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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68)화 (68/108)

68화

‘데일이 악몽을 꾼다니.’

홀로 기관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적막한 한밤의 기관실은 잡생각을 하기에 딱이었다.

악몽을 꿀 게 뭐가 있담.

거길 차였던 고통이 너무 컸던 건가.

그래서 거길 끊임없이 차이는 악몽을 꾼다든지, 뭐 그런?

“…….”

그런 거겠냐, 부정하려 해봐도 답은 뻔했다.

헨리와 스칼렛이지, 뭐.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그는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약하다니까. 자길 배신한 사람인데도 저러는 걸 보면.

그러니 내가 옆에 있는 동안 적어도 지켜야만 하는 건.

‘눈앞에서 죽지 않는 것.’

동료를 잃는 일, 그는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넌 계속 살아 있을 거지?”

“…….”

“죽지 않을 거지?”

“…….”

“대답해.”

1년, 2년 또는 몇 년을 버텨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건 해줄 수 있겠지.

열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치는 철로와 어둠뿐.

이제 이틀만 달리면 수도에 진입한다.

우리가 앞으로 함께 보낼 나날은 총 몇 날이 남았을까.

낙원에 가까워진다는 건, 함께할 날들이 줄어든다는 것.

“…….”

악몽 따위 꾸지 않는, 좋아진 모습을 보고 헤어질 수 있다면 좋겠는데.

데일, 애런, 에즈라 모두…….

-쾅!

헤드라이트 좌측 불빛에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뒤로 쓸려갔다.

범퍼 역할을 하는 쐐기형 배장기에, 선로에 있던 무언가가 튕겨 나간 것 같았다.

나는 급하게 비상제동 스위치를 당겼다.

‘뭔갈 쳤어.’

언뜻 보기에 차였던 것 같은데.

사람이 타고 있었겠지……. 아, 어쩌면 좋아.

많이 다쳤겠지. 내 능력으로 되돌릴 수 있는 정도일까. 이미 죽은 거면…….

뭐, 뭐부터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져야 하는데, 냉정하려 애썼지만 이미 머릿속이 백지상태였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시간은 흘렀다.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바깥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

구석에 있던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광량이 약해 등유랜턴보다도 불빛의 세기가 약하지만, 마음이 급했다.

기관실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손전등의 약한 불빛이 밝히는 거리는 약 2미터쯤.

-뽀드득, 뽀드득.

차가 쓸려나갔을 뒤를 향해 눈 위에서 몇 걸음을 옮기자.

‘있다.’

앞쪽이 완전히 짜부라진 차가 한 대 보였다.

‘사람을 꺼내야 해.’

손전등을 바닥에 내던지고 운전석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

차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악.”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내 몸을 끌어당겼다.

힘이 날 멋대로 일으켜 차에서 떨어트렸다.

총이 든 주머니로 손을 넣을 수가 없었다.

“데, 데일!!”

괴인에게 끌려가며 반사적으로 외친 건 그의 이름이었다.

깜깜했던 열차의 불이 들어왔다.

“개새X가.”

1호차 뒷문을 열고 달려 나온 그가 나를 끌어안은 괴인을 향해 발을 날렸다.

동시에 억압당했던 몸이 풀렸다.

바닥에 풀썩 고꾸라져 돌아보자, 데일의 군홧발이 괴인의 얼굴을 강타했는지, 놈의 고개가 홱 돌아가 있었다.

나는 총을 꺼내 놈을 겨눴다.

그러나 남자는 내가 들이댄 총구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어깨에서 흘러내린 제 가방을 줍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열차의 불빛이 눈밭 위를 비췄다.

‘편지?’

편지가 눈에 젖을세라, 괴인은 빠르게 흩어진 편지들을 가방에 주워 담았다.

“돕고 싶었을 뿐인데 제가 오해를 산 모양이군요.”

일어선 괴인이 그제야 제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남자가 가진 샛노란 금안이 선명했다.

“끌고 가려던 새끼 입에서 어쭙잖은 거짓말이 잘도 나오네.”

데일이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거 좀…… 나와봐요. 겨누고 있는데 막으면 어떡해.”

“너는 왜 멋대로 혼자 나온 거야?”

“그게…….”

내가 한눈을 팔아 사람을 쳤다는 생각에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까.

정신 차려보니 밖이었다고.

금안의 남자는 자신을 향한 총구를 보고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쏘지 말아 달라는 듯 애처롭게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열차가 치고 간 건 빈 차예요.”

“…….”

“그러니 걱정은 놓으셔도 좋아요. 다친 사람은 없거든요. 아!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릴 뻔했네요. 제가 다쳤으니까요.”

저놈이 지금 자기 맞았다고 돌려 까는 거지?

금안의 남자는 모자가 달린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 안에서 삐져나온 검은 머리카락이 길다.

‘금안에 장발이라.’

올라간 긴 눈꼬리에 고집 있어 보이는 분위기인데 짓고 있는 표정은 고분고분했다.

어, 내 취향이다.

뭐 어쨌든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누고 있을 필요가 있나? 없지.

“데일, 가요. 시간 아까워요.”

에즈라와 애런이 1호차 뒷문에 숨어서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근데 저 남자, 두고 가면 얼어 죽으려나?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을 때.

“아, 저기.”

