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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74)화 (74/108)

74화

-삐익.

그 즉시 식당칸 비상벨을 눌렀다.

위급상황임을 알아챈 에즈라가 바로 열차를 세울 것이다.

달리던 열차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우리가 2호차의 뒷문을 열었을 때, 에즈라는 2호차의 앞문을 열고 있었다.

“뭐야! 비상벨 왜 눌렀어?”

맞닥뜨리자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아? 어…… 음…… 어허…….”

애런을 안아 들고 서 있는 내 얼굴엔 점박이처럼 피가 튀어 있고, 안긴 아이는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이고, 뒤엔 땀과 피에 절은 장발의 남성이 이마에 혹이 난 채 서 있다.

에즈라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굴렸지만 입에서는 어버버 소리만 흘러나왔다.

나는 다급히 2번 객실로 걸어가며 놀라지 말라는 제스처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새 친구를 사귀었어.”

“아하, 새 친구를…… 사귀자마자 더러워졌네, 너네.”

“데일 봤어?”

“어, 못 봤는데.”

그럼 여기 있겠네.

노크는 필요 없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노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테니까.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가자, 소파에 쓰러져 있는 데일의 눈은 역시나 감겨 있는 상태였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 남자를 흔드는 방법으로는 깨울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신 능력이 정확히 뭐야. 설명해.”

“제가 편지를 보내고 싶은 이가 있냐고, 편지를 쓰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머릿속에 떠올린 사람에게로 보내줍니다. 받는 이에게로 보내주는 거죠.”

무슨 그런 능력이 다 있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직접 편지를 쓰진 않았잖아. 떠올리기만 해도?”

“떠올리기만 해도.”

그래서 내가 엄마가 있는 우리 집으로 간 거였구나.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럼 지금 그리운 공간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실컷 만나고 있겠네.”

“그건…… 글쎄요. 벨의 경우에는 보고 싶은 이였지만, 편지라는 게 사랑의 편지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원수에게 살인 예고를 보낼 때도 편지는 쓰지 않나요?”

“…….”

보통 편지를 쓰고 싶은 상대라 하면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데, 살인 예고를 해줄 상대를 떠올리는 이놈의 세계는 도대체…….

“어쨌든.”

나는 소파로 다가가 데일의 목 뒤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좋은 꿈이라면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보내줘. 이 사람의……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 꿈 같은 공간으로.”

“좋은 선택이 아닌데요. 공간을 오갈 수 있는 건 저뿐이에요. 잘못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네가 가서 깨워올 수 있어?”

“…….”

대치 중에 에즈라가 끼어들었다. 노심초사한 얼굴로 그녀가 내 팔뚝을 잡아챘다.

“야, 어딜 가.”

에즈라는 레이스를 흘깃거리곤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비상벨은 누르더니 어딜 간다는 거야. 미친놈으로 보이는데 쟤랑 둘이 있으라고?”

“레이스 여기 있는 누구든 건드리면 네가 원하는 건 가질 수 없을 거야, 알겠어?”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됐지? 괜찮을 거야, 에즈라. 그리고 나 순식간에 올 거야. 5초만 세고 있어.”

“오사삼이일, 끝.”

“…….”

“5초가 이렇게 빠른 시간이었구나. 50초 세고 있어.”

“야아~”

“보내줘.”

레이스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엽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편안히 모실게요.”

눈을 떴을 때, 나는 해변가에 서 있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앗, 차가워.’

내가 서 있는 위치는 바다와 모래사장의 경계선에서 바다 쪽에 더 가까웠다.

파도가 부서지는 딱 그곳.

백사장을 타고 오르다 힘에 부쳐 물보라로 사라지던 파도가 운동화 안으로 스며버렸다.

‘으, 축축해.’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 손에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 보이는 건 그것뿐이다.

“데일!”

힘껏 그의 이름을 외쳐봤지만 쏴아아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냉큼 내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있겠지. 일단 걸어볼까. 걷다 보면 마주칠지도.

파도에 맨발로 담근 발이 시원해 기분이 좋았다.

밟히는 모래도 놀라울 만큼 고와서, 모랫바닥을 맨발로 밟는 일인데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한국 바닷가는 아니니까 깨진 소주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쏴아아아, 쏴아아아.

레이스의 능력으로 구현된 공간은 정말 생생했다.

나도 처음엔 그 집이 진짜 우리 집인 줄 알았으니까.

여기도 꼭 진짜 같다.

뜨거운 햇볕과 마치 몸에 물이 달라붙는 듯한 습도 높은 공기,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어쩐지 더 깊어지는 듯한 바다 내음까지.

현실이 피할 수 없는 겨울이라 여름 휴양지로 도망이라도 온 건가, 이 남자.

“어디 있냐고요오, 빨리 나가야 하는데에.”

‘아, 저기 보인다, 흰 머리.’

때마침 해변가에 서 있는 데일이 보였다.

그는 저 멀리 바다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평선을 보고 있나?’

바깥 상황도 모르고 아주 여유롭구만, 여유로와.

‘편지를 보내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를 떠올린 걸까.’

펼쳐진 이 바다를 배경으로 판단하자면 여행사 직원이 아니었을까.

