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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53)화 (53/108)

53화

시선을 받은 데일의 파란 눈이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맞아, 그거야.”

“어떻게 벌써 알아낸 거예요? 불독이랑 벌써 그런 친분을 쌓았다고?”

“아랫놈 중에 불독에게 가는 물자를 빼돌리는 놈이 있길래 족쳤어. 불독이랑 친분 쌓는 데 공들여봤자 장기적으로 써먹을 것도 아닌데 뭐 해.”

“아하.”

나는 남자의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에 감탄한 후, 떠오른 의문을 끄집어냈다.

“근데 그 홀로그램 박스가 뭐길래.”

“…….”

데일도 그 문제에 관해선 나처럼 의문투성인지라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홀로그램 자체는 많이들 사용하기 때문에 특이할 게 없었다.

그러나 애런이 가진 홀로그램 박스처럼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물건은 절대 흔치 않다고 했다.

만드는 데 비싼 돈이 드는 홀로그램을 누가 애들 교육용으로 찍어낸단 말인가, 돈이 썩어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문뜩 떠오른 생각에 데일의 셔츠 소매 끝을 잡아끌었다.

“애런이요, 엄청 돈 많은 제국의 고위귀족 가문의 아들인 게 아닐까요. 낙원으로 함께 가던 중에 애를 잃어버린 거죠.”

“…….”

“들어봐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낙원의 누군가가 고작 저 홀로그램 박스 하나를 찾겠다고 낙원행 티켓을 주네 어쩌네 할 것 같진 않다고요. 그 사람들 호텔에 비행선 타고 왔다면서요. 아니 무슨 비행선 연료값이 더 나가겠다. 돈이 썩어나게 많은 사람이다? 그럼 많은 돈 들여서 다시 만들면 되는 거 아님?”

“그래서.”

“그래서 내 결론이 뭐냐.”

어느새 데일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집중해서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낙원의 누군가가 찾는 물건은, 아니 사람은 애런일 확률이 높아요. 홀로그램 박스를 가지고 있던 애런이요.”

말을 끝내자 데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결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 진짜 찾는 사람이 애런이라면, 저들이 굳이 애런 대신 물건을 내세운 이유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을 거야. 찾는 게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면 찾아주는 쪽에서는 그에 합당하게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하지만?”

“찾는 게 물건이라고 말해버리면, 물건을 찾아주는 이들이 아이에게서 물건만 빼앗고 아이는 제거해 버릴 가능성이 커. 찾아 헤맬 정도로 소중한 아이가 살해당할 위협이 커지는 선택을 할까?”

“그러네, 안 하지. 나라면 애가 위험에 처할 만한 선택은 안 해요.”

데일의 추론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애런은 아니란 말인가.

“어쨌든 그들이 찾는다는 물건이 우리 손에 있으니.”

“어, 잠깐만요.”

[수집된 돌발 퀘스트

대상: 불독

내용: “물건을 찾아야 해. 그래야 낙원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퀘스트 해야지! 그나마 클리어 가능성을 보이는 것은 불독과 스칼렛 퀘 뿐인데.

에즈라 퀘스트도 추측 가는 바가 있긴 하지만, 확신할 수 없고.

‘메인 퀘스트 진행을 못 하면 다 소용없어.’

데일에게 돌발 퀘스트의 일부를 설명했더니 그는 대충 이해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네 능력이 좋아질 거라고?”

“옙, 그렇습니다.”

내일 데일이 속한 전투조는 우리가 차를 세워둔 곳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고 했다.

‘데일이 갈 수 없으니 내가 가서 가져와야지.’

“야, 통조림.”

골똘히 내일의 일정을 짜는데 그가 코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은 데를!”

“그러니까, 맞았다며.”

아니 알면서 때렸단 말이야? 이 악마 같은 놈.

애런한테 들었나 보구나.

나는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캐릭터로 낙인찍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매우 쪽팔린 일이다.

“정확히는 맞을 뻔한 거고, 때린 건 내가 때렸어요.”

“어딜 어떻게 어느 정도의 세기로 때렸는데.”

데일은 대상을 타격할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원했다.

보통 동거인이 싸우고 들어오면 왜 싸웠는지 이유를 물어보지 않나?

“애런한테 되지도 않는 말을 하길래, 오른손으로 뺨을 쳤는데, 화가 나서 엄청 세게 때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상대는 고개가 완전히 반대쪽으로 꺾여 돌아갔어요.”

“걘 아파서 찍소리도 못했겠네.”

“그렇죠. 손바닥 자국이 빨갛게 날 정도였으니까.”

“음.”

그는 습관처럼 턱을 문질러대며 오래도록 날 쳐다봤다.

중간에 자꾸 “음.”, “으음.” 같은 추임새는 왜 끼워 넣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데일이.

‘뭐야?’

내 머리를 툭 눌러오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이 남자의 위로라는 것인가?

그러나 허공에 뜬 것은.

