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뭐가요. 아무것도 아닌데요.’
보란 듯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데일은 상체를 옆으로 숙여서 침대 옆 협탁에 있던 종이를 가져와 구기더니 그대로 내게 던졌다.
구겨진 종이뭉치가 내 머리를 맞고 떨어졌다.
“…….”
“킥.”
맞추니까 재밌나. 참 이런 별것도 아닌 거로 웃는 걸 보면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내가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었는지, 데일은 제 어깨에 걸쳐 있던 애런의 다리를 잡아 내렸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의 자세를 고쳐주는 데일을 보다 나도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래, 싸가지 없는 말투만 빼면 꽤 친절한 남자라니까…….’
소파 등받이에 기대 천천히 말라가는 옷을 느끼며, 졸고 있을 때였다.
‘아니, 나 왜 졸지!? 설마 또?’
반쯤 잠에 빠졌다가 정신이 번쩍 나서 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구석에서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눈길을 느끼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레이스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을 접어 웃었는데, 그러다 데일의 종이뭉치를 맞았다.
‘레이스의 능력이 아니라 그냥 얼었던 몸이 녹아서였구나.’
그래도 잠들지 말아야지. 달리는 열차도 아니고 멈춘 열차에서 방심하고 있다간 기습당하기 딱 좋을 것이다.
옷만 다 마르면 일어나서 주위를 수색해 차를 찾아봐야 했다.
나는 자꾸 내려오려 하는 눈꺼풀에 힘을 빡 줬다.
빡 줬는데, 안 잘 건데, 참을 건데.
‘아, 너무 나른해애…….’
그때 또다시 툭, 종이뭉치가 날아와 머리를 때렸다.
“보기 흉하니까 눈에 힘 빼고 자라 그냥.”
아 그래, 데일이 있으니까. 저 남자가 있으니까 잠깐 졸아도 되겠지? 그가 우릴 다 지켜줄 거다. 그는 누구보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니까.
“데일, 자라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달콤해요?”
“뭐?”
나는 내 얼굴 위로 편안히 번지는 미소를 느끼며 소파에 눕듯이 몸을 기댔다.
“믿고 잔다구요. 그럼 잠깐만 잘게요.”
❅
눈을 떴을 때 나는 소파가 아닌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객실 커튼을 들추니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 찾아온 뒤다.
호수에 빠졌을 때가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때니, 오늘 움직이는 건 어렵겠다 싶긴 했는데 정말 오늘은 꽝이군.
옆에 잠들어 있던 애런에게, 발로 찼는지 저 아래 내려가 있던 이불을 올려 덮어주고 객실을 나왔다.
‘뒤쪽에 있으려나.’
나랑 애런을 객실에 두고 다들 어디에 있나 했는데 4호차에 모여 있었다.
4호차 사잇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해, 다들?”
자연스럽게 3명이 앉은 테이블 빈자리에 착석하며 물었다.
“심문.”
레이스를 턱짓하며 대답하는 에즈라를 보니 대충 무슨 대화였을지 예상이 갔다.
‘설마 레이스 저 자식, 허튼 말 한 건 없겠지?’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게 할 만한 정보를 풀었다거나…….
“흠, 막 구타하면서 심문한 건 아니지?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순 없다고 해도 어쨌든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행동하기로 한 사람이니까.”
그 말에 레이스는 슬픈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에이~ 때리긴, 그냥 몇 가지 물어본 게 다야.”
“뭘 물어봤는데?”
“왜 별 볼 일 없는 우리 쪽으로 갈아탔는지.”
에즈라는 대답하면서도 웃긴지 콧김을 뿜었는데, 나는 그녀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잖아. 동료를 배신하면서까지 낙원을 포기하고 왜 우리 쪽에 붙은 건지, 이해가 안 되길래 나랑 데일이 물어봤지.”
그야 레이스는 처음 보는 내 세상으로 넘어오고 싶어 하니까.
입단속을 시켰으니 다른 이유를 둘러대긴 했겠지만 긴장이 됐다.
“그래서 왜 우리 쪽에 붙은 거래?”
“벨, 놀라지 마.”
놀리듯 말하는 에즈라의 뒷말을 데일이 가로채 갔다.
“첫눈에 반했대, 너한테.”
“아니, 으하하 진짜 웃기지 않아?”
‘휴…… 약속은 지키는군.’
에즈라는 테이블을 때리며 깔깔거렸고, 데일은 가느스름하게 좁힌 눈매로 목을 쭉 빼고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수 있다는…… 납득한 그 얼굴은 뭐지?”
“왜요? 첫눈에 반할 수도 있죠. 내 얼굴을 보면 이해가 될 텐데?”
“덜 잤냐? 가서 더 자고 와라.”
“레이스, 말해봐요. 도대체 언제? 만나자마자? 만나자마자 운명이다, 뭐 이런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에즈라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제게 질문하는 대상을 바라보던 레이스의 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로 이동했다.
그럴싸하게 대답 잘 해라.
“키우던 토끼를 닮았거든요.”
“토끼요?”
“네, 토끼.”
“토끼는 XX 이 새끼 거짓말하고 있네. 쟤가 어딜 봐서 토끼야.”
