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한 번쯤 사이다 가득한 웹소설에 빙의하는 일을 상상은 해봤지만, 이렇게 엄마랑 마주 앉아 찌개를 먹다가 시스템 창이 나오는 전개는…….
‘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시스템 창이 나오는 타이밍은 화려한 침실에서 눈을 떴을 때나, 단두대라든지 응, 그럴 때잖아.
‘아!’
소설로 빙의를 안 하고도 현실에서 각성을 이룬 거구나 내가!
그럼 기억삭제를 왜 해, 내 멀쩡한 기억을.
나는 시스템 창의 아니오를 눌렀다. 오, 눌러진다.
[당신은 여전히 이 공간에 계속 머물길 바라고 있습니다.
기억을 삭제하지 않고 머무는 방법은 타인의 공간을 강제 점거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스킬 ‘자기연민’을 일시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공간을 강제 점거하고 이곳에서 계속 머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이어지는 말이 황당했다.
‘집 명의가 우리 엄마로 되어 있는데, 타인의 공간이라니 뭔 소리야.’
뭔 소리지. 이걸 눌러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고민이 됐다.
“엄마.”
“응.”
“엄마 집은 곧 내 집이지? 그치? 엄마랑 나 사이에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아, 뭘 물어. 맞지.
엄마의 대답도 안 듣고 예를 눌렀다.
그러자 곧, 상태창이 내용을 바꿨다.
[공간을 강제 점거합니다.
강제 점거 진행 중: 〘1%〙]
올라가는 퍼센트를 보며 밥 한 숟갈을 퍼먹었다.
각성자가 나타났으니 이제 현실도 소설에서 봤던 것처럼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가 쏟아지고 그리 바뀌는 것일까.
그럼 내 능력은 뭘까, 등급은?
‘제발 S급으로 해주세요!’
능력은 아무래도 공간 지배? 전투계열 헌터들이 앞에서 피 터지게 싸우면, 나는 그 뒤에서 방어막을 펼쳐 안전한 공간을 열어주고 그런 것일까.
‘X좋다.’
전투계열 헌터들이 너도나도 나를 원하며 자기랑 함께하길 바라고 소중히 대해주고 집착하는.
‘내 인생 이대로 이 길로!’
가즈아 이 전개로!
[공간을 강제 점거합니다.
강제 점거 진행 중: 〘45%〙]
높아지는 진행률을 보며 장조림을 집어 먹었다. 달았다.
강제 점거인지 뭔지가 끝나면 내 직업도 알려주고 등급도 알려주고 그러겠지?
정해지면 엄마한테 바로 알려줘야지.
딸 진로 걱정은 더 이상 안 하셔도 된다고.
“엄마, 장조림 맛있다. 귀신은 아니었던 거 같고, 설명할 게 있는데 밥 먹고 천천히 할게.”
“재밌네.”
“응?”
엄마는 꽤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퍼놓은 밥을 보니 딱 한 숟가락 먹은 게 다였고. 진짜 왜 그래, 오늘.
‘아, 맞다 게이트!’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폰을 확인했다. 각성했다는 것은 각성자가 필요한 곳이 생겼다는 것.
그러나 유튜보도, 실시간 방송도 잠잠했다.
아직 일이 벌어지기 전인가?
혹시 몰라 앞 베란다로 달려나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뿌우.’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덜컹, 덜컹…….
몸이 흔들리는 기분.
그러나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은 이른 저녁을 먹고 다이어트를 위해 조깅을 나온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눈이…… 내린다.”
눈발이 휘날려 베란다 창문을 닫고 돌아섰는데.
“……집 천장에서도 내리네.”
천장에서 내린 눈이 거실에, 부엌에 온 집에 쌓이고 있었다.
“우리 집이 이러면 안 되는데.”
엄마가 식탁에서 일어나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난 여기 있고 싶은데.”
“벨.”
어느새 다가와 내 앞에 선 엄마가 나를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딸. 엄마한테 오고 싶었잖아, 그렇지?”
“…….”
“그럼 여기 있으면 돼. 영원히 엄마랑.”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엄마, 엄마아…….”
“…….”
“갈게, 날 기다리고 있을 엄마한테로 돌아갈 거야. 내가 있을 곳은 거기니까.”
“그래, 내 딸.”
