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대충 기억나는 건 이 정도.
‘아직 원작이 시작되기 전인 건가.’
무리를 만들었을 그가, 왜 자신을 군인이 아닌 집배원으로 소개하며, 여기서 다른 남자 한 명과 왜 차박 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유력한 남주 후보를 내팽개치고 갈 순 없잖아?’
내 시선을 느낀 레이스가 이쪽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제 볼을 콕 찌르며 눈을 접어 웃었다.
“…….”
흑발 군인의 속성은 차가운 이성을 가진 냉혈캐인 줄 알았는데…….
‘도라이였던 건가.’
❅
열차의 마지막 칸인 5호차는 애런과 데일이 훈련을 빙자한 놀이를 하던 곳으로, 애런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이럴 수가.”
제 놀이방을 빼앗긴 아이는 허망한 표정으로 5호차로 넘어가는 사잇문을 노려봤다.
사잇문에 난 창은 좀 높은 위치에 달려 있어서, 애런의 눈높이로는 막힌 문만 보일 텐데도 저렇게 가만히 서서 노려본다는 것은.
‘아이한테 투시 능력이 생겼나.’
그래, 이곳은 각성자가 존재하는 세계관.
아이가 갑자기 능력을 각성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나는 여전히 몸을 굳히고 문을 노려보는 애런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애런, 뭐…… 보여?”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막 뛰어다니는 나쁜 아저씨들이 보여.”
“그래?”
그 대답에 조금 두근거렸다.
설마 정말?
그러나 사잇문에 난 창을 들여다본 나는 팍 식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 있잖아.
“아니잖아.”
괜히 설렜네.
“이익.”
상대를 보지도 못하고 문에다 성질을 내는 아이가 안타까워 안아 올렸더니, 애런이 바로 창문에 납작 달라붙었다.
“훈련장을 빼앗기다니.”
아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작은 주먹으로 문을 콩 때렸다.
그러자 좌석에 가로로 누워 휴식 중이던 레이스가 일어나 제 볼을 콕 찍었다.
“으으.”
그 행동이 애런의 분노를 더 산 모양이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런, 입술 깨물지 마. 아야해.”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의를 시켰다.
“저 칸에 들어가지 마.”
-드륵.
“저 아저씨들 언제 가!”
“그러게나 말이다.”
4호차로 들어온 데일이 빈정거렸다.
“음, 일단 오늘 밤엔 안 가. 그러니까 저 칸으로 넘어가지 마? 그러겠다고 약속해.”
내가 애런의 말에 답하자 데일이 2차로 빈정거렸다.
“자기 마음대로 데려와 놓고서 애더러 들어가지 말란다. 꼬맹이 받아주지 마.”
“응, 약속 안 해.”
“…….”
이놈의 남자들이 확 그냥.
강하게 눈을 부라리자 애런이 대답을 고쳤다.
“해…….”
“옳지.”
데일에게 애런을 넘겼다.
“애런이랑 가서 눈 좀 붙여요.”
“넌.”
“감시 역할 한 명은 있어야 하잖아요.”
어차피 이 시간에 깨서 기관실을 지킬 차례는 나였다.
내가 오케이 한 일이기도 했고.
“그래 그럼.”
가볍게 수긍한 그가 아이의 손을 잡고 4호차를 나갔다.
4호차와 5호차를 잇는 사잇문엔 쇠사슬을 쳐뒀다.
적어도 한 번에 건너오진 못할 것이다.
태우기 전, 데일이 철저히 몸수색도 했으니 일단 큰 걱정은 접어두고 있어도 되겠지.
-똑똑.
레이스와 함께 온 남자가 사잇문을 두드렸다.
진한 보라색 눈에, 보라색 단발머리를 한 남자였다.
“네.”
-드륵.
“저, 화장실이 급한데.”
“저기 보여요?”
열린 사잇문으로 마지막 칸의 뒷문을 가리켰다.
“열고 눠요.”
그러자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는데…….”
“뭐가요.”
“얼어요.”
“시동 틀고 차에서 잤어도 야외에서 해결했겠죠. 안 그래요?”
“……예,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어딜 기어 나오려고.
남주 후보와 그의 일행이라지만, 아직 데일처럼 믿을 만한 사람인지 검증은 안 됐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보라색 단발이 입을 꾹 다물고 되돌아갔다.
“저기요, 문은 닫고 가셔야죠.”
“망나니 같은 사람이라……. 제가 닫을게요.”
보라색 단발 대신 문 앞에 와 선 건 레이스였다.
문을 닫겠다던 놈이 털썩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밝은 곳에서 보니 그의 머리는 흑발이라기보단 진한 회색 머리칼에 가까웠다.
눈을 내리깐 그가, 쇄골을 살짝 넘는 제 머리를 하나로 올려묶었다.
‘닫아달라는 문은 안 닫고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아니다. 오히려 얘기를 나눠볼 시간이 생긴 건 좋은 일일지도.
“이름이 레이스라고 했죠.”
“기억해 주셨군요, 레이디.”
레이디는 얼어 죽을.
“제가 이름을 묻는다면 대답해 주실까요?”
