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깨끗하게 비워진 아이의 파르페 잔과 다르게, 내 파르페는 맨 위에 올려진 동그란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떠나기 전까지 잘 대해줄래? 그는 덩치만 컸지 속은 덜 컸거든.”
“크흡.”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다 보니 코를 먹는 괴상한 소리가 났다.
꼬맹이의 모습으로 성인 버전의 데일을 덜 컸다 말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
어린 데일이 나를 흘겨봤다.
“꼬맹이 취급 말아줄래?”
“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전혀…… 마음이 없구나. 내가 다 속상하려 하네.”
‘전혀 마음이 없다, 라.’
바닷가에 있는 데일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봤다. 수평선의 아래도, 위도 남자의 밝은 눈동자처럼 시원한 파란색이다. 깨끗한 은색 머리칼이 나부끼는 바닷바람에 한쪽으로 마구 흩날렸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면 그 파란 눈동자를 볼 수 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면, 내가 있는 이곳으로 나를 찾아 고개를 돌리길, 가끔씩 바라게 되었는데.
이걸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나.
하지만 밝히지 말아야지.
나를 돌아볼 때 마주치는 눈동자가 좋아졌다는 이야길 꺼내진 않을 거야.
떠날 거니까. 헤어짐이 예정된 관계라면 그래야 한다.
더구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버렸다면 더더욱.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근데 여긴 어디야?”
어디 무인도 같았다. 저토록 눈부시게 깨끗한 바닷물이라니, 사람이 산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데일이 어렸을 때 어머니랑 살던 곳. 이 뒤로 나가면 둘의 거처가 있어.”
어머니와 둘, 셋이 아닌 둘이란 숫자가 귀에 거슬렸다.
“지금은 이 바다에도 눈이 오고 있겠구나.”
“아마 그럴 테지.”
“오랜만에 따듯하다 못해 더워서 좋긴 한데, 나가야겠다.”
“그래.”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저쪽에서의 찰나와 같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급했다.
“근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
“어?”
내 물음에 꼬마 데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나 방금 이거 비슷한 공간에 있다가 탈출하고 여길 다시 들어온 건데, 여긴 어떻게 나가?”
“그렇다면 한 번 탈출해 본 네가 알겠지, 내가 알겠어?”
“?!”
“??”
나는 자력 탈출했단 말이야, 근데 데일은 아까 말을 걸어보니 정상이 아니던데.
꼬마 데일이 성인 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들어온 거지 내가 끌고 온 건 아니라서.”
그럼 다시 가서 말을 걸어봐야겠군.
나는 파라솔 그늘 밖에 말려둔 양말과 운동화를 살펴보았다.
햇볕이 쨍해서 금방 말랐다.
‘근데 여긴 현실도 아닌데 양말과 운동화를 챙길 필요가 있나.’
마른 운동화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종의 요정, 이제 당신이 도울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종료.]
[불우이웃을 발견하였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불우이웃에게 희망의 종소리를 울려주세요.
탐색된 불우이웃: 꼬마 데일]
“자.”
나는 방금 찍어낸 새 운동화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물이야, 너한테만 주는 거야. 성인 버전한테는 안 줬어.”
내민 운동화를 물끄러미 보기만 하던 아이가 느릿한 손길로 운동화를 가져갔다.
“그래, 고마워. 이렇게 더운 곳에 있는 내게 꽉 막힌 신발이라니. 정말 쾌적하겠구나.”
“꼬마 주제에 다 큰 어른처럼 빈정거리긴.”
하지만 빈정대는 말과 다르게 아이는 가슴에 운동화를 안고 있었다.
“그럼 진짜 갈게.”
“응.”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이곳을 나가기 전에 부드러운 모래를 조금 더 밟고 싶었다.
-똑.
아이는 내가 거의 손대지 않은 파르페에서 긴 초콜릿 막대를 가져가 깨물어 먹고 있었다.
“초콜릿 좋아하는 것도 똑같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말해줘서 고마워.”
“뭘.”
“그가 걱정돼서 내게 말한 거지? 상처받지 않길 바라니까.”
“…….”
“잘 대해줄 거야. 네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아까 이야기하긴 했지만,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에게 비밀이야. 나는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그가 제 마음을 깨닫길 원하지 않거든. 깨닫지 못한 채 헤어지고 나면 그 이후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고 또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수 있을 거야.”
