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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51)화 (51/108)

51화

“…….”

아이는 벌써 꽤나 어른스럽다. 데일은 그런 애런을 귀엽게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근데 걜 누가 때렸다고?”

“분홍 머리 여자.”

“걔가 정말 가만히 있었어?”

때리는데 얌전히 맞고 있는 통조림은 상상이 안 가는데.

“아니, 나중에 뺨 때렸어. 분홍 머리 여자 고개가 이렇게 돌아갔어.”

“아…….”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만족스럽지?’

벨이 상대를 때렸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속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하더니, 끝에 가서 결국 거하게 뺨을 때렸다는 말을 듣자 체한 속이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역시 내 통조림은 어디에 내놔도 만만치 않군.’

“음, 그렇지. 그래야지.”

마지막에 때린 놈이 이긴 거다, 통조림, 그러니 통조림 네가 이긴 거다!

데일은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렸다.

[지정된 불우이웃 중 한 명이 행복해합니다.

획득한 행복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에에?’

난데없이 공중에 떠버린 시스템 창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뭐지? 왜 뜬 거지??

누가 행복해하는데??

가끔 이렇게 대상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포인트가 쌓이곤 했지만, 방금은 유독 기분이 이상했다.

온몸이 오싹했다고 해야 하나.

‘애런인가?’

아마 애런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포인트를 쑥쑥 채워주는 일등공신은 애런이었으니까.

오늘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애런이 우울해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무언가에 행복해하고 있다니 참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잠잠한 걸 보면 에즈라는 아직 입을 다물고 있는 걸까.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내려가는 버튼을 눌러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내게 그리 세차게 뺨따귀를 맞았으니 지나가는 아무나 붙들고 ‘쟤 여자야! 우릴 속였어!’를 시전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조용한 것일까.

‘XX, 조용하니까 더 무섭다…….’

이미 변명까지 생각해 놨는데.

여자인 게 밝혀지면 뭐, 앞으로 밖에 나갈 때 제재 좀 당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여자인 걸 속여서 누굴 죽이길 했어, 뭘 했어. 받은 물건은 돌려주면 그만이야, 아쉽지 않다고!

‘근데 엘리베이터 왜 안 와?’

버튼을 아까 눌러놨는데, 아래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고장인가?

하는 수 없이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헨리와 스칼렛이 묵는 방은 4층이니 한 층만 내려가면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방이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게 편하지만 망할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 4층의 푹신한 카펫을 밟는데.

“불독한테 전해줘.”

오늘 하루 내내 들었던 목소리라 단박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에즈라와 남자 한 명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뭘 전해줘.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전해달라는 말인가?’

저 미친X이 자기가 먼저 잘못한 건 생각도 안 하고 기어이 말을 하려고!

푹신한 카펫이 내 발소리를 잡아먹는 것에 감사하며 일단 조용히 거리를 좁혔다.

귀족들이 머물렀다던 고급 호텔의 복도엔 별 이상한 동상과 장식이 넘쳐났다.

나는 내 몸을 가리고도 남는 큰 장식품 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어차피 이 호텔의 룰이란 거 불독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잖아.”

“…….”

“해본 적 없지만 기회를 줬으면 한다고 전해줘. 물론 그 일 때문에 눈에 난 건 알고 있는데…….”

“너 진짜 몰라서 그러냐?”

늦은 시각이라 줄여놓은 호텔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상대를 한심하게 보는 남자의 표정이 잘 보였다.

“불독이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것 같아? 그랬으면 진작 널 호텔 밖으로 내보냈겠지. 자기 마음 좀 알아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거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에즈라의 표정은 속이 거하게 메스꺼운 걸 꾹꾹 참아내는 것만 같았다.

“자기 마음 좀 알아달라고 신호? 사람이 하루에 먹어야 할 양이 있는데 식사를 줄이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보겠다고 하니까 다 못 하게 하면서 계속 배 곯게 하는 거? 그걸 말하는 거야?”

“너 좀 똑똑해져라.”

“…….”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나가면 되잖아. 나가서 네 몸 지키면서 혼자 살 수 있어? 그걸 아니까 안 나가고 총을 쏘게 해달라는 둥 말도 안 되는 말이나 하면서 붙어 있는 거 아냐? 불독이 네가 좋다잖아. 편히 살 수 있는데 왜 마다하고 이 고집인데.”

“…….”

나는 에즈란지 뭔지 저 애가 싫다. 쟤가 오늘 내 새끼한테 지껄인 말만 생각하면 지금도 열이 뻗친다.

뺨 한 대도 부족했다.

근데 저 애 앞에서 똥 같은 말을 씨부렁거리는 저 새끼와 저 새끼를 조종하는 8층에 있는 새끼가 방금 더 싫어졌다.

