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상대를 도망칠 퇴로도 없는 구석으로 몰아세우는 일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미안, 크리스.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난 봤다.
어제 아침 크리스의 방을 찾았을 때, 너무 멀쩡히 두 다리로 서서 앞머리를 손질하던 그를.
머리를 손질할 때 그는 보통 혼자였을 것이다. 혼자면 다리가 불편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지.
그래서 크리스는 내가 있음에도 연기하는 것을 까먹고, 혼자 있을 때의 습관이 나와버린 것 같았다.
그러자 조용히 크리스의 결정을 기다리던 이들 중 몇 명이 달려들 기세로 날 비난하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크리스가 다 나았냐, 마냐 지껄이는 거야.”
“크리스가 어쩌다 다릴 다치게 됐는지 알아? 자기 사람을 보호하다 대신 다친 거야. 우리 대장은 그런 사람이라고!”
자경단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불독 쪽 사람들을 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크리스가 다치는 바람에 오래 지연된 상태였지만.
몇몇은 날 비난했지만 몇몇은 느낀 바가 있었는지 조용히 크리스의 다리를 슬그머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올리버.”
크리스가 그의 방까지 날 안내했던 남자를 쳐다봤다.
“너도 알고 있었냐.”
“발목 골절이 두 달이 지나도 뼈가 붙질 않으니 80 먹은 노인인 줄 알았다.”
“하, 새끼.”
크리스는 앞머리가 헝클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곤 나를 바라봤다.
“멋진 척 무게를 잡았는데 꼴불견이 됐네.”
“크리스. 꼴불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하지만 절뚝거린다고 해서 선택을 끝까지 미룰 순 없어.”
[내용: “사라지고 싶다.”]
“네 머릿속에 늘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잖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과 두려움 사이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이대로 증발해 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괴로워만 하지.”
“…….”
“무엇이 됐든 선택은 해야 해, 크리스. 그래야 끝나.”
나는 베레모를 벗어 손에 들었다.
길게 땋은 머리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
“미안, 나도 속였어. 난 여자야.”
도움을 청하는 마당에 계속 속이고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말해줄 게 있는데, 혹시 낙원에 데려가 줄 수 있다는 불독의 말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런 생각은 지금 당장 접는 게 좋을 거야.”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하는데!”
“그는 아주 질 나쁜 거짓말쟁이니까. 불독이 사라지면 호수 건너편에 있는 죄수들이 쳐들어올 거라 생각해?”
좌중이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종이를 구겼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수 건너편엔 죄수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텅텅 비었다고.”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이 부정당하자, 역시나 반발이 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여기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네가!”
나는 데일에게 들었던 사실을 그대로 전달했다.
“호텔에 들어온 바로 그 날에, 나와 함께 온 남자가 호수 건너편을 보고 왔으니까. 이 중에서 이보다 최근에 호수 건너편을 보고 온 사람이 있어?”
“…….”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엔 반발 대신 내 말에 동조하는 소리가 일었다.
“그러고 보니까 최근에…… 호텔 건너편에서 뭔갈 본 적이 없어. 저쪽도 이쪽을 두려워해 숨어 지내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예전엔 간간이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는데. 다들 본 적 있어?”
“…….”
“그럼 우린 도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던 거야?”
“불독 말만 믿고 그가 내 친구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그래도 보호받으니까 이해해야지 생각해 왔는데…….”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크리스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벨, 첫날 알았다고?”
“응.”
“근데 왜 지금 말한 거야?”
각오했던 질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저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자.
“내 일이 아니어서.”
“…….”
“난 이곳에서 원하는 사실만 얻고 금방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크리스는 조금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렇지만 이젠 내 일이기도 해. 이제 숨기는 건 없어. 날 돕는 쪽으로 선택해 주면 나도 있는 힘껏 내 능력을 써서 도울게.”
속였네, 마네 말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내가 여자였다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해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어쩔 거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크리스!”
[불우이웃을 발견하였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불우이웃에게 희망의 종소리를 울려주세요.
탐색된 불우이웃: 크리스, 올리버]
역시 그렇구나.
탐색 스킬을 사용하자, 방에 있는 여럿 중 불우이웃으로 탐색된 것은 둘뿐이었다.
‘교류가 없는 대상은…….’
“벨, 보여준다는 능력이 뭐야?”
크리스의 물음에 난 차에서 가져온 무기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놨다.
바로 탐색된 둘을 대상으로 스킬을 쓰려 했다.
[경고: 지금부터는 소모 자원으로 각성자의 생명력을 사용합니다.]
오늘 낮에 에즈라에게 게이지의 파란 부분을 모두 소모한 탓이다.
경고 창이 떴지만 무시하고 스킬을 사용했다.