“너 웃으면서 잔인한 말 하는 게 취미야?”
아이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질문을 내뱉었다.
“그런데 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
어쩐지 이 무인도 해변을 아이는 오래도록 홀로 지켰을 것 같은 느낌.
별생각 없이 물어본 말이었는데, 질문을 받은 아이의 물빛 눈동자는 조용히 소란해졌다.
“가. 할 말은 끝났어.”
속에 있는 말을 아끼는 대답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묻지 말걸 그랬나 보다.
이제라도 도움 줄 수 없는 참견은 멈추자.
아이에게 손을 흔들고서 데일을 향해 달려 나갔다.
“데일!”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로 파도에 떠밀려온 것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몸을 돌려세웠다.
“…….”
아직도 맹한 얼굴이다.
“겁줘서 미안한데, 지금 나가지 않으면 이 파도에 더 많은 것들이 떠밀려 올 거예요.”
그러나 데일은 단호하게 내 팔을 뿌리치고 등을 보였다.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아까처럼 강제 점거 후 철거시켜 버리자, 그럼 나갈 수 있겠지.’
종에게 그리 말하자 시스템 창이 떴다.
[불우이웃이 심신미약 상태이므로 멋대로 집행할 수 없습니다. 동의 후 강제 점거가 가능합니다.]
동의를 받으면 그게 강제냐?
‘어쩔 수 없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나갈 수 있단 소린데.’
데일은 자기도 시체가 되고 싶은지 시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 인간이 진짜.’
겁나 말 안 듣네. 그의 팔뚝을 잡고 다시 돌려세우는데.
남자의 몸에 가려져 있던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네.’
내 얼굴이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물보라를 맞고 있는 저것. 거울에서 매일 만나는 얼굴, 나.
그 옆은 애런이다. 누운 내 어깨를 베고 누워 있는 작은 것.
죽은 나를 봤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은 아니었는데, 애런을 보자 몸이 쑥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진짜가 아닌 상황을 알면서도.
무심코 눈을 감은 아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가짜다, 가짜. 이건 다 가짜야.’
데일이 요즘 악몽을 꾼다더니, 이게 그 악몽이었나 보다.
“씁…… 하…….”
깊게 한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데일은 내 시신 위로 엎드려 가슴에 귀를 대고 있었다.
“진짜.”
적당히 하세요.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툭 잘게 두드렸다.
“이봐요. 여기 안 보여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가져다가 이게 뭔, 정신 차려요.”
차분히 말했더니 정신이 안 돌아왔다. 나는 좀 더 힘을 실어서 그의 어깨를 뚜드렸다.
“살아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내 시체랑 만나게 해줘서 이색적이긴 한데, 오래 보고 싶지는 않네요. 가요.”
도무지 정신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데일이 내 시체를 안아 들고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슬픔을 콸콸콸 내뱉는 뒷모습을 하고서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아! 정신 차리라니까 어디 가요오!”
‘왜 저렇게 신파를 찍는 거야.’
나는 곧 달려나갈 태세를 갖추는 황소처럼 맨발로 젖은 모랫바닥을 박찼고.
“정신을 차리…….”
신파를 쏟아내는 데일의 등짝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해서 몸을 날렸다.
“……라고 이 겁쟁이야악!!”
“으헉!”
사각지대에서 날아온 기습 공격에, 등허리에 냅다 발차기가 꽂힌 남자가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XX, 뭐야!?”
그 바람에 그가 안고 있던 내 시체는 바닥으로 풀썩 떨어져 저 멀리로 굴러갔다.
‘그래 파도야, 멀리 데려가 버려라.’
데일은 방금까지 안고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진 무엇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남자의 눈망울에 이채가 어렸다.
“통조림?”
“그래요. 나 통조림이오. 드디어 알아보시겠소?”
“방금 네가 겁쟁이라고 했냐?”
“그럼 나 말고 누가 있겠소. 이 머저리야.”
“허.”
“허는…….”
‘나가자.’
[공간을 강제 점거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공간을 강제 점거합니다.
강제 점거 진행 중: 〘1%〙]
‘퍼센트 올라간다.’
드디어 내가 빠져나왔을 때와 같은 순서로 흘러간다. 이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떠밀려온 사람들이 누워 있던 장소를 살폈다.
그들은 데일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원래부터 거기 없었다는 듯 사라진 상태였다.
