레이스의 대답은 한순간도 막힘이 없었다.

“벨이요. 제겐 당신뿐이죠. 당신을 발견한 순간이 태어나 사랑을 처음 느낀 순간이에요. 아직도 몰라주는군요.”

아…… 이것 봐. 레이스는 정말 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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