[대상이 행복해합니다.

획득한 행복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라는 창이었다.

‘아까 그것도 이 자식이었네.’

뭐 어쨌거나.

나는 레벨 업에 가까워지는 게이지를 바라보았다.

어떤 식으로든 업하면 좋은 거지.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많이 행복해하렴.

호텔 3일 차의 날이 밝았다.

데일은 아침부터 전투조로 끌려갔고 나는 애런의 손을 잡고 쉼터로 향했다.

쉼터엔 어제와 같이 스칼렛과 아이들이, 그리고 에즈라가 있었다.

나한테 맞아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로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에즈라는 얼굴이 매우 수척했다.

나를 본 그녀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칼렛, 잘 잤어요?”

“벨!”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르며, 스칼렛은 환한 미소를 함빡 지었다.

“덕분에 너무 잘 먹었어요. 정말이지…….”

어제 내가 스칼렛에게 주고 간 각종 통조림 이야기였다.

“요즘 매일 생선 비린내만 맡다가 오랜만에 과일을 먹으니까 정말 살 것 같더라구요. 어제처럼 구역질 안 하고 배부르게 먹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그래도 과일만 먹어선 부족할 텐데요.”

“그렇긴 한데…….”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스칼렛 혹시 필요한 물건 없어요? 아이 용품이라든지, 아니면 산모를 위해 필요한 것들도 좋구요.”

홀로그램 박스를 가져오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갈 명분이 필요했다.

스칼렛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곧장 일어나 애런의 손을 잡았다.

‘혹시 모르니까.’

스칼렛이 봐준다 해도 애런을 호텔 안에 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에즈라.”

“……??”

왜 또 말을 거냐는 아니꼬운 표정이었다.

“일어나.”

“야, 나 좀 냅…….”

“호텔 밖으로 나갈 거야. 너 이곳 출신이라며.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그러자 불만 가득한 얼굴이던 에즈라는 조용히 일어서 나를 따라나섰다.

애먹을 줄 알았던 에즈라는 쉽게 일으켰고, 문제는 호텔 입구를 지키는 이들이었다.

“밖에 나가야 해서 차를 대여해 달라고? 왜 나가야 하는데.”

어제 아침 에즈라를 막아섰던 친구들이었다.

얘들아, 어제 우리 암묵적 초콜릿 동맹 맺은 거 아니었니?

아니면 한 개론 부족했나, 허나 내가 아무 대가 없이 초콜릿을 백만 개씩 찍어낼 수 있다고 해도 또 주고 싶진 않았다.

“쉼터에 임신부가 있는 건 알아? 그리고 그 임신부가 곧 막달인데 분유나 아기용품이 전혀 준비가 안 된 것도 알아? 너희 신생아한테 생선 먹일래?”

입구 지킴이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건 그렇네.”

“그러게.”

“그래, 몰랐으니까 왜 나가냐고 물었겠지. 이해해. 이제 알았으니 비키자.”

그러나 놈들은 한 차례 더 앞길을 막아섰다.

“그건 알겠는데 옆에 에즈라는 왜 데려가는데.”

그냥 한 번에 보내주라 좀.

“친구야 내가 여기 출신이 아니라 지리를 몰라. 상점에 가서 한 번에 분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옆에 이 지역 잘 아는 사람을 태우고 가야 하지 않겠니? 아니면 나 혼자 상점 찾다 오늘 하루가 다 가서 내일도 나가야 할까?”

또 눈빛을 교환하던 놈들이 드디어 앞을 열었다.

나가기 전 한 놈이 내게 속삭였다.

“에즈라가 도망치게 두면 네 책임이다.”

“숙지하지.”

“차 키는 주차장에서 받아가고, 저녁까지는 들어와라.”

“어, 그래. 수고.”

밖으로 나오자 날씨가 되게 따듯했다. 바람도 많이 불지 않고.

그리하여 주차장에 주차된 다양한 차 중, 내가 고른 차는 핑크색 컨버터블이었다.

“와, 차 색상 봐. 이런 차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분홍색 파마머리의 에즈라와 분홍색 차는 꽤나 잘 어울렸다.

화사한 색상에 어울리지 않게 에즈라의 표정은 뚱하기 그지없었지만.

차 키를 꽂으며 에즈라가 앉은 조수석을 살폈다.

“날씨가 따듯하긴 해도 지붕 열고 타긴 추울 거야.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표정은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라는 듯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는 뒷좌석에 탄 애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애런 생각은 어때?”

“내 생각은 저 나쁜 누나랑 같이 가는 거 반대야.”

질문은 무시하고 자기주장을 펼치다니.

애런의 자기주장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것 같다.

아이의 주장을 들어줄 수 없어서, 나는 그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애런 미안. 근데 나쁜 누나도 다 쓸 데가 있어서.”

“…….”

“개똥도 약에 쓴다는 말이 있거든.”

그러자 창밖만 보던 에즈라가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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