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우리의 계획은 필요한 역에서 한 번만 멈추고 계속 달리는 거였는데.
-끼이이익.
열차가 급정거한 듯싶었다.
침대 위에서 한창 자던 중에 몸이 한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야야.”
찧은 부위를 비비며 일어나 애런부터 찾았는데, 애런은 여전히 침대 위에 있었다.
아이는 좌우가 아닌 상하로 굴렀는지 침대 헤드에서 눈을 비비적거렸다.
“벨?”
“어 애런, 다친 데 없어?”
“우웅…… 졸려.”
“나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고 올 테니까 여기 있…….”
-쾅! 타다다닥.
옆 객실 문이 열리자마자 1호차를 향해 달려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많이 들어왔던 발소리다.
바로 객실 문을 열고 나가자 사잇문을 여는 데일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데일 뭐예요?”
“몰라, 확인해야 해. 에즈라는 기관실에 있었지?”
“네.”
“내가 기관실로 갈 테니까 애런 데리고 나와서 같이 와.”
“알겠어요.”
고새 다시 수마에 사로잡힌 아이에게 대충 외투를 걸쳐서 안아 들었다.
“애런, 애런.”
“우…… 우응.”
밀려드는 잠을 이기기 힘든지 애런은 자꾸 품속에서 고꾸라졌다.
“끙차.”
“…….”
“꼬맹이 왜 잠에 빠지니까 더 무거운 거 같냐.”
“우웅……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알고서 대답하는 거야?
아직 상황파악도 못 했는데 애를 보고 있으니 실없는 웃음이 기어 나왔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1호차로 넘어가는데, 열린 기관실 문으로 데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팔을 저었다.
“별일 아냐, 안심해.”
“왜 멈춘 건데요?”
데일 뒤로 에즈라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가 놀랐지? 다친 사람은 없어?”
“어어, 나랑 애런 다 괜찮아.”
“왜 멈췄냐면, 어차피 깼으니까 와서 직접 볼래?”
그녀의 말대로 기관실로 들어서자,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열차의 코앞 상황이 보였다.
“저거…… 사슴?”
내가 봐왔던 사슴보다는 털 색이 더 짙고 뿔이 웅장한 개체였다.
“순록이구나, 그것도 순록 떼.”
헤드라이트가 열차의 앞부분만을 비추고 있었기에, 순록 무리의 앞뒤가 보이지 않아 총 몇 마리가 이동 중인 건지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순록들이 사뿐사뿐 철로 위를 가로질렀다.
‘느려!’
“쟤들 때문에 급정거했구나.”
“어, 잘못하면 칠 뻔했지 뭐야.”
에즈라가 충혈된 눈을 크게 껌벅이며 말했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너 언제 잤어?”
기관실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눈 붙이는 줄 알았는데.
에즈라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이었다.
“안 잤는데? 교대 근무할 기관사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자.”
“열차가 여러 대라 운행 신호를 받을 일도 없는데 왜.”
“…….”
에즈라는 작게 입을 비죽였다.
“열차가 움직이는 동안 기관사는 깨어 있는 거야. 그게 열차와 내 승객들을 지키는 거니까, 당연한 거라고.”
“그럼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안 잘 거야?”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랑 교대로 해. 내가 보다가 무슨 일 생기면 너 바로 부르면 되잖아. 정차 방법만 알려줘.”
에즈라는 영 못 미덥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얼굴은 벽에 기대서라도 바로 숙면에 돌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해서는.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과로사한 기관장 시체 치우는 일은 사절이거든?”
“웅, 사조리야…….”
애런이 꿈속에서 한마디를 거들었고.
“맞는 말 같은데 좀 주무시죠.”
옆에서 지켜보던 데일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럼…….”
눈치를 보던 에즈라가 지나가는 순록 무리를 보며 어렵게 입을 뗐다.
“한숨만 자고 나서 출발할까요? 어차피 당장은 출발하기 어렵고. 간단한 조작법은 자고 나서 알려줄게.”
“그래, 잘 생각했어.”
애런을 데일 품으로 넘기고 에즈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2호차로 넘어가서 3번 객실의 문을 열었다.
에즈라는 이미 눈을 반쯤 감고서 딸려왔는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올리자마자 그녀는 포르르 허물어졌다.
“벨, 여기 천국이지 지금? 네가 천사로 보이는 걸 보면 그런 거 같은데. 너 옷 속에 날개 감췄지. 등 안 간지럽니?”
“대충 잤다 싶으면 칼같이 깨울 거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자라, 헛소리 말고.”
침대 끝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던 이불을 탁탁 펴서 에즈라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다가 눈을 감았다.
‘자네.’
자는 줄 알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에즈라가 이불 속에서 쏙 빠져나온 손끝으로 내 옷자락을 감아쥐었다.
“벨.”
“왜 안 자.”
“솔직히 나 짐이잖아. 총도 X같이 못 쏘는데 음식만 축내고……. 그러니까 내가 열차라도 편안히…….”
“안 처자냐?”
“응.”
그제야 그녀는 내 옷을 놓아주었다.
