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몰라 도움을 구하는 얼굴이었다.
어른이 보기엔 뻔히 무슨 뜻인지 알겠는, 그런 투명한 얼굴.
“아…… 아하하하. 너희…… 가족도 아니구나? 그렇지? 하하하하.”
“야, 나랑 얘기해. 애 겁먹은 거 안 보여?”
내가 애런을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섰지만, 에즈라는 나보다 어린 애런이 더 만만하다 여겼는지 집요하게 애런을 몰아세웠다.
“꼬마야, 그럼 너희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인데 가족 놀이해? 어? 너 이 여자랑 그 남자랑 무슨 사이니?”
그러자 애런이 내 손을 꼭 쥐었다.
“가족은 아니지만…… 벨은 내 소중한 사람이야. 데일 형도 그렇고…… 소중해. 소중한 사이야.”
“아핫, 아하하핫.”
에즈라가 미친 사람처럼 웃건 말건, 나는 겁에 질렸을 텐데도 용기 내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애런의 머리를 꾹 눌러주었다.
‘나도 애런 소중해. 잘했어.’
아주 작게 속삭이듯 말했는데 다행히 알아들은 모양이다. 애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소중? 야, 너네 희극 하니?”
웃다 일어나 다시 헛소리를 지껄이는 에즈라를 등 뒤로 하고 애런의 어깨를 쥐고 말했다.
“애런, 나는 저 누나랑 할 얘기가 더 있으니까 애런은 스칼렛한테 가 있어. 그럴 수 있지?”
“응.”
대답도 잘하지, 내새끼.
애런을 위해 문을 열어주려 문고리로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소중한 관계? 너 관계가 뭔 줄 알아? 맺는 순간 언제 배신당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게 관계야. 이런 세계에선 말이지, 가족도 믿을 수 없다고. 근데 너흰 뭐야, 가족도 아니잖아. 사랑하는 사이라도 돼? 그래서 소중하다고 말하는 거야? 하하하, 배신당해 버려지는 그 날 알게 될 거야. 오늘 너희가 뱉은 그 소중하다는 감정이 얼마나 얄팍한 거였는지. 내가 얼마나 얄팍한 감정에 붙들려서…….”
-짝!
얼마나 강한 힘으로 내려쳤는지 모르겠다.
내 오른손에 뺨을 맞은 에즈라의 얼굴은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애 앞에서 도가 지나쳤어.”
“…….”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에즈라는 얼굴이 돌아간 채로 말이 없었다.
세게 치긴 정말 세게 쳤나 보다.
맞은 곳이 손자국 모양으로 금세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가자, 애런.”
가만히 서 있는 여자를 내버려 두고 아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나도 데일도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용기 내 말했는데, 웬 어른에게 배신이니 얄팍이니 하는 말로 제 말을 부정당한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스칼렛과 다른 아이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애런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애런 저 누나가 한 말을 믿어, 내가 한 말을 믿어?”
“벨이 한 말.”
“내가 뭐라고 했지?”
“벨도 내가 소중…… 소중하다고.”
나는 울먹이려 하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오늘 들은 말 중에 그것만 기억하면 돼. 저 나쁜 누나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니까 다 잊어. 알겠지? 말해봐. 뭐만 기억하면 된다고?”
애런이 반쯤 울먹거리며 품에서 속삭였다.
“벨도 내가 소중해.”
“응, 됐어. 그것만 기억해. 그럼 돼.”
“…….”
“괜찮아, 애런. 그런 일은 없어.”
애런의 등을 토닥이는데 호텔 정문을 지키는 지킴이 둘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곧 문이 열리고 아침에 나갔던 전투조 인원들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데일과 그 옆에 딱 붙어선 헨리가 보였다.
“이 친구 말이야, 정말 대단했어? 안 그래?”
“헨리, 데일이 자네랑 아는 사이였다고 했지? 예전부터 이렇게 강했나?”
데일 주변에 사람이 몰려 있다.
그에게로 향하는 칭찬과 한결 친밀해진 눈빛들을, 옆에 선 헨리가 대신 받아내고 있었다.