‘신기하네.’
“여긴…….”
그가 해변가를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아는 장소 아니에요?”
“아는 장소긴 한데 왜 여기에 내가 너랑 있는 거지?”
“그거야…….”
“…….”
“네가 알겠죠. 난 모르고.”
그러자 데일이 내게 바닷물을 확 끼얹었다.
“제대로 대답 안 할래? 보니까 알고 있는 얼굴인데, 여기 어디야.”
“아, 바다잖아요.”
“바다지. 여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야. 그러니까 이 풍경은 말이 안 된다고. 이 더운 바람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민트 사탕 같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현실이 아니구나.”
“아니, 기억 못 해. 네가 여기 왔던 것도, 해변에서의 이 일도, 그는 전부 기억 못 할 거야.”
[강제 점거 진행 중: 〘37%〙]
강제 점거가 빠르게 진행된다. 내가 무슨 말을, 무슨 질문을 해도 데일은 기억을 못 하겠지.
“저기요.”
어차피 기억을 못 할 거라지만 내 입으로 직접 말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므라드는 발가락에 모래를 잔뜩 껴가며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나 좋아하지…… 말……아요.”
으으.
“별 큰 마음도 아니겠지만.”
이 무슨,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화아악 열기가 오르는 느낌으로 대충 알 수 있다.
고백도 아닌 오히려 좋아하지 말아 달라는 말인데, 좋아해 달라는 사람의 얼굴처럼 새빨개졌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바닷물에 손을 적셔서 더운 볼을 챱챱 때렸다.
“…….”
데일은 자존심에라도 헛소리하지 말라며 부정할 줄 알았는데.
“왜?”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직이 물었다.
“난 멀리 가요. 당장은 아닌데 가긴 갈 거라서.”
“어딜.”
“그냥, 당신은 못 오는 곳. 아주 멀리. 어쩌면…… 낙원보다도 먼 곳.”
“하핫.”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알려주지도 않는 거야? 못됐긴.”
“…….”
나는 어색한 마음에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쳤다.
물보라가 부서지며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네. 더럽게 못돼 처먹었네.”
그래, 더럽게 못돼 처먹은 나는 대꾸도 말고 가만히 있자.
나는 일부러 데일 쪽을 보지 않고 모래사장에 못돼 처먹었을 것 같은 돼지나 상상해 그렸다.
모래사장 위, 내가 방금 그린 못돼 처먹은 돼지의 얼굴 위로 데일의 그림자가 졌다.
“여기 내 꿈속이냐?”
“정확히 꿈은 아니지만 꿈 비슷한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왜 모르겠어. 요즘 줄기차게 꾸던 악몽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렇구나~”
“야, 통조림.”
그가 쪼그려 앉은 나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어허 이놈 이거.
“사람 발로 차는 거 아니라고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에? 나 차네에?”
내가 지금 좀 미안한 스탠스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사람이 덜 못돼 처먹으려면 고백은 들어주고 차야 하는 게 순서에 맞지 않냐?”
“…….”
“야, 통조림.”
나는 쪼그려 앉아서 슬쩍 위로 고개를 들었다.
“좋아한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못 생겨가지고.”
더운 바닷바람 훅 불어닥쳤다. 실려 온 바닷바람이 짭조름했다.
[점거 완료, 공간의 소유권이 종의 요정께 있습니다.
나가기 위해선 공간 붕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공간을 붕괴시키겠습니까?
예 / 아니오]
‘끝났네.’
나는 일어서서 손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우린 이제 여길 나갈 건데, 나가면 여기서 일어났던 일은 기억 못 할 거예요.”
“우리 둘 다?”
나는 아니고 너만. 이렇게 대답하면 굉장히 분해하겠지?
“우리 둘 다.”
그리 대답하고서 속으로 붕괴를 명령했다.
우리 집은 불에 타 재가 되듯 사라졌는데, 그의 해변은 작은 물방울이 되어 사라져 갔다.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
눈앞으로 갑작스레 다가온 하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인다고 느꼈을 때.
-쪽.
데일이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기억하지 마라. 똑같은 고백을 두 번 하진 않으려 노력할 테니까 안심하고. 물론 나도 까먹겠지만.”
“저기…… 거짓말한 게 있는데.”
“…….”
“기억 못 하는 건 그쪽뿐이에요.”
“XX.”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