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XX! X 같은 새끼들아!! 내보내 달라고 죽어버릴 거니까!”
아니,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미우면 가둬두고 괴롭힐 게 아니라 내보내면 되잖아.
무슨 심보야? 인도적으로 여자 혼자 나가서 뒤지는 꼴은 못 보겠지만 그런 행동을 했으니 괴롭히긴 해야겠다, 뭐 그런 거야? 이런,
“미친X놈들. 아…….”
옆을 보니 스칼렛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스칼렛을 옆에 두고 너무 쌍욕을 지껄였구나.
“미안해요, 스칼렛. 아가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못 들은 걸로 해주겠니?”
배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아이가 발을 뻥 찼다. 한 대 맞았으니 사과를 받아준 거라 여기면 되는 걸까.
“아, 스칼렛! 생선은 비린내 때문에 못 먹고, 다른 것도 그래요? 방에 통조림 종류가 여럿 있는데, 스칼렛이 먹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요? 이따 방으로 가져갈게요.”
“고마워요, 벨.”
스칼렛은 어쩐지 그새 더 핼쑥해진 듯한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대령님이랑 벨과 함께하게 되어서요. 아이를 낳으면 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될 텐데, 마음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헨리가 옆에서 힘이 되어주지만…… 좋은 사람은 옆에 많을수록 힘이 되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요, 벨.”
“아.”
사실 나는 손바닥에 난 땀을 닦는 척하며 그녀와의 악수를 망설였다.
이곳에 오래……. 그래, 스칼렛은 출산이 코앞이다. 낙원행 티켓을 얻을 수 있을지와 상관없이 이곳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이동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여긴 물자도 넉넉하고.
“저도요. 잘 부탁해요, 스칼렛.”
어색하게 웃으며 스칼렛의 손을 맞잡았다.
‘만약 내가 호텔을 빨리 떠나려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데일은…….’
나와 애런 옆에 있어줄까. 난 그가 필요한데. 내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난 이곳에 묶여 있게 되는 건가?
❅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데일은 둘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찰칵 열리는 문소리에 호다닥 달려 나온 것은 애런뿐이었다.
“애런, 벨은.”
“벨은 통조림이랑 간식 이만큼 챙겨서 나갔어. 스칼렛 준다고 그랬어. 방금 나갔는데 못 봤어?”
자신도 4층에서 올라왔는데 길이 엇갈렸나 보군, 그리 생각하며 데일은 테이블에서 의자를 빼 앉았다.
“…….”
“저녁 먹고 방에서 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네. 그래요.”
약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여자의 얼굴이 데일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걔 얼굴이 왜 그 모양이었을까.
자기가 없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던 것만은 확실했다.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지금 제 주위를 맴도는 애런만 봐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음.”
눈을 들여다보면 대충 보이는데, 저 눈은 놀아달라는 눈빛은 아니었다.
“애런, 앉아봐.”
그가 턱짓하자, 아이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의자로 깡총 뛰어올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데일은 애런이 앉은 의자를 자신의 앞으로 쭉 끌어당겼다.
“말해, 형한테 하고 싶은 말 있잖아.”
“흐…… 흐아아앙.”
“??”
말하라고 했더니 대뜸 울음부터 터트려버리는 애런 때문에 데일은 조금 당황했지만 급할 거 있나.
그는 애런이 진정될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기로 했다.
어느 정도 눈물을 쏟아내고 나자, 아이는 조금 진정돼 보였다.
“왜 울었어? 너도 분해서 울었어?”
“흐윽, 응?”
“내가 아는 누구는 분하면 울길래, 너도 그런가 했다.”
아이가 누구 때문에 분해서 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던져본 말이었는데, 애런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응, 분해서 울었어.”
“분해? 누가 널 괴롭혔어?”
“나한테 분해서.”
쿨럭, 질문하고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잠깐의 틈을 타 목을 축이던 데일이 그만 사레에 들려 쿨럭댔다.
“컥, 너한테?”
그러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애런이,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민다는 얼굴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침에 벨이 뺨을 맞았는데…….”
“뺨을 맞았어??”
걔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타입이었나. 때리고 다니면 모를까.
데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자, 애런이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아니, 뺨을 맞은 줄 알았는데.”
어, 그렇겠지. 데일이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어. 걔가 때렸구나, 상대를.”
“아니이…… 아이참. 가만히 좀 들어봐, 형.”
“…….”
가끔씩 느꼈는데, 애런도 성격이 마냥 순둥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래, 좋은 거지, 좋은 거. 데일은 입을 다물고 아이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벨이 뺨을 맞은 건 아닌데 형, 나는 그때 벨이 진짜 뺨을 맞은 줄 알았거든? 근데 벨을 구하러 바로 못 나갔어. 그 뒤에 몸이 움직여서 나가긴 했는데. 근데, 그래도……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용기 없는 나한테 분해.”
