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동화? 동화는 애들이나 듣는 거 아냐? 정작 애런은 자는데.”
“들어봐 재밌거든? 데일한테 물어봐.”
데일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들어줄 만할 겁니다.”
“아픈 아빠랑 딸 이야기야.”
“동화 주제가 뭔데?”
“듣지도 않고 주제를 물어봐?”
“교훈적인 동화는 취향에 안 맞아서.”
에즈라야, 네 취향에 맞추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닥치고 들어 그냥. 난 이거 하고 싶으니까.”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고 들을 준비를 했다.
“옛날에 심 아저씨라고 있었는데, 이 아저씨가 시력을 잃은 분이었거든. 근데 이 아저씨가 아내와의 사이에서 너무 사랑스러운 딸을 봤는데, 딸이 태어나자마자 아내가 세상을 떠난 거야.”
“어머, 어떡해.”
“그래서 눈도 안 보이는 심 아저씨가 딸을 데리고 귀족들 저택을 전전하면서 유모들한테 애를 밥 얻어 먹여 가면서 키운다? 대단한 사람이지. 근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한테도 단점은 있었네.”
“아, 설마?”
에즈라가 미간을 팍 구겼다.
“예상가는 거라도?”
“XX, 도박이구나.”
감정 실린 욕설을 보아하니 너……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던 심 아저씨가 연못에 빠진…….”
잠시 멈칫했다.
이 세계관에 스님이 있었나? 없었지 아마?
하는 수 없이 스님을 요정으로 대체했다.
“연못에 빠진 요정을 구해주는데, 이 요정이 헤어스타일은 민머리고 손에 구슬 팔찌를 들고 다니는 요정이거든?”
“그건 요괴 아닌가?”
요정의 외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달리 더 쉽게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부처님.
“요괴 아니고 이 요정이 심 아저씨가 자길 구해준 대가로 아저씨가 눈을 뜰 방법을 알려준 거야. 300골드 정도 태양신한테 바치면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아저씨 돈 없어서 애도 구걸로 키웠다며.”
“맞지, 돈 없지 아저씨. 그러니까 이게 사실 불가능한 방법이잖아. 그럼 이 아저씨가 생각이 있으면 자기 딸한테 가서 그런 말을 하면 돼, 안 돼?”
내 질문에 데일은.
“왜 안 돼, 되게 하면 되지.”
라고 했고.
‘역시 어려움 없이 자란 놈이다.’
레이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딸의 협조를 원했던 거겠죠.”
라고 대답했고, 에즈라는.
“보류.”
대답을 보류했다.
“어쨌든 했어. 그래서 딸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냐면 자길 제물로 바쳐서 300골드를 마련한 거야.”
“그럼 아저씨 눈 뜨고 나니까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네? 눈을 떴는데 그렇게 고생해 키운 딸의 얼굴을 평생 못 보게 된 거네.”
내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화딱지가 나는 지점이었다.
“아니, 심 아저씨 눈 못 떴어.”
“와…….”
막장 드라마에 데일이 작게 탄식했다.
“에? 요정 사기였던 거야?”
“역시 요괴였던 거군요.”
어이없다는 얼굴이던 데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심 아저씨가 어리석었다. 요정에게 머리카락이 없다는 걸 봤을 때부터 그는 그게 요정인지 요괴인지 가려내려고 시도했었어야 했어. 머리카락이 없는 요정은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없으니까. 왜 없냐고? 능력이 있었다면 자기 머리부터 해결했을 테니까!”
데일은 오랜만에 분노한 모습이었고 에즈라는 데일의 추리에 조용히 동의했다.
“데일 말이 맞아요. 자기 머리카락도 못 나게 하는 요정이 무슨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그리고 나는 웃었다. 이들은 전제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으니까!
“잊은 거야? 심 아저씨는 요정에게 머리카락이 있는지 없는지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단 사실을!”
“아!”
“두 분은 흥분하면 앞 내용을 까먹는 경향이 있군…… 억.”
레이스는 마치 자신은 이미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 고고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데일의 분노의 발차기를 맞고 엎어졌다.
“그래서 중간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해주면…….”
“…….”
“…….”
“…….”
“심 아저씨 결국 눈 떴어. 사실은 자기 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자력으로 눈을 뜬 거야. 그러니까 요정은 XX 무쓸모한 것이다, 라는 결론이 나오는군.”
어쨌든 딸도 살아 돌아오고 아저씨도 눈을 떴다 말하니까, 다들 결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해피엔딩이라 좋군.”
“요괴는 벌을 받았어?”
“요정은…… 벌을 받았던가. 그건 기억이 안 나.”
“받았겠지.”
벌을 받았을 거라 확신하는 데일을 쳐다보는데, 잠깐 떨어져서 얘길 듣던 에즈라가 다시 날 끌어안았다.
“벨, 너도 요정이잖아. 나 너한테 소원 빌래.”
“방금 동화를 듣고 깨달은 거 없어? 요정은 소원 안 이뤄줘. 모든 건 자력이다.”
“에이~”
내 말을 가볍게 웃어넘긴 에즈라는 살갑게 제 이마를 내 어깨에 비볐다.
“넌 그 요정과 다르게 머리카락이 길고 풍성한 요정이니까, 다 들어줄 것 같아. 그래 줄래?”
