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으.’
아까도 그랬지만 깨어날 때의 기분이 영 별로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데일은 한쪽 눈을 팍 찡그린 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내가 그렇게 좋아, 너?”
자신의 가슴 위에 엎어져 있다가 느리게 상체를 드는 나를 향해 지껄였다.
“잘 때 덮치면 무슨 재미야, 호응이 안 되는데.”
“예예, 그렇겠지요, 암요. 편히 숙면하셨지요? 무슨 꿈을 꾸셨는지 기억은 나시고요?”
대충 말을 받아치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데일이 그의 몸 어딘가에 넣어뒀을 자선냄비를.
“이거 찾아?”
-철컥.
그가 내 등을 감싸 안으며, 꺼내 든 총을 내 뒤에 서 있던 레이스를 향해 겨눴다.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좀 들어볼까?”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자고 일어났더니 나는 제 위에서 몸을 더듬고, 에즈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구석에 서 있고, 열차로 같이 이동하기로 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장발의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니.
이건 오해를 안 하는 놈이 이상한 놈이지.
아까에 이어 또 총구가 겨눠진 레이스는 이젠 총구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제 턱 아래로 양손을 모아 꽃받침을 만들고서 최대한 순한 양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되었달까요?”
-탕!
데일에게 레이스의 꽃받침은 통하지 않았다.
데일이 쏜 총알이 레이스의 옆을 날아가 객실 벽에 꽂혔다.
“다시 설명?”
“저는 여러분의 무해하고 아름다운…….”
-탕!
“저는…….”
-탕!
벽에 꽂히는 총알을 보아하니 점점 레이스의 얼굴 뒤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에 탕 소리가 들린다면 총알이 꽂히는 건 벽이 아닌 레이스가 될 것이다.
“데일, 그게…….”
“실험체를 회수하러 왔다가 원래의 동료를 배신 살해 후, 이번엔 벨의 동료가 되기로 마음먹은 레이스입니다~”
“…….”
데일이 총을 쥔 팔을 내렸다.
두 남주 후보의 신경전은 코앞에 닥쳐온 위급상황을 해결하고 벌여도 늦지 않다.
나는 찾아낸 냄비를 데일의 손에 쥐여줬다.
“데일, 빠르게 한 번만 말할게요. 일단 저 사람은 신경 끄고 그거 들고 나가서 다리의 중간 지점에서 애런을 납치하기 위해 무장하고 대기 중인 놈들을 처리하고 와줘요.”
그제야 그가 몸을 일으켰다.
객실에 난 창으로 밖을 쳐다본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멈춘 거야?”
“네.”
“어디서 얻은 정보인데.”
“바로~”
-탕!
데일에게 레이스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레이더라도 생긴 걸까.
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쏜 총알이 레이스의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살짝 찢긴 귀에서 둥근 귓바퀴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오늘은 신체 훼손의 날이군요.”
“그래서 꽃받침 네가 이제 벨의 동료라고?”
“네.”
레이스에게 다가간 데일은 그의 어깨를 눌러 객실 바닥에 앉힌 후, 양손을 뒤로 묶었다.
내가 데일을 따로 저지하지 않자, 레이스는 제 처지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고서 조용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통조림, 다녀올 테니까 이따 제대로 설명해.”
데일이 객실을 나가며 에즈라를 찾았다.
“에즈라는 기관실로 가서 열차를 다시 운행해 줘요. 멈추지 말고 달려요.”
“네.”
에즈라가 나갔고 곧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일은 패딩을 챙겨입고 2호차의 뒷문을 열고 나가, 열차 밖에 난 사다리를 붙잡았다.
“나오지 마.”
“네, 다녀와요~”
그가 다칠 거란 불안도 일을 그르칠 거란 걱정도 없었다.
그저 믿고 기다리면 그는 간단히 문제를 해결 후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약간 허세를 부리기 전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데일은 사다리를 타고 달리는 열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열차 안에서도 가능하지 않나.’
다시 움직이는 열차는 산과 산의 경사면이 V 모양으로 맞닿은 다리의 중간 부분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탁 트여 있던 양쪽 창의 시야가 눈 덮인 산의 경사면을 비췄고, 그가 열차 지붕 위에서 기부를 요청했다.
이후 이어진 광경은 경사면의 눈 속에 매복해 있던 자들이, 뿌리에 매달린 고구마 뽑혀 올라오듯 공중으로 뽑혀 올라가는 장면이었다.
계속 달리는 열차에 뽑혀 올라온 고구마들이 뒤로 밀려났다.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구경하지 말라곤 안 했다.
나는 창을 빼꼼 열고 열차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지나온 철로 위에 사람과 무기가 한데 뒤엉켜 동그란 더미를 이루더니, 그대로 뒤편 철로 쪽으로 굴러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잘 끝났군.’
