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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73)화 (73/108)

73화

정신이 들자마자 나는 품속의 애런을 생각했다. 느껴져야 할 온기가 없다.

시야를 확보하려고 눈을 몇 번이나 끔뻑였다.

천천히 빛이 스미는 시야로, 위로 끌려 올라가는 아이의 운동화가 보였다.

눈을 감기 전,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보라색 단발머리다.

그가 축 늘어진 아이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어? 레이스. 이 여자 정신을 차렸는데? 어떻게 된 거야.”

‘총.’

바닥을 더듬거렸는데 내 옆에 떨어져 있어야 할 총이 보이지 않았다.

“아악.”

총을 찾아 바닥을 더듬는 내 손등을 보라색 단발머리가 눌러 밟았다.

“레이스, 네 능력 대로면 이 여자 죽을 때까지 꿈속을 헤매야 하는 거 아냐? 멀쩡히 살아서 움직이는데 어떻게 된 거야? 기대도 안 했지만 너무 쓸모없잖아, 너~”

-탕!

가까운 곳에서 들린 총성이었다.

지척에서 들린 총성에 머리가 윙윙거렸다.

레이스가 내 것으로 보이는 권총을 들고 서 있었다.

“뭐야, 레이스. 미쳤어? 응? 미쳤네에~”

단발머리가 손에 든 것은 신기한 모양의 무기였다.

손잡이가 긴 창끝에, 익숙한 칼날 대신 초승달 모양의 칼날이 달려 있었다.

보라색 머리는 반달형 창을 가볍게 휘둘러 제게로 날아온 총알을 튕겨냈다.

“역시 저는 물리계 분들이 싫습니다. 조금…… 재수가 없달까요?”

“너 낙원에 가기 싫은 거야? 나 혼자 가면 되겠네?”

“네, 거긴 혼자 가시면 됩니다. 저는 가고 싶은 다른 곳이 생겼거든요.”

보라색 단발머리가 반달형 창을 고쳐 쥐며, 금방이라도 레이스를 향해 튀어 나갈 듯한 전투자세를 취했다.

“처음부터 인상이 별로더라.”

“동감입니다.”

단발머리가 애런을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누구를 응원해야 하지? 저 자식 정말 편을 바꿔 선 건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둘 다 죽어 그냥!

짓밟힌 손으로 정신을 잃은 아이의 옷을 몰래 끌어당기는데.

“이 자식, 어떻게…….”

“이래서 자기소개는 건성으로 들으시면 안 된다니까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깨달으시면 되죠. 뒈지시겠지만요.”

보라색 단발머리는 좀전의 나처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지, 스르륵 감기는 눈을 감지 않으려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레이스 이 개새…….”

“그럼 잘 가세요~”

-탕! 탕탕탕탕!

쓰러진 단발머리 위로 레이스가 총을 난사했다.

총구에서 불꽃이 일 때마다 남자의 금안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번쩍이는 불꽃과 함께 촥촥 피가 튀겼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아이의 옷을 당기던 채로 굳어 있었는데.

“이런, 죄송해요. 많이 놀라진 않으셨나요?”

레이스는 내게 다가와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

“아…… 볼에 묻었어요. 제가 닦아드릴게요.”

남자는 소매를 끌어당겨 내 볼에 묻은 피를 쓱쓱 닦아냈다.

그의 손엔 여전히, 방금 사람 하나를 작살낸 내 권총이 들려 있었다.

권총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아이를 보는 시선으로 착각했나 보다.

“벨이 소중히 여기는 아이죠?”

“…….”

레이스는 다른 팔의 소매를 끌어당겨 애런의 얼굴 위로 튄 피를 정성스레 닦아냈다.

나는 재빨리 기어가 그가 내려놓은 총을 집어 들었다.

“아이한테서 손 떼.”

‘이자의 능력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난 그 공간에서 빠져나왔고, 적어도 물리계 능력자는 아니야.’

그러니 맞춘다면 죽을 것이다.

이 거리에선 피하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남주 후보다. 죽여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후보고 XX이고 내가 이 새끼랑 사랑에 빠진 여주야? 나한테 위협이 되면 보낸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데.

