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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62)화 (62/108)

62화

-덜컹, 덜컹, 덜컹.

흔들리는 차내에서 이틀을 보냈더니 열차와 한 몸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는 열차가 덜컹거리는지 내가 덜컹거리는지 분간이 안 됐다.

덜컹거림에 몸을 맡긴 채 허공에 뜬 시스템 창을 노려봤다.

[클래스 ‘종의 요정’이 Lv.5 달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Lv.5 달성 전 안내사항을 알려드립니다.]

[클래스 ‘종의 요정’은 Lv.5부터 두 가지 루트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 루트1. 연민의 소극적 활용 루트

▶ 루트2.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개방 시, ‘자기혐오’ 포인트가 적립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 좋다. 물론 시스템도 친절한 시스템이 좋다. 그러니 내게 더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 거니?

“흠.”

현재 내 레벨은 Lv.4.

에즈라가 내 레벨을 4로 올려주고, 호텔에서 함께 싸워준 사람들이 레벨 업 게이지를 쑥쑥 올려준 덕에, 레벨 업 게이지는 거의 끄트머리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안내사항은, Lv.5가 되기도 전인 지금부터 어떤 루트를 선택해 진행할지 충분히 고민해 보라는 소리였다. 근데 설명이 저따위다.

‘저따위로 설명하면서 무슨 고민을 하라는 거야.’

연민의 소극적 루트는 정확히 무슨 루트인지, 적극적 루트는 뭐고 장단점은 무엇인지를 각각 알려줘야 고민이고 나발이고를 할 것이 아닌가.

‘하, 뭘 선택해야 하냐.’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가 좋지 않을까? 소극적과 적극적을 비교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적극적으로 해야 성취할 가능성도 커지니까 말이다.

‘연민의 적극적 활용이란 무엇일까.’

연민 스킬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통조림이 5개 복제될 게 두 배인 10개로 복제된다든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혼자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오랜만에 종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두 가지 루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

종: …….

“그럴 마음이 없어? 그래 그럼 어떤 루트가 내게 더 유리할지, 그거라도 힌트를 줘.”

종: …….

“너는 그냥 나가 죽어. 기차 밖으로 던져버릴까 그냥?”

그러자 종이 은근슬쩍 시스템 창을 띄웠다.

[이후 특정 조건 만족 시, 선택하지 않은 루트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택에 대한 부담이 좀 줄어든다.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종이 뭐라도 답을 내놓기 시작한 이때, 나는 추가로 질문을 한 가지 더 했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있을 땐 뭘 선택하는 게 좋아?”

[지켜야 할 대상을 명확히 해주십시오.

▶ 자신을 지키고 싶을 때 유리한 것: 연민의 소극적 활용 루트

▶ 타인을 지키고 싶을 때 유리한 것: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지켜야 할 대상으로 당연히 내 일행들을 생각하고 한 질문이라 나는 종의 저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저렇게 나눈다면 당연히…….

‘나부터 지켜야지. 내가 있어야 남도 지키지.’

그럼 소극적 루트로 가야 하나?

[타인을 지키고 싶을 때 유리한 것: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

아니야, 아니야…….

나는 순간 이 문제의 돌파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래!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을 지킬 내가 필요해.’

그러니까 소극적은 나만 열심히 지키는 방향으로, 적극적은 나도 내 일행도 열심히 지켜내는 방향으로 스킬을 준다는 거 아닐까?

‘찾았다, 답!’

그러나 답을 찾았음에도 끝까지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 연민의 적극적 활용 루트 개방 시, ‘자기혐오’ 포인트가 적립될 위험이 있습니다.]

자기혐오 포인트가 적립된다는 저 경고가 가슴에 탁 걸렸다.

별거 아니겠지?

여기다 쓸 말은 아니지만, 원래 인생 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잖아.

그러니 더 큰 이득을 취하는 루트에 저런 위험이 달린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흠…….”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더 생각해 보자 여기며 나는 시스템 창을 껐다.

메인 퀘스트에 대한 고민도 해야 했지만 미루자, 머리 아프다.

그러고는 보이는 것이라곤 하얀 설원뿐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좌석에 멍하니 앉아 머리를 식히는데, 기관실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온 에즈라는 남색 차장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 나왔네.”

“어, 나왔지.”