아직 미니 고구마들이 자잘하게 남은 모양이었지만 그것도 곧 해결될 것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자세로 열차 지붕에 서 있을 그를 상상하니 웃음이 흘렀다.
“그는 정말 대단하네요. 나를 투입해 그를 재우려 했던 계획이 이해가 가요.”
객실에 난 창으로 고구마가 뽑혀 올라가는 장면까지 직관한 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이 남자를 받아들인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당신, 내 주변인들한텐 입 다물어야 할 거야. 내 세계, 우리 집 들여다본 거 모두 다.”
“제 모든 건 이제 당신이 원하는 대로죠.”
전후 사정을 모르고 말만 들으면, 모르는 사람은 이 남자가 내게 헌신적으로 순종하는 남자인 줄 착각하고도 남을 것이다.
정말 오늘 여러 군데 신체가 훼손된 그는 찢어진 이마에서, 칼날이 박혔던 손에서, 총알이 스친 귀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적어도 출혈 과다로 사망하게 둘 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치료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전에 사망하면 곤란하니.
‘탐색해.’
[당신은 종의 요정, 이제 당신이 도울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불우이웃으로 지정할 수 있는 대상이 없음.]
“으음, 이게 안 되네?”
호텔에서 몇 마디 안 나눈 사람에게도 불우이웃이 뜨던데 이분은 안 뜨네.
어쩔 수 없다. 불우이웃으로 안 뜨면 연민 스킬로 치료도 못 해준다. 그냥…… 견뎌라.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많이 아프세요?”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는 기쁨에 비교한다면 조금 따끔거리는 정도일 뿐이죠.”
“잘됐네요. 죽진 마세요.”
❅
“전 모르겠어요. 벨이랑 데일이 정해요. 두 사람이 나쁜 결정을 할 것 같진 않아요. 따를게요.”
에즈라는 그리 말하고 기관실로 돌아갔다.
“배신 잘 때리게 생겨먹은 면상이야. 보여, 내 눈엔.”
데일은 묶여 있는 레이스를 사잇문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턱을 긁었다.
다행스럽게도 애런은 무사히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애런이 실험체라죠.”
“…….”
“애런이 자신에게 날아온 총알을 멈춰 세우는 걸 눈앞에서 봤어요.”
데일과 나는 마주 앉아 턱을 괬다.
“실험체란 뭘까요.”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데일이 중얼거렸다.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능력자로 만드는 실험?”
데일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요?”
“해본 말이야. 가능성은 있어 보여. 각성자는 소수고 그들이 왜, 어떤 경로로 각성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알아내려는 사람들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애런이 보였다는 능력은 각성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능력이니까.”
“충분히 설득력이 있네요.”
어린아이를 데려다 능력자로 개조시키는 실험을 한다니, 너무나 로판에 나올 법한 전개다.
가능성이 있다는 데일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어쨌거나 애를 데려가려는 시도가 벌써 두 번째고 이번엔 전보다 더 위협적이었어요.”
남자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하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걔들이? 어디 가.”
데일은 제 손짓에 후두두 딸려 나온 고구마들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넌 고구마밖에 기억에 없으니까 그렇지.
‘난 힘들었다고!’
“흘러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세 번째도 오겠죠? 난 세 번째도 두 번째 당한 것처럼 얌전히는 못 기다려 줘요.”
“그럼.”
“레이스를 통해 놈들한테 경고할 거예요.”
레이스에게 들은 바로, 놈들은 아이를 납치하고서 근처에서 잠시 대기 후 낙원에서 보내온 비행선에 탈 예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그곳에서 기다리면…….
“무전이 안 오는데 일이 틀어졌다는 걸 알아챘겠지. 그러니 비행선을 보내는 일도 없어.”
“…….”
“살아남아서 실패했다고 무전을 친 놈이 있을 수도 있고.”
그가 레이스를 창문 밖으로 내던지지 않게 설득하려면, 레이스를 살려둬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해줘야 하는데 어렵군.
그리고 말이다.
몸을 축 늘어트린 채, 보라색 단발머리의 손에 끌려 올라가던 애런의 작은 운동화가 떠올라 미칠 것 같단 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같은 장면을 또 보고 말겠지.
가만히 있다가 쳐들어온 놈들한테 얻어터진 후,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야!’ 하는 전개는 XX 고구마 전개다.
‘싫어, 고구마!’
나는 사이다를 원한다.
사이다 전개로 가고 싶단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수비적인 태도로 일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물리치고 싶다.
사이다를 벌컥벌컥 마셔야겠다고!
놈들을 아주 그냥 달달 쫄게 만들고 싶단 말이다. 알겠니, 데일아? 협조하라고!
나는 무전기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보라색 단발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