정작 데일은 미소 띤 얼굴로 별말이 없다.
아마 오늘 나가서 활약을 좀 한 모양이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헨리!”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언제 나왔지. 방에서 나온 스칼렛이 제 남편의 이름을 부르다 나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벨? 왜 여기 쭈그리고 있어요?”
“헤헤, 어쩌다 보니…….”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올려다보니 어느새 데일이 당도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통조림 너 뒤집어쓴 그 누더기는 뭐야.”
“아, 이거.”
곰인데요, 지금 머리가 없어서 그래요.
대답하려는데 다가온 헨리가 데일을 제 쪽으로 채갔다. 헨리는 그저 데일과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뿐이었을 텐데, 꼭 내게서 그를 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대령님이라니까.”
그가 스칼렛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있는 내게는 다 들렸다.
“찾는 물건이 뭔지도 다 알아냈다고.”
그 말에 스칼렛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대령님…….”
그녀가 감격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작게 데일을 불렀다.
마치 낙원행 티켓이 손에 들어오기 직전인 듯한 분위기랄까.
“데일! 헨리!”
저 멀리서 누가 둘의 이름을 불렀다.
“같이 저녁 들자고! 계획도 세워야 하니까.”
같은 전투조 사람인 걸까. 그가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둘을 불렀다.
“통조림?”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데 데일이 내 머리를 톡 건드렸다.
“왜 그래? 저녁 먹고 방에서 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네, 그래요.”
물건이 뭔지 찾았다니,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좋은데, 좋은 건데.
내 기분이 왜 이럴까.
❅
저녁은 쉼터로 배달되었다. 취사조라고 소속을 밝힌 자 둘이 3단으로 된 운반 카트에 음식을 실어 왔다.
아이들과 스칼렛, 마지막으로 내게 생선요리가 담긴 접시를 건넨 취사조 사람이 에즈라를 찾았다.
“에즈라는 없나요?”
에즈라는 나와 그 일이 있고 난 뒤 쉼터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주세요. 맡아뒀다 오면 제가 전달할게요.”
“그래 주실래요?”
취사조원이 내게 뚜껑이 덮인 에즈라 몫의 접시를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안 돼!”
“안 돼? 전달해 주신다잖아.”
다른 취사조원 한 명이 내게 건네지던 접시를 막아섰다.
“지, 직접 전달해야지.”
“왜, 전달해 주신다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찾아가기 귀찮다고.”
“그, 그래도 안 돼.”
설마 내가 에즈라 몫의 음식을 몰래 빼앗아 먹을까 봐 그러는 걸까.
치고받고 싸우고 아무리 미워도 밥은 먹이고 미워하자는 주의인데, 너무하네.
“뭐 직접 전달하세요, 그러면. 저는 식사하러 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니요. 전달해 주세요. 이거 가져가세……!”
-와장창.
반대하던 취사조원이 내게 건네지던 접시를 빼앗으려다 손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텔 복도에 생선 꼬리와 빈 접시가 굴렀다.
근데 왜…….
‘에즈라 접시엔 저것뿐이지?’
혹시 다른 곳으로 생선 조각이 튀었나? 살펴봤지만 없었다.
내 접시엔 온전한 생선 한 마리가 들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 접시도 그렇던데 왜 에즈라 접시에서 나온 것은 살코기라곤 얼마 붙어 있지도 않은 꼬리뿐일까.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접시를 떨어트린 남자가 급하게 생선 꼬리를 접시에 주워 담아 내게 건넸다.
“그, 그렇게 직접 주고 싶으면 주든지 해요.”
“바닥에 떨어진 걸 그대로 주라고요? 새로 가져다줘야죠.”
“음식이 넘쳐나는 줄 알아요? 먼지도 안 붙었구만.”
어이가 없었다.
“이봐요. 먼지가 안 붙은 것 같이 보이면 이걸 당신이 먹고, 당신 접시를 에즈라한테 주는 게 어때요? 바닥에 엎지른 건 당신이잖아.”
“…….”
