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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52)화 (52/108)

52화

시간이 늦어서, 아마 잠들어 있거나 잠들기 직전이지 앉을까 했는데, 방으로 돌아왔을 때 두 남자는 완전히 깨어 있었다.

-철컥.

문을 열자마자 입에 칫솔을 문 애런이 달려 나와 나를 맞이했고, 데일은 그 뒤에 똑같이 칫솔을 물고 서 있었다.

“베!”

“어, 와냐. 이찍이찍 다느랴. 며시냐.”

칫솔을 물고서 새는 발음으로 우물거리는 둘을 보고 있자니.

“…….”

코끝이 찡하고 눈앞이 흐려져, 현관에 서서 이를 닦는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박았다.

쿵쿵쿵, 일정한 주기로 뛰는 심장 박동 소리와 높은 체온이 주는 안정 효과란 꽤 효과가 좋은 것 같다.

더 크게, 더 잘 듣고 싶어서 남자의 가슴을 두 팔로 끌어안자.

“므냐.”

어김없이 비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럴 때 좋은 형이라면 동생을 말없이 안아주는 거예요.”

“아나주느 그야 어렷지 안치. 근데 오애 이르냐그.”

“데일, 나 떠날 생각 하지 말아요. 통조림이랑 초콜릿 열심히 찍어내 줄 테니까 나랑 애런 옆에 있어요.”

아, XX 화가 난다, 화가 난다고!

그 여자애랑 내 상황이 고작 한 끗 차이란 게 말이다.

“너…… 나 동정하니?”

동정하지! 신경 쓰인다고! 어떻게 안 그래! 왜냐면 네 모습은, 까딱하면 나였을 수도 있는 모습인데. 앞으로도 언제든 내가 될 수 있는.

내가 나를 지킬 힘이 없어서, 타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게 똑같은데 어떻게 모른 척이 돼.

불행한 버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 눈을 뗄 수가 있겠냐?

“전투 능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쪽한테 의탁해야 하지만…… 근데 솔직히 이런 세계면 내 능력이 더 우위 아닌가.”

“…….”

“적을 열심히 무찔러봤자 밥 못 구하면 굶어 죽는 것밖에 더 있어요? 솔직히 내 능력이 장땡 아니냐고요.”

“……베에?”

“근데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냐고! 혹시라도 당신이 나랑 애런을 떠나지는 않을까, 오늘 하루 종일 전전긍긍했다구요. 나한텐 아직 나도 애런도 지킬 능력이 없는데,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야야.”

그가 제 가슴에 매미처럼 붙어서 바락바락 소리치는 나를 팔로 밀어내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베에…….”

나도 모르게 너무 폭주해 버렸나.

가슴팍에서 막 붙었다 떨어진 이마를 문지르며 옆을 보자, 나를 바라보는 애런의 눈이 동그래진 게 퍽 놀란 듯싶었다.

아, 안 돼 애런. 입 벌리지 마. 칫솔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으, 매아.”

“매워?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폭주하는 바람에, 양치질하다 폭탄 맞은 애런은 입도 헹구지 못한 채 내 곁에 벌서듯 있었다.

내가 슬퍼 보이니 옆을 떠나지 못한 거겠지.

누구는 벌써 입을 헹구러 가셨지만.

“애런 입 맵지? 형 따라가서 헹구고 와.”

욕실로 애런의 등을 떠밀자, 입을 헹구고 나온 데일이 자연스럽게 애런을 넘겨받으며 나를 쳐다봤다.

“…….”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쟤를 어떻게 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셔.”

데일이 건넨 건 하얀 머그잔이었다.

‘아니 이 익숙한 단 냄새는?’

잔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서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설마 핫초코예요? 우유를 어디서, 아니 어떻게 구해서??”

“형이 식당에서 훔쳤대, 벨.”

데일이 대각선에 놓인 소파에 앉아 말을 얹었다.

“식당에 전지분유가 있더라고.”

아이의 교육상 훔친 분말 우유에 탄 핫초코를 너무 맛있게 들이켜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잘했네, 잘했어.”