“아, 그리고 너 까먹었더라. 복숭아캔 좀 빨리…….”
“알겠으니까 자!”
“믿고 잔다, 내 천사야. 복숭아다.”
에즈라가 잠든 객실 문을 닫고 나와 기관실로 돌아가자, 애런이 깨어 있었다.
‘하나가 잠들면 하나가 깨어나서 균형을 맞추는 건가?’
그런데 깬 애런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마치 그 모습은, 클럽에서 팔다리 다 내버려 두고 몸으로만 박자를 타는데 그것도 잘 못 해서 엇박을 타는 느낌이랄까.
데일도 애런과 마주 서서 같이 엇박을 타고 있었다.
고장 난 마네킹처럼.
“두 분 뭐, 뭐 하세요?”
그러자 애런이 뒤돌아 밝게 외쳤다.
“열차가 덜컹거리지 않으니까 내가 덜컹거리기야, 벨.”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애는 덜컹거리고 싶어 할 수 있다. 나는 아니지만.
빠르게 이해하고서 몸을 돌리려 했는데.
“왜 벨은 그냥 가?”
“응?”
“열차 안에선 덜컹거리는 게 맞는데.”
“쟤는 꼭 빼더라. 다 빼.”
“…….”
데일이 현란한 목 아이솔레이션을 선보이며 말했다.
어깨 위에서 목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은발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신체 능력이 우월하면 저런 것도 잘하는구나.
“애런, 열차 안에선 꼭 덜컹거려야 해?”
“응.”
“그럼 우리 나갈까? 나가서 순록 구경할까?”
“오, 나갈래!”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가자.”
환호한 애런이 기관실을 나와 1호차 중앙을 걸어갔다.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마감 시간에 술 취한 주정뱅이 같았다.
‘내가 너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나.’
사랑스러운 아이한테 주정뱅이 같다는 비유를 하다니.
그러나 곧, 아이의 뒤를 비틀거리며 따라가는 데일을 보고서 생각을 못박았다.
‘별로다, 역시.’
“애는 애라 그러는 거지만, 그쪽은 어디 고장 난 것처럼 왜 그러는데요.”
“나?”
내 불퉁한 외침에 남자가 날 돌아봤다.
“네가 고장 냈잖아, 가운데.”
“…….”
미안하다, 남자야.
❅
방에서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우리는 열차를 나섰다.
급한 마음에 대충 써서 떨어질 것 같은 애런의 털모자를 잡아서 제대로 씌워주자마자 애런은 순록 무리 쪽으로 달려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귀신같이 덜컹거리는 몸짓을 멈춘 아이를 보면서, 나는 애런이 조금은 원칙주의자라는 생각을 했다.
“애런, 순록한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마. 멀리서만 보기야, 위험하니까.”
“응.”
이럴 땐 말을 잘 듣는다.
순록 무리의 행렬을 구경하는 아이를 두고 주변을 살폈다.
나오기 전 열차에 달린 벽시계는 7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색을 보니 막 동트기 전의 색이다.
‘7시가 넘어서 일출이면 지금은 겨울인가 보네.’
아직은 물러가기 싫은 새벽 어스름이 저쪽 하늘 끝에서 기승을 피웠고, 그 아래로 새카만 침엽수림이 보였다.
그리고 온통 눈뿐인 설원의 한 가운데에 열차가 서 있었다.
나는 손에 등유랜턴을 들고 애런에게로 다가갔다.
금세 붉어진 볼로, 아이는 신기한 듯 순록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아이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벨, 가까이 가면 안 돼?”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럼 멀리서 말이라도 걸면 안 돼?”
아이가 당장이라도 순록을 향해 튀어 나갈까 봐, 나는 장갑 낀 아이의 손을 말아쥐었다.
“그것도 안 돼.”
“되는 게 없어…….”
“그래서 실망했어, 애런?”
“응.”
애런은 부루퉁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등 뒤로, 데일이 준비한 물건을 들고 열차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애런 봐봐.”
“응.”
나는 순록 행렬 중, 몸집이 커다란 순록 옆에 붙어 가는 작은 새끼 순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애런이 말 걸었다가 순록이 놀라서 막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면, 새끼 순록은 가족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아.”
아이는 작게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그렇구나.”
애런은 콧물이 나오는지 코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순록은 멀리서 보기만.”
“응, 맞았어.”
“뭘 보기만 한다는 거야, 보기만 하지 말고 와서 거들어.”
물건을 정리하며 구시렁거리던 데일이 쓱 등 뒤로 다가왔다.
“보기만 하지 말고 한 마리 잡을까? 싱싱한 거 먹고 싶지 않냐? 난 누구 때문에 아파서 보양하고 싶은데.”
그 말에 애런이 화들짝 놀라 두 팔을 저어댔다.
“아, 아아~ 안 돼.”
“꼬맹이 주제에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순록은 보기만!”
애런의 거센 반대에 결국 데일이 꺾였다.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귀에 속삭였다.
“꼬맹이 어제 자기가 먹은 통조림이 살아생전에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냐? 모르지 쟤?”
“아직 그런 거 알려줄 생각 없으니까 닥쳐요.”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