“뭘 빌 건데.”
“같이 낙원에 가는 거야. 근데 더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 무사히 가는 거지.”
“…….”
“가서 행복해지자.”
“너 술 마셨어?”
나는 어깨에 붙어 있는 에즈라의 이마를 밀어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멀쩡한데.
“안 마셨거든? 그러니까 소원 들어줘.”
“나한테 줄 300골드는 있어?”
“없어.”
“없으면 못 들어주니까 술 마시고 자.”
“야아~ 무슨 요정이 그렇게 냉정해애~”
칭얼거리는 에즈라를 뒤로하고 일어섰다.
“요정 찾지 마라. 잘 거니까.”
왜냐하면 나도 지금 좀, 겁나거든 친구야.
❅
겨우겨우 선잠이 들었는데,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작은 몸짓이 날 깨웠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찌푸렸다.
어둠 속에서 작은 생명체가 침대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헉, 뭐야.’
놀라서 침대 옆 스탠드를 켜자 은은한 불빛이 객실을 밝혔다.
불빛에 정체를 드러낸 것은, 부스스한 몰골로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애런이었다.
“애런? 안 자고 뭐 해.”
“벨…….”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 애런은 퍽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아이의 작은 어깨가 축 처졌다.
“나 벨이 붙여준 거 잃어버렸어.”
“붙여준 거?”
“응, 자고 일어났더니 없어.”
“아…….”
제 이마를 허전한 듯 문지르는 아이를 보니 애런이 찾는 물건이 뭔지 알겠다.
이마에 붙여줬던 밴드가 접착력이 다해 떨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벨이 붙여줬는데 또 잃어버렸어, 미안해.”
“아니야, 애런. 애런이 미안할 거 하나도 없어. 그거 원래 잘 떨어져.”
아니다. 사실 잘 안 떨어진다. 잘 안 떨어지게 꼭꼭 눌러 붙여줬는데 도대체 얼마나 침대에서 굴렀으면 벌써 떨어졌단 말인가. 그 와중에 안 깨고 잔 나도 대단했다.
“그래?”
“응, 그렇대도. 새로 붙여줄 테니까 떨어진 거 찾지 마.”
대답하며 침대 옆에 놔두었던 구급상자를 침대 위로 가져왔다.
“내 이마가 이상하네, 왜 간지럽지.”
애런은 총알이 제 이마에 닿았던 순간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총알이 닿은 부위를 간지럽다며 자꾸 긁어댔다.
그래서 이마에 밴드를 붙여줬었는데 물에 빠졌을 때 밴드가 떨어졌다. 그래서 또 붙여줬는데 잠을 험하게 자서 또 떨어진 거다.
“이리 가까이 와봐.”
“응.”
잠이 덜 깬 풀린 눈으로 아이는 히죽 웃음 지었다.
애런의 이마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보니 아주 멀쩡했다. 지금도 간지러운가?
“애런, 아직도 이마 간지러워?”
“아니. 안 간지러워.”
“뭐야, 그럼 안 붙인다?”
“아냐아~ 그래도 붙일 거야.”
“…….”
멀쩡한 이마에 왜 밴드를…….
밴드를 붙이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심리가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구급상자를 열었다.
구급상자 안에는 내가 복제해 둔 밴드가 가득했다.
“벨 요기, 요기 정 가운데에다가 딱 붙여줘.”
이 손님 요구사항이 확실하다.
나는 애런의 요구대로 이마의 한가운데에 밴드를 붙인 후, 붙인 자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에헤헤.”
애런은 내 손바닥에 이마를 뒤로 밀리며 좋아했다.
“자, 딱 붙였다, 끝.”
“아직 안 끝났는데?”
“또?”
애런은 구급상자에 들어 있던 펜을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밴드 위에 그림을 그려달란 소리였다.
내가 아는 어린이용 밴드엔 캐릭터가 인쇄되어 있는데, 여기 구급상자에 든 밴드는 그냥 민무늬 베이지색 밴드였다.
그래서 그냥 아무거나 귀여운 걸 그려본 거였는데, 애런이 이렇게나 좋아할 줄은 몰랐다.
“아, 이 손님 요구가 많네.”
“응, 요구가 많아~”
애런은 능글맞은 얼굴로 제 이마를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못 이긴다는 표정으로 펜을 들었다.
“이히히, 간지러워.”
밴드 위로 움직이는 펜촉이 간지러운가 보다. 애런은 몸을 꼬며 즐거워했다.
“자, 진짜 끝.”
아이가 호다닥 침대를 내려가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 이거 뭐지.”
내가 밴드 위로 그려준 캐릭터는 카카우친구들의 사자였다.
“사자야.”
“근데 털이 없어.”
“갈기 다 밀었어, 더워서.”
“아…….”
“마음에 안 들어? 갈기도 그려줄까?”
“아니.”
애런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어, 착해 보여.”
거울 앞에서 제 이마 위에 그려진 무표정한 사자를 구경하는 애런을 보고 있자니 그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애런은 별것도 아닌 일로 내 게이지를 올렸다.
[대상이 행복해합니다.
획득한 행복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마침 레벨 업 게이지가 거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애런이 내게 준 포인트가 그 끝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