금색 띠로 장식된 각진 제복 모자 아래로 보이는 에즈라의 얼굴은, 울고 울어 수분이 다 말라버린 시든 화초 같았다.

당장 분무기에 물을 담아서 뿌려주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

“얼굴이 그렇게나 엉망이야?”

“어 그러니까, 저기 어…… 어.”

부정은 못 하겠다.

“뭘 그렇게 어렵게 대답해. 나도 다 아는데.”

그리 말하며 에즈라는 제복 상의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풀었다.

에즈라가 기차를 출발시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렵게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헨리와 스칼렛, 그리고 그녀의 죽은 연인과 불독의 마지막에 대하여.

“있잖아, 에즈라. 네 약혼자였던 사람…….”

네가 원망하고 있던 너의 연인.

그 말에 에즈라는 눈에 불을 켰다.

“그때 말한 게 다야. 물을 게 아직도 남았어?”

“아니, 그게 아니라…….”

불독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을 때의 에즈라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녀는 이틀간 기관실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기관실에서 혼자 무엇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었다.

나올 때를 대비해서 분무기를 준비해 뒀어야 하는 건데.

“배는 안 고파?”

“어. 중간중간 나와서 네가 만들어둔 통조림 가져가서 먹었어.”

언제 가져갔지. 아니다. 뭐 그게 중요한가.

먹을 건 먹으면서 울었구나. 잘했다, 잘했어.

그래, 우는 것도 몸 챙겨가며 울어야지.

나는 옆에 앉는 에즈라의 어깨를 툭툭 도닥였다.

“내가 복숭아 통조림만 가져다 먹었거든. 한 개 남은 것 같아서 못 먹고 있는데 만들어줄래?”

“어. 그럴게.”

“오랜만에 복숭아 먹으니까 맛있더라. 우는데 슬퍼서 우는 건지 맛있어서 우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어.”

“좋은 헷갈림이다.”

내 농담에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서 에즈라는 총과 탄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격 연습하게?”

“응.”

조심스레 손에 들린 권총을 분해하던 에즈라가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벨.”

“어.”

“난 이제 안 울어. 우는 건 끝났어.”

진실을 알고 난 지금, 에즈라의 기분이 어떨지 난 잘 모르겠다.

약혼자가 자신을 배신한 게 아니었단 사실이, 그저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기쁘다기보단 오히려 더욱.

“그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울어.”

“아냐, 안 울어.”

에즈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안에서 울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 봤거든?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총알을 닦기로 했어.”

“총알을?”

“응.”

“…….”

눈물을 참는 것과 총알을 닦는 것과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봤는데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울다가 지금 막 밖으로 나온 에즈라니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웬만하면 ‘네 말이 다 맞다!’ 해주고 싶은데, 총알을 닦아서 어떻게 눈물을 멈추겠다는 건지 너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총알을 닦는 단순노동을 반복해서 잡념을 털어버리겠다는 생각인 걸까?

“총알을 닦으면 눈물을 참는 데 도움이 돼?”

질문을 받은 에즈라는 커다란 분홍 눈을 끔벅였다.

“두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아. 우선은…… 아, 잠깐만.”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촉촉이 젖어들었다.

곧 눈물이 떨어질 것같이 차오르는 눈을 부릅뜬 채, 에즈라는 급히 마른 헝겊을 꺼내 총알을 박박 닦기 시작했다.

“우선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참는 것보단 낫고.”

“응. 그렇지.”

에즈라의 손안에서 총알이 코팅된 사과의 겉면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총알을 광 나게 닦아서 쏘면 더 잘 맞지 않을까? 나 총 잘 쏘고 싶어.”

‘에즈라는 약간 미신을 믿는 구석이 있구나!’

총알을 닦는 데 들이는 시간에 총을 한 번 더 쏘는 게 실력 향상에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말을 내뱉기엔, 그녀가 탄알 닦기에 너무 열심이고 진심이었다.

“아이 씨.”

제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자, 총알을 닦는 그녀의 손이 더더욱 빨라졌다.

“…….”

나는 옆에 앉아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테이블보 끄트머리를 손에 쥐었다.

‘뭔가 위로해 주고 싶다.’

내가 탄창에서 탄알 한 개를 집어가자 그녀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나도 닦아줄 테니까 많이 쏴.”