-뚝, 뚝.

레이스가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아직 저를……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나는 바닥에 앉은 채, 무릎을 굽힌 그를 향해 사선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그 바람에 남자의 볼에 튄 피가 온 얼굴로 번져, 그는 마치 얼굴에 분홍 가면을 쓴 것 같았다.

표정은 심지어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기막혀라.

“제가 낙원에 가는 조건으로 실험체를 데려가려 한 건 어디까지나 당신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을 늘 바라왔지만 만나리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 그러니까 낙원은 어디까지나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벌 장소에 불과했다고요. 알겠어요? 벨! 당신을 만난 지금 그 이전의 모든 것들은 다 물거품일 뿐이죠.”

-철컥.

“???”

놈이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틈을 타, 나는 총에 장전된 총알을 확인했다.

미친놈이 막 갈겨대는 바람에 혹시나 장전된 총알이 바닥났을까 봐.

‘단 한 발 남았군.’

놈은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상처받기라도 했는지 눈물을 끅끅거리며 쏟아냈다.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벨, 제발…….”

“멈춰 뒤지기 싫으면.”

그가 무릎을 꿇은 채 거리를 좁혀왔다.

내 말이 들리기는 하는 건가?

표정만 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놈 같다.

기어코 거리를 좁힌 그가,

-쾅! 쾅! 쾅!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남자의 무릎 앞에 이마를 찧은 자국이 생겨났다.

무식하게 들이박았는지 레이스의 찢어진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 이마가 다 욱신거리는 기분.

“저는 이제 당신만 따를 겁니다. 당신이 죽으라면 죽고…….”

“그럴래요?”

“…….”

“아직까지 몰랐어요? 난 사람 죽이려고 총 들고 있는 거예요. 내 앞에 있는 당신이겠죠?”

벌어진 입으로 할 말을 찾으려 애쓰던 레이스는, 무릎으로 기어서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이마를 찧어댄 자리에 무릎을 세워 앉아 있었다.

내 팔 하나 정도의 거리.

그가 스스로 총구를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럼 죽이세요.”

“…….”

“당신의 세상으로 데려가 줄 마음이 없다면, 사는 건 무의미합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냐 XX 진짜.’

이 새끼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레이스의 목적은 동료와 함께 애런을 납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우리 집에 가뒀고, 내가 운 좋게 그 공간을 부수고 나왔다고 해도 둘이서 나 하나를 제압하는 일은 손쉬웠겠지. 그리고 보상으로 낙원에 가면 됐을 텐데.

‘그걸 다 팽개치고 자기 손으로 동료를 죽였어.’

무엇을 위해서? 정말 내 세상으로 넘어오고 싶어서?

내 세계로 데려가 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거라는 놈의 말은 진심일까.

잘못 판단하면 내가 아끼는 이들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총구를 겨눈 채 일어섰다.

바로 옆은 식당칸의 오픈 조리대였다. 그곳에서 작은 과도를 꺼내 들었다.

“내 세계로 가고 싶어?”

그는 울음을 삼키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손 대, 그럼.”

그가 순종적인 자세로 다섯 손가락을 고르게 펴서 바닥에 대는 순간.

-푹.

나는 망설임 없이 과도를 손등에 찔러넣었다.

독한 마음으로 행한 행동이었는데, 칼이 살을 찢고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전해지자 나도 모르게 과도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크흑.”

남자는 고통 어린 신음을 뱉어냈다.

신음을 뱉어내면서 칼 손잡이를 느슨하게 쥐고 있던 내 손을 꽉 감아쥐었다.

“당신이…….”

내 손을 감싼 손과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그는 제 손으로 칼을 더 깊게 찔러넣는 걸 멈추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

진짜 마음을 독하게 먹었는데도 참 싸이코를 만나니 주도권이 넘어가는 건 보이는데도 뭐 어쩔 수가 없네.

“내 눈 봐.”

손이 찢기는 고통을 입술을 깨무는 고통으로 상쇄하려는 듯, 레이스는 입을 악물고 있었다.