많은 눈물을 쏟은 게 방금인데, 커다란 눈망울에 다시 또 닭똥 같은 눈물방울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데일은 엄지로 애런의 눈가를 쓱 훔쳐냈다.
“원래 아이는 어른 뒤에 잘 숨어 있는 게 할 일이야. 분할 일 아니야, 애런.”
“하, 하지만……!”
“하지만 뭐.”
분하고, 속상하고, 걱정스러운 모든 감정이 뒤섞여 애런은 어찌해야 하는지 감도 오질 않았다.
방법을 모르는 아이는 눈물만 흘릴 뿐이다.
“내가 벨이랑 형이랑 다 소중하다고 그랬는데에……. 가족도 아닌데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랬어. 피, 필요 없어지면 서로 버린다고, 흑. 그게 당연한 거라고……. 나는 벨이 어려울 때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데 벨이 나 버리면 어떡해. 흐아앙.”
줄줄줄 늘어놓는 아이의 말을 기가 찬 얼굴로 듣던 데일은, 자신이 앉은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걔가 지금 이 말 들으면 속상해한다.”
여자가 속상해할 거란 말에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 자신을 바라봤다.
“좋아. 이거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거 아닌데, 특별히 알려준다.”
데일은 애런 앞으로 내민 제 손을 꽉 쥐어 주먹을 만들어 보였다.
“앞으로 또 그런 순간이 오면, 이렇게 해봐.”
“이렇게?”
애런이 주먹 쥔 데일의 손을 보며 제 작은 손을 웅크렸다.
“어, 주먹 쥐어.”
“이제 이걸로 때려?”
“아니, 힘만 줘.”
데일을 향해 제 두 주먹을 호기롭게 들어 올렸던 애런이 다소 실망감을 드러냈다.
“왜 힘만 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주먹을 꽉 쥐는 거야. 그럼 주먹이 단단해지고 커져서 나중에 형 주먹처럼 되는 거야.”
“정말 주먹에 힘주는 것만으로도 주먹이 형처럼 커져?”
“어.”
“데일 형은 내가 바본 줄 알아?”
“…….”
데일은 턱을 매만졌다.
자기 입으로 두 살 이랬으면 두 살처럼 행동해야지, 이놈.
“결국 형처럼 커야 한다는 게 방법이네.”
“…….”
“형처럼 되면, 벨이 계속 좋아해 줄까? 응? 형.”
음…….
보통은 그렇지만, 걔는 좀 특이한 것 같던데. 잠깐 고민하던 데일이 대답했다.
“나 싫어하는 여자 본 적 없어. 걔도 여자잖아.”
“형도 참…….”
어쩐지 애런의 말투가 점점 그 여자를 닮아간단 생각을 하는데 애런이 그의 불거진 손가락 마디를 잡아당겼다.
“형은 좋겠다. 형은 커다래서 누구든 지킬 수 있으니까.”
“…….”
“나도 어른이 될 거야.”
어른이라.
어른이 되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아이를 보며 데일은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각오까지 안 해도 넌 어른이 될 테니까 걱정 마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냐, 시간 안 걸려.”
“빨리 어른이 돼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라고. 책임이라고 들어는 봤냐, 꼬맹아?”
어려운 단어에 당황할 줄 알았는데?
애런은 데일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자길 무시하지 말라는 당당한 표정이다.
“책임? 나랑 벨은 이미 서로를 책임지기로 한 사이인데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형아는 날 잘 모르는구나?”
저 당당한 표정을 유지하게 내버려 둘까 어쩔까 고민하면서 데일은 질문했다.
“책임지기로 했어? 근데 책임이 정확히 뭔데.”
“어? 어…….”
데일은 애런의 동공이 요동치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내가 책임을 지면, 벨이 어깨가 안 무거워.”
“오…….”
대답해 놓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데일의 얼굴을 흘끔거리던 애런은, 데일이 오…… 하는 표정을 짓자 당당히 콧대를 세웠다.
“맞지? 맞았지?”
“반은 맞고, 반은 아냐.”
“……아냐?”
“책임을 진다는 건, 상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는 말이기도 하거든.”
“포기……?”
어려운 단어가 연달아 나오자, 아이는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포기라는 단어의 뜻을 유추해 내려는 듯,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애런의 어깨를 데일은 가볍게 쥐었다.
“끝. 이 대화는 여기까지.”
“형, 하, 하나만 더.”
“뭔데.”
애런은 작은 손으로 제 심장 부근을 꾹 누른 채 말을 이었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거…… 내가 다른 사람이 되게 하는 거야?”
이 꼬맹이가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까, 생각하면서 데일은 답을 내놨다.
“비슷해.”
그러자 애런은 어울리지 않게 몹시 애달픈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이 많이 슬픈 일이구나.”
작은 어깨가 한없이 처진다. 물끄러미 그 어깨를 보다 데일은 물었다.
“그래. 그래도 어른이 될 생각이야? 슬플 텐데?”
질문을 받은 아이의 손가락이 가슴 위에서 안쪽으로 오므라들었다.
“……응. 약속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