그러자 남자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운반 카트 손잡이를 잡고 도망치려는 듯 몸을 돌렸다.
미쳤나? 그 행동이 어이가 없어 운반 카트를 발로 찼다. 이제 막 배식을 돌리고 난 후라, 카트 위엔 쏟아질 물건도 몇 없었다.
“어딜 가시게요.”
“이…… 이이…….”
엎어진 카트 앞에서 부들대는 남자를 두고 말했다.
“당신 음식 주고 가라고. 깨끗한 이거 가져가서 맛있게 드시고. 그리고 음식은 왜 이렇게 적은데? 에즈라 오늘 열심히…… 는 아니지만 일했는데 뭐가 잘못됐다고, 지금.”
내 식사도 아니었지만 그 황당하고 뻔뻔한 논리와 태도에 화가 났다.
그래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는데.
“벨.”
“네?”
“제가 설명할게요. 들어와요.”
안쪽에서 스칼렛이 나를 불렀다.
❅
“이거 에즈라 오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스칼렛이 손에 든 접시는 그녀 몫의 음식이었다.
“스칼렛 음식을 주면 스칼렛은요?”
“저는…… 우욱.”
말을 하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는 스칼렛 때문에 재빠르게 접시를 건네받았다.
“욱, 그 뚜껑 좀…….”
“아.”
조리된 상태라지만 생선요리에선 옅은 비린내가 올라왔다.
스칼렛은 임신한 상태였지 참. 나는 뚜껑을 닫고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스칼렛, 괜찮아요? 물 좀 마실래요?”
“고마워요, 벨. 우욱…….”
그러나 스칼렛은 물조차 잘 마시질 못했다.
결국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질 못하고서 그녀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등을 쓸어줘야 하나? 그건 체했을 때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나는 계속 메스꺼워하는 스칼렛의 등을 열심히 쓸어내렸다.
“막달까지 입덧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고 소문으로만 들었었는데 제가 그럴 줄은…….”
“그럼 계속 밥을 못 먹고 다른 사람한테 양보했던 거예요?”
“네. 정확히는 에즈라한테만이지만요.”
‘안 돼!’
그러다 애 떨어져요! 그럼 제 돌발 퀘스트는요! 임신한 사람이니 남들보다 배는 잘 먹어도 부족한데! 이미 유산 경험도 있는 분이……!
뜻밖의 복병이었다.
아이가 잘못되면 돌발 퀘도 실패할 텐데.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무슨 수로 지킨단 말인가.
난감해져 입술을 뜯자, 스칼렛이 내 표정을 잘못 읽었나 보다. 그녀는 오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벨 오해하는 거 아니죠? 에즈라랑 사이가 나빠 보여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에즈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제 식사도 제가 먼저 먹지 않겠냐고 권유한걸요.”
“음.”
전혀 동의하고 싶지 않아 잔뜩 인상만 찌푸리고 있자, 잠시 망설이던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얘길 해도 되는지 망설여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둘이 계속 오해가 쌓일 것 같아서……. 에즈라에게 최근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든요.”
“어떤 나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걔는 진짜…….”
“소중한 사람에게 버림받았거든요.”
“…….”
예상치 못한 발언에 입이 딱 다물렸다.
뜻밖의 복병이 여기도 있었네.
“에즈라는 호텔에 약혼자랑 둘이 들어왔는데…….”
그 뒤로 스칼렛이 해준 얘기는 이렇다.
호텔에 비행선이 착륙했을 때 혼란한 틈을 타, 에즈라와 그녀의 약혼자는 호텔을 떠나 비행선에 잠입하려고 시도했는데 실패했단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약혼자가 비행선에 타기 위해 에즈라를 미끼로 던졌다고. 그렇게 에즈라는 호텔에 홀로 남은 거라 했다.
“아직 힘들 거예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길 마무리하는 스칼렛에게 물었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예요? 식사라면서 먹을 것도 없는 꼬리만 뚝 잘라주고, 밖에 나가고 싶다는데 나가지도 못하게 가둬두는 게?”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X 같은 곳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