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헨리, 많이 아프겠지.’
그렇지 않아도 맞아서 부은 얼굴을 때렸으니 참 아플 것이다.
그러나 스칼렛은 헨리가 돌아오길 바랐다.
“정신 차려, 헨리.”
“…….”
“네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정말 모르겠어? 이건 아니야, 정말……. 이건 아니야, 헨리.”
“아니긴, 스칼렛.”
“아니잖아, 넌. 이런 사람이.”
그 말에 헨리가 옅게 미소지었다.
“모두가 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거더라. 나는 널 지키는 남편이면 돼.”
“태어날 아이는 말이야, 우릴 닮을 거야, 헨리.”
헨리는 스칼렛의 볼록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나. 괜찮을 거야, 그래도. 널 많이 닮는다면.”
“헨리 제발…….”
스칼렛이 제 남편의 가슴팍에 빌 듯이 쓰러졌을 때였다.
❅
“사람들에게 알려요. 밖에 나오지 말고 무조건 방 안에 안전히 있으라고.”
말을 들을 몇몇이 계단으로 사라졌다.
이제 각 층을 돌며 내 말을 전할 것이다.
8층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둘, 계단과 엘리베이터.
3층 무기고를 지키던 놈들은 가볍게 진압했다.
안타까운 점 한 가지는, 껄렁껄렁 식당에 내려왔던 불독 패거리 중 한 놈에게 아래 상황을 들켰다는 것이었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진입로 둘 다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일 것이다.
소식을 뒤늦게 알아 무기고를 털어가진 못했으니, 그들이 가진 무기의 수가 적다면 적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크리스.”
빨간 패딩을 입고 서서 빈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는 그의 후드를 깊게 눌러 씌웠다.
“모자 써. 그게 더 안전해.”
“응.”
그가 어깨에 멘 총을 만지작거렸다.
“벨, 겁 안 나?”
안 나겠냐. 그렇지만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겁나. 겁나고 신나. 곧 그를 구할 거니까. 넌?”
크리스가 후드를 살짝 들어, 어느새 다시 뻣뻣하게 손질한 제 앞머리를 내보였다.
어, 언제 손질한 거냐…….
손질한 머리를 내가 무심하게 후드로 눌렀던 거군.
“예상했던 것보다는 겁 안 나네. 상상할 땐 오줌 지리게 겁났는데.”
“그 말은…….”
나는 한 가닥 삐져나온 크리스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그 말은 적어도 올라가면서 네가 바지에 오줌 지리는 꼴을 볼 걱정은 안 해도 된단 소리네. 참 안심된다.”
“큭큭.”
“가자.”
크리스와 나는 계단으로 진입하는 조였다.
우리보다 한 박자 먼저 진입할 엘리베이터 조를 바라보며 계단으로 향했다.
❅
“놈들이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불독 패거리 중 총을 든 놈은 많지 않았다.
무기고를 다녀오지 못한 탓이다.
“그놈들은 맨주먹만으로도 충분하지.”
몇 명은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소속은 달랐지만 함께 생활한 게 벌써 몇 개월이니, 죽이고 싶진 않았다.
“얌전히 있다가 불독이 한 장이라도 더 챙겨주길 바라고나 있을 것이지 뭐 하러…….”
“우스운 소리 하지 마. 놈들은 총을 들었다.”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온다!”
그 말에, 엘리베이터 근처를 지키던 놈들이 하나둘 일어서서 덜컥거리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띵.
도착했다는 소리가 울리고.
엘리베이터의 유리문 너머로 빨간 외투에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보인다 싶자,
“열어!!”
-탕탕탕탕탕.
좌우로 열리는 문 사이를 향해 외친 남성이 마구 총을 갈겼다.
총에 맞아 실시간으로 너덜너덜해지는 외투에서 튀어나온 흰 솜털이 사방에 흩날렸지만, 뭔가 지나치게 조용했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들이 벌집이 된 사람을 향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뜰 때쯤.
-탕.
“뒤다!!”
알아차렸을 땐 뿌연 연막탄에 이미 시야를 차단당한 후였다.
❅
-탕탕탕탕탕.
문 너머의 총소리가 계단이 있는 이곳까지 울려댔다.
“몹쓸 놈들, 이제 지네들은 낙원에 간다고 아주 엘리베이터를 박살 내는구만.”
도끼를 든 남자가 가득 짜증이 난 얼굴로 문고리를 내려쳤다.
앞으로 하게 될 강제 계단 생활에 벌써 행복해진 모습이었다.
“열렸어!”
문 근처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지 않은 몇몇이 남아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그들이 바로 총구를 디밀었다.
쏘는 것을 망설였지만 상대가 다수라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탕.
쏜 이도 맞은 이도 놀라서 몸을 굳혔다.
맞은 이의 붉은 패딩에 총알이 폭 박혀 있었다.