“벨이요.”
“벨이라, 자꾸만 발음하고 싶어지는 어여쁜 이름입니다.”
그 순간, 이 남자와 오래 대화는 못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구겨지려 하는 표정을 신경 쓰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나라도 더 알면 좋은 상황이 아닌가, 참자.
“그래요, 레이스. 문을 닫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럼 거기 앉아서 몇 가지 질문이나 받을래요?”
그는 사잇문 바로 옆에 등을 대고 앉아, 기지개 켜듯 고개를 뒤로 쭉 젖혔다가 내리며 대답했다.
“이 문을 닫지 않을 수 있다면요.”
“네. 영원히 열고 계세요, 그냥.”
“그렇다면 얼마든지요.”
식당칸 의자에 편히 앉아서, 그가 지금도 소중히 메고 있는 가방으로 시선을 줬다.
“세상이 망하기 전 직업이 집배원이라도 됐나 봐요? 그렇게 편지가 그득한 가방을 메고 있는 걸 보면. 아니면…… 이제껏 받았던 편지들을 챙겨온 건가요?”
레이스는 수줍게 웃음 지었다.
“멋진 눈썰미세요.”
“예.”
“보신 대로 전 집배원입니다. 아니, 세상이 망해서 직장이 없어졌으니 집배원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편지들을 아직도 그리 소중히 보관하고 계시니, 지금도 집배원인 거죠.”
“참 사려가 깊으세요.”
“하하 예, 예예. 한 사려 해요.”
지금이 원작 시작 전이라 해도, 시작 후 그 짧은 시간 동안 짠 하고 군인이 될 일은 없을 테니 이미 군인이라는 소린데.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숨기는 건가? 전투에 능한 군인보다야 집배원이라고 말하는 쪽이 상대의 경계심을 낮추기에 좋으니.’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 질문을 돌려주었다.
“벨은 세상이 망하기 전에 무엇을 하셨나요?”
“대, 저는 무직이요.”
“아 무직이셨구나……. 고귀한 출신이란 말을 그리도 할 수 있군요.”
“예, 저도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꾹 참고 다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자신의 직업을 굉장히 좋아하시나 봐요. 이젠 전해줄 수 없는 편지를 계속 가지고 다니시는 걸 보면.”
레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대답했다.
“네. 보내는 사람이 마음을 담아 쓴 편지라, 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전 언젠가 다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거든요.”
거 뭐, 어떻게 보내주는데요. 시체 품 안으로 토스해 줄 건가.
“직업의식이 투철한 분이시네요.”
“칭찬은 늘 부끄럽군요.”
“…….”
“아!”
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화색이 도는 얼굴로 제 가방을 뒤졌다.
‘데일이 가방도 꼼꼼히 수색했겠지?’
“여기.”
난데없이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길래 긴장했는데, 남자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하얀 엽서였다.
“마침 사용하지 않은 엽서를 몇 장 가지고 있는데 쓰시겠어요?”
“어…….”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뒤에서 드리운 그림자가 내게 내밀어진 엽서를 낚아채 갔다.
“엽서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데일은 빈 엽서를 앞뒤로 뒤집어 살폈다.
다소 건들대는 제스처였다.
“자러 간 거 아니었어요?”
“감시역이 영 불안해서 잠이 안 오던데.”
“…….”
“그래서 엽서 쓰면, 보내줍니까?”
그럼요, 쉽게 대답하며 또 웃는 낯을 할 줄 알았던 레이스는.
“반드시, 보내드립니다.”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말에 데일도 표정이 가라앉았다.
“반드시? 그럼 죽은 이에게도 보내준단 소립니까?”
“그럼요. 편지에 담긴 마음은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까요.”
“…….”
얘들아, 너희가 하는 대화 너무 고차원적이라 내가 못 따라가겠다.
나는 가운데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레이스가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벨, 엽서를 보내고 싶다면 언제든 써줘요. 꼭 보내드릴게요.”
쓰지도 않을 거면서, 그가 내민 하얀 엽서를 나도 모르게 받아버렸다.
받아 들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 편지나 엽서를 쓰지 않던 사람도 새하얀 엽서 앞에서는, 편지를 보내고 싶은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나 보다.
“어…….”
엽서 위로 눈물이 똑 떨어졌다.
급하게 양팔로 얼굴 위에서 눈물을 지워냈다.
“이런 상황에서 편지를 보내줄 수 있다는 농담은 정말 재미가 없네요.”
갑자기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난리람.
“젖게 만들어서 미안한데, 필요 없으니 가져가요.”
레이스에게 엽서를 되돌려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간에 멀거니 서 있던 데일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감시역이 못 미더우면, 못 미더운 감시역은 잠이나 잘 테니 그쪽이 해요. 잘게요, 난.”
“야, 통조림.”
1번 객실로 돌아오니 침대는 비어 있었다.
형이 악몽을 꾸지 않게 지켜준다더니 애런은 아예 저쪽에서 잠이 든 모양이다.
푹신한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보내준다고? 네가 어떻게 보내줄 건데.’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은.
‘나밖에 못 해.’
그러니 내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