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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64)화 (64/108)

64화

에즈라는 제게 묻는 말이란 걸 알아채고 빠르게 철도 노선도를 펼쳐 들었다.

“가는 길에 역은 수십 개지만 멈추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연료나 식료를 공급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다만 한 군데.”

에즈라는 펼쳐 든 지도의 한 군데를 짚었다.

“여기서 잠시 정차할 거예요. 노선에 있는 역 중에서 가장 큰 부품 창고를 가진 역이죠. 노후된 장치가 있는데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어요. 이곳에 정차해서 예비 부품을 챙겨가려고 해요. 물탱크 보충도 그 때 하고.”

“에즈라, 그럼 그 역에서만 멈추고 계속 달리면 수도까지 얼마나 걸려?”

“이 속도로 멈추지 않으면 5일.”

5일이라, 5일 후면 제국 수도에 진입한다는 거지.

“물론 이 열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말하는 거야.”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데일이 침묵을 깼다.

“이 열차의 노선은 산을 끼고 돌기 때문에 차로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

“수도로 모이는 놈들이 많을 거야. 많은 만큼 마주칠 확률도 점점 높아지지.”

“…….”

“그리고 이 열차엔 마나핵, 식량, 무기, 어떤 새끼들에겐 여자까지, 훔쳐 갈 게 다양하게 있잖아?”

나와 에즈라가 눈빛을 교환했다.

“미리 겁내자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 터질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말입니다.”

데일이 겁먹은 눈이 된 에즈라를 힐긋 보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말을 마친 그가 미련 없이 일어섰다.

“가자, 애런.”

“나 벨이랑 있을 건데.”

“벨은 나랑 있을 건데.”

“그렇담 가야지.”

일어나 엉덩이를 터는 애런을 두고 데일이 내게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보던 에즈라가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데일을 따라 나와 기관실 문을 닫자마자 물었다.

“에즈라랑 인사는 나눴어요?”

“인사를 나눠서 뭐 하는데.”

뭐 하긴, 이제 같이 움직이는 사인데 적어도 서먹한 건 없어야지, 하는 표정으로 보자 그는 듣기 싫다는 얼굴로 테이블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리고 나를 따라 나온 애런을 향해 지시했다.

“꼬맹이 2호차 가서 잠깐 귀 막아.”

“왜!”

“말 안 들으면 강해지는 훈련은 없어.”

“힝.”

그 말에 애런은 처진 어깨로 2호차로 건너갔다.

열차의 사잇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서 그가 입을 뗐다.

“친해지길 바라는 모양인데, 난 저 여자 이름도 궁금하지 않아. 누구 덕분에 이미 알아버렸지만.”

“어차피 같이 가게 된…….”

“함께 움직이다가 저 여자가 당장 이 기차에서 떨어져 죽는다 해도 내 알 바 아냐. 아, 문제는 있겠네. 당장 기차를 운행할 사람이 없어지는 거니.”

“…….”

“벨.”

그가 평소답지 않게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정 주지 마.”

데일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의 입에서 연달아 나온 것은 예상외의 말이었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 같아? 아니, 저 여자를 위해서야.”

“네?”

“최후의 낙원을 찾아도 정착할 생각 따윈 없잖아, 너.”

이 자식이 내 특급 플랜을 어떻게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정작 그는 이런 나를 예상이라도 했는지 푸른 눈이 차갑게 식어만 갔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가식적이니까 치워.”

“아니, 무슨 말을…….”

“단 한 번도 너는 낙원에 도착한 후에 관해서 묻질 않았잖아.”

“그거야…….”

일단 부정하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장소가 최후의 낙원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착만 하고 낙원에서 살 생각을 안 한다는 건 이상하니까.

“그거야, 일단 거기까지 가는 게 중요하니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정착할지는 도착 후에 생각해도 되잖아요.”

“그래?”

“…….”

“그래서야?”

“네.”

힘주어 말했다.

근데 나도 모르게 남자의 시선을 피해 돌아가는 이 망할 눈동자는 어떻게 안 되는구나.

거짓말 XX 어렵네.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데일이 내게서 시선을 거둬갔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눈가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마른세수를 하던 데일은 잠시 제 눈가를 손으로 꾹 덮었다 열었다.

“그래. 됐고 그건.”

그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리 와서 앉아, 얘기 남았으니까.”

“서서 듣도록 하죠.”

“꼬맹이 언제까지 문 앞에서 귀 막고 있게 할래.”