‘그렇게 된 거였구만.’

사람의 생존을 빌미로 가스라이팅이나 하는 거지 같은 새끼들 소굴이었네, 여기가.

“그러니까 쫌!”

“왜 이래, 놔!”

왜 바로 아래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안 올라오나 했더니, 문틈에 뭔갈 놔둬서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켜 놓은 거였다.

남자가 억센 팔로 에즈라를 붙들고 열린 엘리베이터를 향해 질질 끌고 가려들었다.

‘죽일까, 저 새끼.’

총이 있긴 한데, 아…… 죽이면 좀 복잡해진다.

죽은 놈을 찾는 놈이 생길 거 아냐. 그럼 또 죽여야 한다고.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가, 복도 끝에서 이제 막 둘을 발견한 사람처럼 해맑게 뛰어갔다.

“오, 아직 안 주무셨네요?”

“뭐, 뭐야, 넌.”

“저 모르시나요, 화제의 신입.”

빙긋 웃으며 초콜릿을 들어 보였다.

“야바위에서 상품을 잔뜩 따버린 그 유명한 신입, 바로 저거든요.”

“그런데?”

“하하하.”

초콜릿을 옷에 쓱쓱 문질러 남자의 앞에 내밀자, 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수에서 식량 조달이 되는 덕에 다들 굶는 일은 없지만, 통조림이나 초콜릿 같은 식품은 보통은 아무도 손을 못 댄다 들었다.

불독은 아니겠지만.

“왜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마음의 표현이죠.”

“상품으로 받은 걸 다 돌렸단 말이야?”

그는 자기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는 나를 의아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네! 못 들으셨어요? 그 입구 지키는 분들도 드렸는데?”

“…….”

“다는 아니구, 저도 영리하거든요~ 딱 보면 호텔 잡고 있는 분들이 보이니까……. 하하하, 아시죠?”

“그래? 그렇다면 뭐…….”

그제야 남자는 에즈라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초콜릿을 건네받았다.

“근데 이 늦은 시각에 두 분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에즈라는 복도에 깔린 카펫만 죽어라 노려봤다.

“어흐~ 그런 사이시구나.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전해드렸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저 8층에 볼일이 있는데 이 물건 치우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될까요?”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예민하게 한 톤 올랐다.

“8층에? 왜!?”

“하하하.”

나는 원래 스칼렛에게 주려던 물건이 담긴 가방을 가리켰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호텔 잡고 있는 분들 딱 보인다고. 그럼 그분께도 당연히 드려야죠.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 하시던 거 하세요. 예~”

엘리베이터에 타 문을 닫으려 하자, 그가 거칠게 닫히려는 문을 막고 날 끌어내렸다.

“아니, 왜 이러실까. 좋은 분위기 다 깨지겠네.”

“너 8층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었어? 그리고 나랑 쟤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괜한 소문 퍼트리지 마. 만약 불독 귀에 이상한 얘기가 들어간다면 다 네가 말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조심해, 알겠어?”

“아, 그런 거구나. 예 알겠습니다.”

“…….”

“진짜 알겠다니까요. 초콜릿 맛있게 드십쇼. 제 마음입니다~”

끝까지 미심쩍은 눈길로 날 쳐다보던 남자가 툴툴거리며 엘리베이터에 타 사라지자, 스산한 복도엔 나와 에즈라만이 남아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내가 때린 손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거 참, 뻘쭘하구만.

“그렇구나. 불독인지 뭐시긴지 하는 새끼는 이런 거 필요 없을 거 아냐.”

나는 가방에서 통조림 하나를 꺼내 에즈라 앞에 내밀었다.

“그럼 굳이 불독한테 줄 필요는 없고, 너 먹을래?”

그러자 에즈라는 아주 혐오스럽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맞을 짓을 한 건 넌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억울하게 맞은 줄 알겠어.”

“너…… 다 들었지?”

“들었으니까 이 쑈를 했지.”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숨을 흡 들이쉰 그녀가 고개를 돌린 채 숨을 골랐다.

“너…… 나 동정하니?”

얘가 왜 이렇게 뻔한 질문만 해댈까. 고민할 것도 없는 질문이라 바로 답을 주었다.

“어. 동정하지. 너 동정 받을 만한 상황이잖아.”

“네가 뭔데.”

“이건 내 추측인데, 어 그래, 추측. 내가 널 너무 좋게 본 걸 수도 있는데…….”

“…….”

“너 내가 여자라는 거 호텔에 말할 생각 없지. 입 다물어줄 생각이잖아, 안 그래?”

에즈라의 시선은, 눈앞의 상대를 날 세워 노려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지 자꾸만 뭉개졌다.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점점 흐려지는 시선이 못마땅한지, 한참 날 바라보던 그녀가 돌아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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