남자가 열차를 오르는 날 불러 세웠다.

“더 가실 수 없어요.”

가실 수 없다니?

“알아듣게 얘기해 주지 않으면 쏘고 싶어질 것 같은데요.”

“이 앞엔 큰 다리가 있는데 다리 입구가 차로 막혔어요. 밤이 늦어 차는 내일 치우고 다리를 건널 생각이었는데, 앞이 막혔단 표시를 해두지 않으면 모르고 달리는 분들이 계실까, 빈 차에 표시를 하고 돌아서던 참이었어요.”

남자의 금안이 부서진 차를 가리켰다.

차에 크게 쓰인 경고 문구가 그제야 보였다.

‘충돌주의.’

“여자를 끌고 가려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데일의 말에, 남자는 무해를 주장하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차가 폭발할지도 몰랐으니까요. 펑, 퍼벙. 눈앞에서 사람이 터지는 모습을 보긴 싫은걸요. 길게 설명하기보다 일단은 차에서 떼어내고 보자 싶었습니다.”

“…….”

“에즈라, 이 앞에 다리 있어?”

“어, 있어.”

지도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에즈라는 노선을 대충 꿰고 있었다.

나는 금안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던 데일을 불러 작게 속삭였다.

“저 남자 말이 사실일 수 있으니 확인하고 와야겠어요.”

-휘오오오.

어둠에 잠겨서 잘 보이진 않는데 대충 얕지는 않다는 건 알겠다.

귀때기를 때리는 매서운 계곡 바람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휘웅.

데일이 발로 찬 돌멩이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남자의 말대로 다리의 진입로가 병목 현상처럼 막혀 있었다.

서로 먼저 다리를 건너려다 모두 건너지 못하고만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달리는 열차가 차 한 대 정도는 쳐낸다고 해도 이 정도 수면…….

모르고 달렸다면 아마 지금 우리는 탈선한 열차 안에서 추락 중이었겠군, 오.

“제 말대로죠?”

나는 들려온 목소리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자신을 집배원으로 소개한 검은 머리의 남자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제 얼굴로 향한 불빛에 일순간 눈을 찌푸렸던 남자는, 싫은 내색 없이 눈꼬리를 곱게 폈다.

어서 고맙다고 말해! 하는 눈빛으로 남자는 웃고 있었다.

“덕분에 살았네요. 감사드려요.”

“인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닌걸요.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해 들었으니 제 터진 입술도 곧 낫겠죠?”

“하하. 그러……겠죠?”

“뭘 좋다고 쑥덕거리는 거야.”

남자와 나 사이로 데일이 쑥 끼어들었다.

열차를 버리고 돌아가려면 멀리 돌아야 한다.

저들의 말대로 내일 날이 밝자마자 차를 하나하나 치우고 다리를 건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열차로 돌아가자.”

데일이 내 등을 떠밀었다.

“잠깐만요.”

데일의 몸 옆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인사했다.

“고마워요? 내일 아침에 또 보겠네요.”

“기쁜데요.”

“??”

저 자식 왜 급발진이지.

정보가 없으니 놈이 왜 저러는지 해석이 안 됐다.

쟤 이름이 뭐더라.

그가 자신을 집배원이라고 소개한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루이, 라블, 레…… 하여튼 ㄹ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그때, 타이밍 좋게 그의 일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왔다.

“레이스! 차 시동이 안 걸려! 시동 꺼진 차에서 밤을 보내면 얼어 죽을 텐데…….”

‘맞아, 레이스였던 거 같아!’

그 말을 들은 레이스는 염려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근슬쩍 나와 눈을 맞추면서.

‘어쩌지.’

“저기요. 안 가세요? 여기서 얼어 돌아가실래요? 누님, 저 추워요.”

데일이 자동차 와이퍼처럼 팔을 흔들어 레이스를 보는 내 시야를 방해했다.

“어떡할까, 레이스.”

레이스에게 의견을 구하는 다른 남자의 시선 역시 이쪽으로 흐르긴 마찬가지.

결국, 레이스의 입이 열렸다.

“옆에서 들으셨겠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도움을 청하고 싶어요. 열차의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오늘 밤 열차에서 지내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잽싸게 그의 일원도 말을 보탰다.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열차에 올라타려고 하는 인간들에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옆에서 충분히 봐온 데일이었다.

“아억.”

“진짜 춥다. 가자.”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지, 데일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나를 어깨에 들쳐멨다.

“자, 잠깐만. 객실은 안 되고요! 마지막 칸에서 나오지 않는 조건이면…….”

“감사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내 발언에 데일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서 씩 웃었다.

“미쳤냐.”

“하하, 누구든 얼어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없는 선량한 마음을 쥐어짜 보자구요.”

“안 솟던 선량한 마음이 왜 지금 솟았을까.”

“지금이라도 솟았으니…… 솟았으면 좋은 거죠.”

데일은 얘가 왜? 하는 표정이었지만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저 뒤를 돌아보고선 작게 욕을 내뱉을 뿐이었다.

“X같은 흑발.”

“아하하.”

흑발 집착녀로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데일의 어깨 위에서, 우리 뒤를 따라오는 레이스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레이스. 27세. 흑발.

집배원 출신 군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제국에 모여든 여러 무리 중 한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이 혐오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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