‘지금 좀 피곤해져서 그렇지,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이게…….”
방에 만들어진 총기류를 보며 저마다 감탄을 토해냈다.
에즈라 앞에서 총알 산더미를 만들어냈을 때보다 더 호들갑스러운 반응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시간 없어요. 설명은 나중에, 크리스…….”
어쩔 수 없다는, 기운 없는 웃음을 짓던 크리스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발목이 다 나았다는 걸 들켰는데, 어떻게 계속 미룰 수 있겠어. 네 형, 아니 그를 구해내자.”
“고마워, 용기 내줘서.”
반갑게 크리스의 손을 맞잡는데 누군가 불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딴 무기 많아 봤자야. 불독은 각성자야. 각성자를 누가 상대할 건데.”
“아, 그건!”
나는 재빨리 패딩 속 주머니를 뒤적여 물건을 꺼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 말해줬어.”
주먹만 한 크기로 작게 줄여놓은 빨간 냄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뭐야, 저건.”
“냄비인데, 내가 쪽지와 이 물건을 갇힌 남자에게 몰래 전달하고 싶은데 가능해?”
“???”
그때 누군가 외쳤다.
“가능해요! 용병 놈 중에 먹을 것만 안겨주면 매수할 수 있는 놈이 있어요.”
나는 쪽지와 자선냄비를 남자에게 넘겼다.
“데일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는 거죠? 8층일까요?”
“맞아요. 꼭대기일 겁니다.”
돌아온 올리버의 대답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때였다.
“그럼 스칼렛이랑 헨리도 8층에 있다고 봐야 하나…….”
“스칼렛은 모르겠지만 헨리는 있겠죠. 당신이 찾는 남자를 팔아먹은 게 그자니까.”
“예?”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되물어 본 질문이었다.
올리버는 충분히 이해 간다는 표정으로 확실한 답을 내어주었다.
“아직 몰랐던 겁니까? 낙원이 찾는 물건을 데일이 가지고 있다며 불독에게 신고한 자가 헨립니다.”
“헨리……가요.”
왜 관용적 표현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순간 정말 머리가 띵했다.
‘왜지? 둘은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나. 헨리 그 자식 첫인상부터 쎄하더라니 이럴 줄 알았다. 언제부터 속였던 것일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제 그자들은 배신자들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머리가 아닌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스칼렛의 환한 미소였다.
자신의 아이 얘길 하며 데일을 칭찬하던 그 미소가 어떻게 거짓일 수가 있지.
믿기지 않는 만큼 배신감이 더 컸다.
그만 발을 떼자. 배신감에 분노하는 시간조차 아깝군.
“올라가죠.”
나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
그 시각, 스칼렛은 8층을 방문했다.
화려한 문을 두드리자, 열리는 문 너머로 그녀를 맞이한 건 거친 사내들이었다.
“남편을 만나러 왔어요.”
저들끼리 숙덕거리던 놈 중 하나가 고개를 까닥이며 손짓했다.
“오른쪽 끝방 가면 보일 거요.”
넓은 공간 군데군데 자릴 잡고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내들을 스칼렛은 빠르게 지나쳤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쿵쿵 뛰는 심장에 한 손을, 다른 한 손으론 제 심장 소리에 더 불안해하는 태아가 머문 배를 감쌌다.
“몰랐어? 유부녀라고.”
“그렇게 보이진 않지.”
어떤 놈은 들릴 듯 말 듯, 어떤 놈은 대놓고 껄떡댔다.
입 안쪽을 깨물며 스칼렛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말대로 맨 끝방, 하얀 방문 앞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헨리가 보였다.
“헨리!”
“스칼렛? 여긴 왜 왔어. 방에 있으랬잖아.”
헨리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호되게 맞았는지 얼굴이 잔뜩 부어올랐다.
반쯤 뜬 눈으로 헨리가 염려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네게 좋은 환경이 아냐, 여긴……. 나중에 자세히 말할게, 우선은.”
“대령님이 우릴 또 버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저들 말로는 대령님이 여기 갇혀 계신다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이고.”
“스칼렛.”
“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뜨려 애쓰며 헨리는 아내 앞에서 웃어 보였다.
“대령님이 말이야…….”
그가 속삭이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 애를 선택했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애 말이야. 그 애만 넘기면 다 같이 낙원에 가서 행복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겠대.”
스칼렛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애런이었다고? 찾는 물건이?
헨리가 슬쩍슬쩍 웃으며 다시 속삭였다.
“내 덕분에 낙원행 티켓을 얻게 되었다고 불독이 우리에게도 티켓을 나눠준댔어. 스칼렛,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낙원에 가서 아무 걱정 없는 환경에서 우리 아이를…….”
-짝.
넓은 공간에 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