“아파도 눈 감지 마. 내 눈 잘 봐.”

그의 이마는 피와 눈물, 마구 엉킨 머리카락으로 엉망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고통을 참느라 도드라진 핏줄이 보였다.

부드럽게 이마 위 땀에 젖은 남자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배신하면 이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거야. 그래도 네 말이 진심이야?”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는 고통보단 덜할 거예요.”

이마에 선 핏줄이 여전한데도, 그는 부들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 애썼다.

“큭.”

들어갈 때에 비하면 뽑아내는 건 쉽구나.

깊게 박혀 있던 칼을 쑥 뽑아냈다.

레이스는 손을 쥐고 그대로 애벌레처럼 몸을 옹그렸다.

‘손등을 감쌀 만한 게.’

식탁보를 칼로 북 찢어내 던졌다.

제 머리 위로 내려앉는 식탁보에 그는 애처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걸로 감싸요.”

“감사합니다.”

“당신, 총 쏠 때 보니까 왼손잡이더라. 나름 배려해서 오른손을 찔렀어.”

“알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

“데려가 주실 건가요? 이건 데려가 주신다는 약속이겠죠?”

손으로 짓이겨질까 놀라 웅크린 애벌레 같은 꼴을 하고서, 레이스는 식탁보로 감싼 제 손을 무슨 약속의 증표인 양 들어 보였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웃음에 발을 빼 도망가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일단 살리자. 그는 애런을 실험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뭔가 더 아는 게 있을 거다. 저 남자가 원작의 진남주라면 진남주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졌을 수도 있지.

‘그리고 놈은 우리 집을 불러냈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저 남자를 이용해서 내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여러모로 의문투성이지만 그런 만큼 일단 살리자.’

“약속이요? 내가 언제 그쪽이랑 약속을 했던가요.”

나도 돌아갈 수 있을지 막막한데 약속은.

놈의 손에 감긴 파란 식탁보는 짙은 보랏빛으로 변하다 못해 다 젖어, 젖은 천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내가 솔직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성토한다면 저놈의 태도가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난 여기서 할 일이 있고, 끝나면 돌아갈 거예요. 그때 당신을 데려갈지 말지는…….”

“…….”

“하는 거 봐서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떨리네요.”

레이스는 멀쩡한 손으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애런은…….”

“그럼 우선 이걸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둘의 말이 겹쳤다.

먼저 말하란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이는 괜찮을 겁니다. 그냥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까요. 문제는.”

남은 한 손과 이로 식탁보를 찢어, 레이스는 제 손에 감긴 천을 갈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열차를 멈춰야 한다는 사실이죠. 다리를 다 건너기 전에요.”

“??”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작은 산을 끼고 도는 굽은 다리는 산속에 제 중간 자락을 감추고 있었다.

레이스를 돌아보자 그가 답을 내놨다.

“당신의 제의로 열차에 탔지만, 원래 계획은 열차가 다리를 통과하는 중간 지점에서 덮치는 거였으니까, 아이를 납치하려는 이들이 다리 중간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들은 열차에 탄 둘에 비하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종자들이지만…….”

그는 노란 눈을 일직선으로 굴렸다.

“지금 상황에선 위협적일 수 있겠군요.”

“아까 보라색 머리 같은 각성자가 있어요?”

“방금 한 말처럼 쓰레기같이 치워질 종류들뿐이죠. 각성자는 없습니다.”

그럼 데일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왜 잠잠해?’

“혹시 당신 아까 나한테 했던 짓, 동시에 가능해?”

“어…….”

레이스의 금안이 내 시선을 피해 아래로 동그랗게 굴러떨어졌다.

“제가 유능해요.”

“하, 그럼 당장 깨워.”

“어…….”

남자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멀쩡한 손으로 틀어막는다.

“다시 생각하니 조금 무능한 면도 있네요.”

그럼 데일은.

“못 깨운단 말?”

“그렇다는 말. 지금까지 혼자 깨어난 사람은…….”

레이스는 내게 눈을 맞추더니 찡긋 웃었다.

“오직 그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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