끝내주는 여름 휴양지를 소개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싶었던 거지.

“데일, 뭐 해요. 나 왔어요. 반갑죠?”

안 들리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말을 걸었는데, 그는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움직임을 보였다.

천천히 내려앉아 해변에 무릎을 대고 앉은 데일의 앞에는, 떠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무언가가 도달해 있었다.

길쭉하고 커다란 덩어리인 그것은…….

헨리였다.

“…….”

물에 젖은 헨리는 눈을 감고 있다.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핏기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데일은 그런 헨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벙쪄 있는데, 무심한 파도는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를 실어날랐다.

데일의 등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모래사장 위에 달라붙은 붉은 머리카락으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그 둘 앞에서 데일은 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애도 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구나.

사실 그래, 저게 맞지.

빠르게 정리되면 그게 더 이상해.

그런데도 나는 남자가 평소처럼 헛소리를 나불대길래 다 돌아온 줄 알았다. 괜찮아진 줄 착각했다.

“데…….”

이름을 부르며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려는데, 누군가 더 빠르게 내 어깨를 짚었다.

애런과 비슷한 나이로 보일 법한 꼬마 아이였다.

‘누구…… 아.’

은빛 머리카락, 바다 같은 파란 눈동자. 앳되지만 누구를 닮아 있는 눈코입.

“설마 데일?”

사람을 쳐다보는 눈길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갔다.

“응. 얘기 좀 해.”

반말이네. 그러고 보니까 데일 이 자식은 나한테 늘 반말이지. 그건 꼬마 버전이어도 변함이 없구나.

어이가 없어서 그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여기 햇볕 뜨겁다. 저기 가서 얘기하자. 너한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어.”

꼬마 데일은 팔을 뻗어, 해변가 안쪽을 가리켰다.

저런 게 있었나. 가리킨 곳엔 하얀 파라솔과 선베드가 놓여 있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내가 한 질문에 꼬마 데일은, ‘그럼 모르고 하겠냐?’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성인 버전과 영락없이 비슷한 비웃음으로 끝마무리를 하는 것을 보니 그가 맞다.

“마실래?”

“고마워.”

선베드에 앉았을 때, 그가 권한 건 방금 막 만들어진 듯한 파르페였다.

여기 사람이 또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대자연의 풍광뿐이다.

옆을 보니 꼬마 데일은 이미 자신의 파르페를 반쯤 먹었다.

나도 파라솔 그늘 아래서 파르페를 한 입씩 떠먹었다. 성인 데일의 널따란 등짝을 보면서.

‘어?’

파도가 또 누군가를 데일 앞으로 떠밀어 올렸다.

헨리와 스칼렛 말고도 있는 건가, 누구일까.

궁금해져 일어서는데 꼬마 데일이 말을 걸었다.

“데일은 널 좋아해. 알아?”

“뭐?”

무심한 얼굴로 자신의 성인 버전을 바라보던 꼬마 데일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된 과자를 떠먹으며 말을 받았다.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닐 것 같더라니.”

“…….”

“말 안 끝났으니까 앉아.”

건, 방, 진 꼬마 같으니라고.

털썩 선베드에 등을 가져다 댔다.

“조금은.”

“…….”

“조금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래? 눈치를 조금은 채고 있었다니 칭찬해 줄 만하네.”

역시 사람 잘 안 변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데일은 애 버전이나 성인 버전이나 재수가 없다.

“그래서 데일은, 아직 완전히 자각하진 못했지만 너한테 꽤 휘둘리는 중이야. 그것도 알아?”

“아니, 몰랐어. 그게 휘둘리는 거였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하네.”

-똑, 똑.

파르페에 꽂힌 긴 초콜릿을 아이는 똑똑 부러트려 먹었다.

“그래서 두려운가 봐. 네가 어딘가로 떠날 거라는 사실을 그는 눈치챘거든.”

“…….”

확증은 없어도 심증으로 느끼는 건가. 감이 사람의 것이 아니네. 동물이야 뭐야, 무섭게.

“넌 떠날 거지?”

“대답하면 내 대답을 데일도 알게 돼?”

말을 받는 아이의 입가엔 크림과 초콜릿이 묻어 있다.

“아니, 기억 못 해. 네가 여기 왔던 것도, 해변에서의 이 일도, 그는 전부 기억 못 할 거야.”

나는 선베드 옆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으로 아이의 입가를 훔쳤다.

말하는 내내 제 성인 버전만 바라보고 있던 꼬마 데일의 눈이 그때만큼은 또렷이 나를 쳐다봤다.

“떠나는 거지? 말해줘.”

“응.”

“얼마나 멀리 가?”

“…….”

“아주 멀리?”

“응, 아주 멀리.”

“…….”

잠시 고개를 숙였던 아이는, 거의 다 먹은 파르페 잔에 남아 있던 마지막 사탕 조각을 퍼내 입에 넣었다.

“그렇구나. 첫사랑에 실패하겠구나, 데일은. 너는 별생각이 없어 보이니 이미 실패한 건가.”

“…….”

“마음이 있다면 아주 멀리로 가버릴 생각은 안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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