나는 데일의 도둑질을 칭찬하며 따듯한 핫초코를 한입 호로록 마셨다.

“와.”

이거지. 몸도 마음도 노곤노곤 풀려버린다고.

“남은 거 있죠?”

“어.”

“둘은 마셨어요?”

“어, 너 오기 전에.”

“그랬구나.”

머그잔을 쥔 손바닥에 뜨거운 음료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꿀꺽꿀꺽 넘기기엔 아직 뜨거운 온도였지만 난 지금을 딱 좋아한다. 조금 뜨겁다 싶은 음료를 호호 불며 마시는 것.

“…….”

근처에 앉은 데일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코에 난, 손톱에 긁힌 상처가 괜스레 따끔따끔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상체를 굽혀 턱을 괸 그는, 내가 머그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내 동생들이 무슨 일일까. 막내는 둘째 형이 자길 버리면 어떡하냐며 울고.”

“너 그랬어?”

애런이 그런 말을 했다고? 놀라서 채근하듯 따져 물었다.

‘아니, 꼬맹이 이 배신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너 내가 뭐랬어. 그런 일은 없다고 그랬지.”

“아니이…….”

우물쭈물하는 아이 위로 한층 커진 데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둘째는 내가 자길 버리면 어떡하냐고 낑낑대고. 우리 집 동생들 무슨 일이지?”

지금 혼나는 건가? 어쩐지 매우 잘못한 기분이었다.

“잘 들어.”

데일은 잠깐 뜸을 들였다.

“형님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알겠냐? 왜 이렇게 단순한 걸 말로 해줘야 하냐. 막내는 어리니까 그렇다 치고 둘째, 네가 문제야 네가.”

“…….”

음, 왠지 항변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그가 상황 종료를 알렸다.

“알아먹었냐? 됐으면 해산.”

해산이란 말이 들리자마자 나는 애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내가 널 왜 버려,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

“그럼 벨은 왜 그런 걱정해? 형은 우리 옆에 있을 건데.”

나는 쓱 고개를 돌려 데일을 봤다.

저놈이랑 나랑 같냐, 저 새낀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단 말이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눈으로 말하는 거 다 들린다~ 둘째야.”

“…….”

남자를 바라보다 나는 괜한 애런의 머리를 꾹 눌렀다.

“앞으로 그런 생각 금지야.”

“응.”

애런과 함께 방에 들어가려는데 그가 내게 건네준, 다 마시고 빈 머그잔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님은 어디 가지 않을 거라니.’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을 때보다,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번뜩 떠오른 생각에 두 남자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근데 아까 누구예요?”

“뭐가.”

“아까 누가 행복해했잖아요. 행복했던 사람 손 들어보세요.”

“…….”

“없어요? 누굽니까. 들어봐요, 손을.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아무도 안 들어, 분명히 있는데.

그러자 데일이, 한가득 졸린 눈으로 방문 앞에 서서 반쯤 졸고 있는 애런에게 말했다.

“원래도 이상하지만, 오늘 특히나 이상하지 않냐, 쟤?”

“어? 으어, 어어…….”

“애한테 잠결에 동의 받아내지 말아요.”

안 되겠다. 애런이 너무 졸려 보였다. 그 자리에서 서서 잘 것만 같았다. 애부터 눕혀야지.

“들어가서 자자, 애런.”

“웅…….”

아이를 침대에 눕히려 방에 들어가는데, 데일이 나를 불렀다.

“애런 눕히고 나와, 할 얘기 있으니까.”

“불독이 찾는 물건은 우리한테 있어.”

“에?”

데일의 말에 바보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확히는 우리 차에.”

호텔에 들어오기 전, 호텔에 들어가려면 물건을 다 털리고 들어가야 한단 말에 우리는 가진 물건 중 일부만 챙기고 정작 중요한 물건은 차에 두고 차를 숨기고 들어왔다.

차에 특별한 물건이 뭐가 있었지. 무기와 먹을 것들, 그리고.

“애런의 홀로그램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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