물론 나도 내가 토끼를 닮았다는 말에는 잘 동의가 안 됐지만, 저렇게 강하게 부정하는 데일을 보니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토끼는 안 닮았지만 매우 귀엽고 예쁘다는 공통점이 있잖니, 이 자식아.
그럼 대충 이해를 하고 수긍을 하라고.
반면 레이스의 대답이 에즈라에겐 아주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에즈라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가? 벨이 예쁘긴 하지. 키우던 토끼는 특징이 뭐였는데요?”
에즈라는 구체적으로 뭐가 닮았는지 알기 위해 질문한 것 같았다.
토끼와 눈매가 닮았을 수도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닮았을 수도 있고 그런 거니까.
그러나 레이스는 아주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똥을 많이 싸요, 토끼는.”
“푸핫.”
그 말에 옆에 있던 데일이 폭소를 터트렸다.
정말 한치의 저항도 없는 웃음이었다.
질문한 에즈라는 조금 난처해진 모양인지, 레이스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똥을 많이 싸서 좋아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나는 닮은 점을 물은 건데.”
레이스는 맥락맹인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이 타이밍에 똥 얘기는 안 했을 텐데 말이다.
데일은 그때까지도 옆에서 벽을 잡고 웃고 있었는데 대놓고 웃는 얼굴이 아주 기뻐 보이고 보기 좋았다.
레이스가 다시 대답했다.
“가장 큰 특징이 똥을 많이 싸는 거라, 토끼는 정말 3보 1똥을 하거든요. 물론 벨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네, 누구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닮은 점은, 제가 정체를 드러내던 순간에 놀라 살짝 벌어졌던 입술 사이로 보이던 이가 토끼 같더라고요. 그 모습에 반했죠.”
“…….”
“호락호락하지 않은 토끼 같았어요.”
레이스는 말을 끝내고 내게 눈을 찡긋했다. 잘 둘러대지 않았냐는 의미의 찡긋인가.
“이 자식 은근히 유머가 있는데? 입에서 나오는 건 죄다 거짓말이지만.”
레이스를 보는 데일의 눈빛은,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다시 차갑게 돌아와 있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끼는 토끼랑 닮은 점은 발견하는 순간 사랑에 빠질 수도 있죠.”
“그럼 데일은 뭐에 반하는데요?”
오늘의 질문왕은 에즈라다. 에즈라는 이 대화에 몹시 몰입해 있었다.
“저는…….”
질문을 받은 데일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 닿았다가 빠르게 돌아갔다.
“글쎄요.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살짝 궁금했던 터라 김이 새긴 했지만 뭐 좋다 싶었다. 어차피 그가 자기감정을 깨닫게 되길 원치 않으니까.
어느새 다시 내게로 돌아와 있는 남자의 파란 눈동자를 보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여기서 계속 얘기할 거야? 내일 움직이려면 자야지.”
“저녁 내내 잤더니 잠이 안 와. 그리고…….”
에즈라는 장난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 사실 조금 무섭거든, 수도로 들어가는 거. 내일은 무조건 수도로 들어갈 텐데 그곳에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섞여 있을 테니까.”
그녀는 한참 어리광을 부릴 나이대의 아이처럼 행동하면서도,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격 실력은 늘지도 않고.”
“아직도 기대 안 버렸어?”
“야.”
그래, 잠이 안 오는 밤이겠구나, 오늘 밤은.
“그럼 무슨 얘기 할까. 나도 재밌는 얘기 듣고 싶다.”
그러자 에즈라는 눈을 빛내며 좋아했지만, 딱히 먼저 이야길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생각나는 얘깃거리가 없는 듯했고.
‘데일은…….’
그냥 데일한텐 아무 얘기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남은 건.
“…….”
내가 빤히 쳐다보자 레이스는 준비된 자의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포승줄에 묶인 상태였다.
“집배원일 때 에피소드 어때요?”
“오, 재밌겠다.”
레이스와 마주 앉은 에즈라가 흥미를 보였다.
참 알 수 없는 게, 에즈라는 데일보다 레이스에게 더 빠르게 적응했다. 그가 별로 무섭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묶어놔서 그런가?
데일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꼰 다리를 튕겼다.
데일 같은 사람이랑 마주 앉으면 아주 불편하다. 저러다 다리가 부딪치면 ‘내 다리가 긴 걸 어쩌라고.’라는 태도로 나올 게 분명한데 그 어쩌라는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것이다.
레이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제국이 아닌, 우체국 타국 지점에서 일할 때인데…… 억.”
입을 열자마자 레이스가 의자와 함께 옆으로 쓰러져 바닥에 머릴 박았다.
데일이 그의 의자 다리를 발로 찼기 때문이었다.
“싫은 놈이 입을 열면 멋대로 발차기가 나가는 버릇이 있거든.”
“저도 언젠가 갖고 싶은 버릇이네요.”
레이스는 말은 얌전히 했지만, 바닥에 쓰러져 혀로 제 입 안쪽을 찌르고 있는 걸 보니 영 빈정이 상한 듯싶었다.
‘이 망할 인간들 사이에서 정상적인 주제를 꺼낼 인간은 나밖에 없군.’
근데 무슨 얘기를 한담.
아, 맞다. 마침 오늘 호수에 빠지면서 떠오른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러면 내가 동화를 들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