“아프잖아!”
“뭐, 뭐야?”
총을 맞은 놈이 그대로 들이박자 불독 패거리가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던져!”
-도르르르르.
카펫 위라 얼마 구르지 못한 연막탄에서 곧 연기가 올라왔다.
8층 복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쏴!”
“아냐, 쏘지 마! 아군까지 맞는다고!”
“저놈들 맞아도 멀쩡해!”
“으아아아악.”
빨간 패딩 군단이 복도로 진입해 펜트하우스로 들어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안에서 기다리던 놈들 역시 금방 제압될 것 같았다.
‘이 남자 어디 있는 거야.’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데일을 찾았다.
홀로 닫혀 있는 하얀 문이 보였다.
-벌컥.
“데일!”
그 순간,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러운 얼굴로 날 내려치려는 헨리와 그 옆에 서 있던 스칼렛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었다.
-퍽.
맞겠구나! 생각했는데 방구석에 있던 커다란 무언가가 헨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손을 뒤로 묶인 채 몸을 날린 데일이 헨리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데일! 괜찮아요? 아니, 얼굴이……!”
안 괜찮네!
“어이구, 이게 뭐람! 내가 그쪽한테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얼굴인데!”
긁힌 상처에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럴 리가. 장르가 바뀐 느낌이지 잘생긴 건 똑같을 텐데.”
여전히 허세 찬 말을 하는 걸 보니 죽을 만큼 맞은 건 아니구나.
덜 맞은 모양이다. 아직 여유가 있어.
“근데 왜 여태 갇혀 있던 거예요? 내가 보낸 쪽지랑 냄비 못 받았어요?”
묶인 손을 풀어주며 묻자, 그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뭐? 냄비? 쪽지를 보냈어?”
“인상 험악한 놈이 쪽지가 든 빨간 냄비를 몰래 전했을 텐데요?”
영문 모를 소릴 한다는 표정을 보니 전달이 안 된 모양이었다.
‘매수했다더니 그놈이 가지고 튀었나?’
“쪽지라니, 작별인사라도 보낸 거야?”
“작별인사라뇨. 난 아직 보낼 생각이 없는데, 누가 멋대로 간대.”
데일은 다친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러나 웃느라 휘어졌던 두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헨리와 스칼렛에게 닿자마자 죽어버렸다.
“…….”
아꼈던 옛 동료이면서 현재의 배신자.
데일의 눈은 여전히 그 두 가지 모습을 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배신하는 쪽은 정리를 끝낸 후 통보하지만, 배신당하는 쪽에선 배신당한 상처를 돌보기에도 급급해 마음 정리가 어렵다.
“데일.”
자유로워진 그의 손을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내가 당신한테 보낸 쪽지에 뭐라고 썼는지 알려줄까요?”
“어.”
“데일 캐드는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라.”
“…….”
“애런이 우릴 기다려요.”
그러자 그가 내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까먹을 뻔했네.”
“이런 걸 주기적으로 알려줘야 한다니.”
내게서 떨어진 데일은 곧바로 헨리를 제압했고, 자기가 묶였던 밧줄로 헨리와 스칼렛의 손을 묶기 시작했다.
“대령님, 헨리는 순간 잘못 판단하고 만 거예요. 돌이킬 수 있어요.”
“…….”
“대령님, 헨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헨리는 대령님을 언제나…….”
“스칼렛.”
둘의 등을 맞대게 해서 손을 묶고 난 후, 데일은 조용히 일어섰다.
“호텔을 나가면서 제 오해로 인해 둘을 묶어놨으니 풀어달라 요청하겠습니다.”
“…….”
“떠난 이후에도 두 사람이 호텔에 머무는 데 아무 문제가 없도록 잘 설명할 겁니다.”
“대령님, 대령님…….”
“저도 그땐 어려서 감사의 말을 미처 못 했는데, 집에 초대해 주셨을 때 내어주셨던 감자 스튜, 정말 맛있었습니다.”
“…….”
“안녕히 계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밖은 진압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데일, 불독한테 당한 거 아니에요?”
여기 있을 줄 알았던 불독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가 여기에 있었다면 진압이 이렇게 금방 끝났을 리가 없는데.
“오기 전에 빠져나가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탓에 계단으로 발을 놀렸다.
1층부터 8층까지 연결된 기다란 공간이 두 사람의 발소리에 왕왕 울렸다.
“벨!!”
막 두 층을 내려갔을 때, 위에서 크리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돌발 퀘스트
대상: 크리스
내용: “사라지고 싶다.”]
[돌발 퀘스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우리가 비슷하단 말 취소야!”
“뭐가!”
“정정할게! 네가 나보다 훨씬 용기 있어!”
“…….”
“잘 가라, 벨! 언젠가 반드시 또 보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크리스 옆으로 막 도착한 올리버도 내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