왼쪽 볼에 닿은 따뜻한 엄마의 볼과 함께 바스락거리는 얇은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의 것.
“근데 왜 네가 우리 엄마 행세를 하는 거야, 역겹게.”
얼굴을 떼 엄마의 모습을 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흥미가 드글드글 들어찬 눈동자로 눈꼬리를 접었다.
“레이디, 어떻게 아셨나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두 팔로 그것을 밀어냈다.
엄마의 모습을 한 그것은 힘없이 밀려나 거실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레이스인가.’
왜 소설의 남주가……. 아니, 난 남주들이 부둥부둥 해주는 여주도 아니거니와 소설의 남주가 항상 선하란 법도 없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궁금해? 어떻게 알았는지?”
“…….”
“진짜 딸을 사랑하는 엄마들은 딸 앞에 사랑한다는 수식어는 안 붙여. 그냥 딸이다.”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리고 엄마한테 나는 벨이 아냐 등신아.”
“실수했네요.”
“종!”
오랜만에 그 이름을 불렀다.
눈 내리는 집 거실에 생긴 작은 금빛은, 곧 핸드벨 모양으로 모습을 바꿨다.
“점거 끝났어? 여기서 나갈래. 안쓰러운 내 불우이웃들이 기다린다.”
[당신은 이 공간에 계속 머물길 원하는 마음에, 공간을 강제 점거까지 했습니다.
기억을 삭제하고 이곳에서 계속 머물 수 있습니다.]
“이 똥멍청이가 진짜……. 여긴 가짜야, 이 멍청아!”
나는 집 거실을 슥 둘러봤다. 소파에 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한 레이스도, 이 집도 모두 진짜가 아니다.
“거짓에 속으려고 한 고생이 아니라고. 거짓 속에 있으려고 걔들을 두고 올 순 없어!”
[점거 완료]
[스킬 ‘자기연민’이 영구활성화됩니다.
영구활성화조건: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기]
‘자기연민이 활성화됐어?’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레이스가 바닥을 기어 다가왔다.
그가 뭐에 홀린 듯한 눈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저도 이곳에 오고 싶습니다. 당신의 세계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만이, 당신만이 이 지루한 곳에서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 자식 뭔 개소리야?
다리를 툭툭 털었는데 도무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기, 무기로 쓸 만한 게……. 아, 얘가 있었지.
나는 공중에 떠 있는 핸드벨을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뚜드려 팼다.
“떨어져! 떨어지라고 이 징그러운 새끼야!”
엄마가 아니란 걸 아는데도 외형이 너무나 엄마 모습이라, 머리로는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열심히 어깨와 등을 때리며 소릴 질렀다.
“그래? 내 세계로 데려가 주길 원해? 뭐든지 한다고? 그럼 일단 망할 그 모습부터 바꿔.”
그러자 거짓말처럼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 아래 달라붙어 있는 건 레이스의 본모습이었다.
“옳지, 이 새끼야. 이제 마음껏 때릴 수 있겠다!”
놈의 정수리에 싱크홀을 선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정수리를 팼다.
그러다 문득 팔을 멈췄다.
‘나 시간 없는 거 아냐?’
내 예상에, 여긴 아마 현실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가상공간 같은 장소가 아닐까 했다.
“이 공간과 내가 쓰러진 밖의 공간이랑 시간의 흐름이 같아?”
“아닙니다. 여긴 거의 시간이 멈춘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래?”
잘됐다, 그럼 더 맞아라, 하고 팔을 열심히 휘두르다가.
“패서 뭐 해. 또 네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데. 나갈래.”
“믿어주세요! 당신이 저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만 해주신다면 뭐든지, 뭐든지 할 테니!”
됐고.
“종! 나가자고!”
[점거 완료, 공간의 소유권이 종의 요정께 있습니다.
나가기 위해선 공간 붕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공간을 붕괴시키겠습니까?
예 / 아니오]
“해, 나가자.”
말을 뱉고 나자, 약간의 진동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바닥이, 벽이, 거실의 소품들이 불에 다 타버린 재가 흩날리듯 공중에서 흩날리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이런 건 정말…….”
“…….”
실성한 사람처럼 미쳐 웃는 레이스를 보다, 나는 거실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던 작은 액자를 손에 쥐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나와 엄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의 엄마와 내 사진 역시 재가 되어 공중을 돌다 사라졌다.
‘오늘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