사잇문에 난 창 너머로 우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애런의 까만 정수리가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데일의 옆에 가 앉자,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애런을 찾는 자들, 저번이 끝이 아닐 거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호텔에서 불독을 시켜 애런을 찾던 이들이 누구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를 들들 볶듯 캐물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요.”

“내 감.”

“음.”

“그러니까 아까 이 기차에 훔쳐 갈 게 많으니 조심하자고 했던 말은 진심이라고.”

“그중에서도 애런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 또한 누군가가 애런을 찾아 이 기차를 방문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네 근거는?”

“나도 감.”

그 말에 데일이 나를 보며 가볍게 피식거렸다.

넌지시 웃는 그 웃음에 어쩐지 나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렇다 할 정보가 없으니 감밖에 없잖아요.”

“마찬가지야.”

“불독을 너무 쉽게 죽였던 걸까요? 고문을 좀 해서 뭐라도 불게 했었어야 했나.”

“3분밖에 없는데 고문은.”

“그 3분을 나 가지고 장난치면서 다 보낸 게 누군데요.”

“그럼 장난치고 싶어지는 얼굴로 쳐다보질 말든가.”

“호오.”

너한테 장난치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니, 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데일.”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는데, 팔뚝 아래로 살짝 삐져나온 손가락이 보였다.

“…….”

그의 검지와 중지를 살며시 손에 쥐고 약하게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악수를 했으면 했는데, 끼고 있는 팔짱을 풀어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손가락만 보이길래.

“왜 이러는 거지.”

“데일.”

“…….”

“우리 친한 사이 맞죠?”

“…….”

파란 눈동자를 안에 감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맞다고 대답해요. 난 그렇게 생각하니까.”

“…….”

남자는 날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당신은 날 통조림 정도로 생각하고, 우리가 언제까지 함께할지도 모르겠지만.”

성공해서 함께 낙원에 간다면, 내가 메인 퀘스트를 다 깨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할 것이고.

실패해서 낙원에 가지 못한다면 뭐…… 죽기 전까지 함께할 것이고.

이러나저러나 우린 언젠가 헤어지고, 함께하는 게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헤어질 사이라고 해서 지금부터 미워할 필요는 없잖아요.”

“…….”

“그쪽은 이상한 구석이 많고 입은 저질스럽지만.”

“…….”

“그래도 좋아해요. 좋은 동료야, 당신.”

나는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던 남자의 중지와 검지를 악수하듯 흔들었다.

“그러니까 잘 지내줄 거죠? 나랑 애런이랑, 그리고 이왕이면 에즈라와도.”

그가 내 손 안에 잡혀 있던 제 중지와 검지를 슬그머니 빼갔다.

갑자기 데일은 좌석 위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나는 내 위로 지는 남자의 그림자를 보다가 웅얼거렸다.

“왜요. 뭔데? 무슨 일인데.”

“누워.”

“누워요? 왜요??”

갑자기 왜 난데없이 누우라는 건지.

‘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애런을 데리러 누군가 와버린 것일까.

나는 옆으로 누워서 고개만 살짝 들어 올려 주변 창문을 살폈다.

살피면서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총과 탄창을 꺼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손에 잡혀 올라온 것은 남자의 손목이었다.

‘왜 이래, 이놈.’

“왜 이래요. 안 보이는데 어느 창문이에요?”

그러자 데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다시 말해봐.”

“뭘요.”

“…….”

“아, 뭐냐고요!?”

연이어 데일은 미간을 구겼다.

“네 애정에 책임질 생각이 쥐뿔도 없다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넌.”

‘이 자식이 이렇게 날카로운 놈이었나.’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젠가 헤어질 사이라고 해서 지금부터 미워할 필요는 없잖아요’?”

“…….”

“XX. 요망하네.”

“???”

“요사스럽고.”

“???”

“그만 빼고 나랑 잠이나 자자, 그럴 거면.”

엄마야, 이 새끼가 미쳤나 봐.

그가 내 이마를 간질이는 잔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거둬냈다.

‘뭐지?’

왜 저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저놈이 하는 별 이상한 소리엔 이제 내성이 생겼다고 자신했는데.

이마에 다시 놈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나는 낚싯바늘에 걸린 활어처럼 펄쩍 뛰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윽.”

빠져나오는 건 좋았는데, 빠져나오다 뭔갈 발로 찬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데일이 사지를 웅크리고 있었다.

“통…… 너…… 아…….”

“저, 정당방위! 죄 없어 나!”

그 말을 외치고 나는 에즈라가 있는 기관실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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