내 손에서 체크 테이블보로 닦임 당하는 탄알을 보며 에즈라는 참아내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아이 씨, 잘 안 되네.”

끝내 그녀는 오만상을 쓰고서, 닦던 총알 위로 눈물을 한 방울 뚝 떨궜다.

“스칼렛도 그렇고 그 자식도 그렇고…… 죽고 지랄이야.”

“그러게.”

“흑, 지랄이라고.”

저럴 줄 알았다. 에즈라의 손에 들린 총알은 결국 눈물 샤워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문지르는 손길을 울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스칼렛.’

친절했던 스칼렛의 웃음이 생각나서, 나도 좀 더 구석구석 열심히 총알을 닦았다.

“있잖아, 내가 너 기차역에 데려갔던 날.”

“응. 크흡.”

에즈라가 코를 먹으며 말을 받았다.

“너 차에 묶어두고 어디 다녀왔잖아. 그때 가져온 물건 중에 레몬사탕도 있었거든. 상냥한 노부부께 받은 거였는데, 입덧에 좋다고 알아서 스칼렛한테 전해주려고 했었어.”

“…….”

에즈라는 잠시 헝겊을 내려놓고 팔뚝으로 얼굴을 비볐다.

팔뚝에 눈물이 잔뜩 묻어났다.

“아이 씨, 진짜! 너 나 울라고 일부러 이래?”

“일부러 이러겠냐! 나도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다고!”

“……어휴, 진짜.”

결국 나도 손에서 체크 테이블보를 잠시 놓고 팔뚝을 적셨다.

옆에서 따라 우는 내 꼬라지를 보던 에즈라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흑, 야 빡빡 닦아. 네가 정성껏 문지른 만큼 내가 맞출 확률이 올라가는 거야.”

“XX. 이거 눈물 참는 데 효과 하나도 없구만 뭘 얼마나 닦아!?”

“내가 눈물이 안 나오고 잘 쏠 때까지 닦아!”

“아니, 그럼 죽을 때까지 닦으란 거야?”

아, 또 너무 솔직해 버렸구나.

내가 말실수를 하고서 고개를 돌리자, 에즈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알겠어. 소리 지르면서 울지 마. 닦을게.”

-덜컹, 덜컹, 덜컹.

기차가 조용히 흔들리며 설원 위를 나아갔다.

에즈라는 기관실을 오래 비울 수 없다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1호차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데일에게 가볼 생각이었다.

이틀간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 데일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가 갑자기 오늘 아침 멀쩡한 얼굴로 자선냄비를 빌려 갔기 때문이었다.

‘뭘 하려고.’

열차는 5호차까지, 총 5대의 차량이 연결돼 있었는데, 1호차는 열차 승무원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승객들을 위한 공간은 2호차부터였다.

2호차엔 일등석을 구매한 승객들을 위한 객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로 귀족들이 머무는 객실이라 그런가.

내부가 호화스럽기 그지없고 널찍널찍한 침대칸이었다.

데일은 어제 두 번째 객실에서 잠을 잤다.

2번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데일, 있어요?”

들리는 소리가 없다. 방에 없나?

“…….”

조금만 더 혼자 내버려 둘까.

그래, 이틀 만에 회복되길 바라는 건 역시 무리겠지.

객실 앞에서 몸을 돌리려는데.

[아이템 ‘자선냄비(크기: 소형)’]

[불우이웃이 당신께 기부를 요청합니다.]

[포인트를 자선냄비에 넣어 대상에게 기부해 보세요.]

‘기부를 요청한다고?’

요청자는 데일일 것이다.

그리고 기부를 요청했다는 것은 능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급한 상황이 생겼다는 것.

‘침입자가 있나? 설마 또 애런을 데려가려는 자들이?’

달리는 열차에 침입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 같지만, 호텔에서 총알을 튕겨내는 각성자를 이미 보지 않았나.

각성자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2호차 내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방금 1호차에서 건너왔으니 그쪽도 아니고.

속으로 기부를 외치며 3호차를 향해 뛰었다.

[대상이 기부를 받았습니다. 기부 대상의 능력치를 일정 시간, 일부분 활성화합니다.]

푸른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며 3호차의 이등석 객실 옆으로 좁게 난 복도를 지나 4호차로 건너갔다.

식당칸 역시나 조용하다.

나는 마지막 5호 차량의 열차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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