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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48)화 (48/108)

48화

오늘 얘한테 일을 못 시키면 내일도 나 혼자 독박 쓰고 여기 일을 다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호텔 내부를 돌아다니며 마나 송신기를 찾겠다는 나의 원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건 안 되지.

“야.”

“…….”

“너 위장이 강철로 돼 있냐? 밥 안 먹어도 생존에 문제가 없어?”

“…….”

이젠 돌아보지도 않는다. 나는 그녀의 마른 등을 보며 속삭였다.

“여긴 일 안 하면 밥 안 준다며. 너 일 안 하고 누워만 있다고 이른다? 그래도 밥 나오냐? 뭐 빽이라도 있나 봐?”

역시, 사람을 일으키는 덴 밥심만 한 게 없다.

밥 못 먹게 일러바칠 거란 얘기를 하자마자 에즈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XX이…… 악!”

나는 따발총처럼 욕을 내뱉으려 하는 에즈라의 입을 손으로 탁 쳤다.

“애들이 듣는다. 욕 배틀 그만하고 일하자 이제.”

“스칼렛 아줌마, 사자가 더 세요, 곰이 더 세요?”

나는 곰 인형 안에서 질문을 받은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스칼렛이 나와 약속한 대로 빙긋 웃으며 예정된 대답을 내놨다.

“음, 둘이 싸우면…… 곰이랑 사자는 맹수 중의 맹수라 아줌마도 잘 모르겠는걸. 혹시 아는 친구 있니?”

질문에 질문으로 답변을 받은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사자지. 저 갈기를 봐, 엄청 세 보여.”

“갈기랑 싸움 잘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멍청아.”

“공작새는 꼬리로 위협하는데, 꼬리가 화려한 수컷이 더 세다고! 사자 갈기도 그런 거라고!”

“어휴, 그럼 사자한테 공작새 무리로 가라고 하세요.”

“무조건 곰이야 곰. 원래부터 센 놈은 이름이 외자다.”

“어휴, 네 이름은 앞으로 사람이세요. 곰이랑 사자는 이름이 아니고…… 어휴, 됐다. 멍청이들.”

곰 탈 안에서 아이들의 주장과 반박을 들으며 애런을 바라봤다.

자 애런, 질문을 받으면 손들고 대답하기로 약속했잖니.

애런은 제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본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곰 인형 탈을 써달라는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애런은 그 광경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아이와도 말을 섞지 못하고.

‘내 새끼가 침울한 건 못 본다.’

비록 호텔에 오래 머물 예정이 아니라 해도, 애런이 아이들과 말을 트고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애런 지금 손든 거니? 그럼 애런이 한번 대답해 볼래?”

원래는 질문하면 애런이 손 들고 대답하는 거였는데, 애가 가만히 있자 스칼렛이 대답을 유도했다.

곰과 사자의 배틀 결과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시선을 받은 애런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할 수 있어 애런! 내 새끼 긴장할 것 없어!’

인형 탈 밖으로 내 뜨거운 응원이 전달됐나 보다.

자신을 지켜보는 곰 인형 탈, 정확히는 곰 탈의 눈구멍을 노려보던 애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곰이 이겨요.”

대답은 들은 아이들의 반응은 ‘쟤도 곰은 이름이 외자라 세다.’ 같은 헛소리나 하겠지…… 같은 기대감 없는 반응이었다.

“이유는…… 맹수 중 중량이 제일 많이 나가는 게 곰이기 때문입니다.”

“오?”

그러자 기대감 없던 아이들의 동공에 희미한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야, 중량이 뭐야.”

“곰 몸무게, 멍청아.”

“아.”

아이들의 웅성거림 속 애런이 대답을 이어갔다.

“중량은 곧 힘입니다. 중량이 많이 나갈수록 곰 주먹엔 힘이 실리고, 그래서 곰의 펀치력은 맹수 중 제일입니다.”

“오…… 쟤 뭐야?”

“잘생긴 허수아빈 줄 알았더니 말 잘하잖아?”

“이름이 애런이야?”

“으, 응…….”

제 이름을 물어오는 아이들의 질문에 애런이 수줍게 대답했다.

애런 주위로 몰려드는 아이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나는 애런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갈색 곰 주먹에서 뿅 올라온 엄지를 보고 애런이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일 때,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애런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여러분, 곰이 사자보다 더 센 이유는 그것 말고도 더 있답니다. 곰과 사자에게 나머지 이유를 직접 들어볼까요?”

“네!”

아이들의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에즈라에게 눈짓했다.

벽에 비딱하게 기대있던 사자가 시선을 받곤 이쪽을 노려봤다.

노려보기만 하지 여전히 벽에 몸을 기댄 채였다.

나는 에즈라에게만 보이도록 등을 돌려, 한 손에 통조림, 한 손에 포크를 들고 밥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밥 그만 먹고 싶냐?’

그러자 벽에 기대 서 있던 사자가 조용히 네 발로 땅에 엎드렸다.

나도 사자를 따라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일어서며 외쳤다.

“안녕, 여러분! 난 곰이야!”

“와, 곰이다, 곰!”

곰을 반기는 아이들 틈을 비집고 나선 한 여자아이가 질문했다.

“야, 곰아! 네 이름은 따로 있잖아. 네 이름은 뭐니?”

“응, 난 이름도 곰이야.”

그러자 여자아이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너는 총칭의 개념을 아는 것 같지만 곰 말고 다른 이름을 말했다간 다른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미안하다, 꼬마야.

넌 이 아이들 중에서 제일 똑똑해 보이니 지금은 당황스러워도, 언젠가 그때 그 곰 속 인간이 귀찮았을 뿐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거란다.

여자아이가 절망한 표정으로 들어가자,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맞아. 나는 동물 중에서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간다. 그래서 내 앞발 파워는 맹수 중 제일이지!”

“오오…… 애런 말이 맞잖아?”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내가 사자보다 더 센 이유는 또 있다.”

“뭔데, 뭔데!”

“아, 뭔데!”

“그건…….”

뜸을 들이자 아이들이 자지러졌다.

“그건!!?”

“스칼렛 아줌마! 곰이 사람 애태워요!”

“워워, 여러분 진정하세요. 기다리면 곰이 다 설명해 줄 거예요.”

나는 여전히 엎드려 있는 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는 못 선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눈치챈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더 빨리 외쳤다.

“곰은 서! 곰은 선다!”

“맞았어. 난 서서 때릴 수 있지. 이 무서운 주먹으로 말이야.”

천장을 향해 곰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제 알겠니? 사자는 무리를 짓는데 곰은 혼자 다니는 이유를?”

“…….”

“강하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마지막 말을 내뱉자, 마치 자신이 맹수 최강자라도 된 듯, 곰의 강함에 도취한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곰아! 보여주라!”

“그래, 보여줘! 맹수 1인자의 강함을 보여줘! 사자 때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꼭 미래의 격투장 vip 같았다.

아이들은 내게 사자를 때릴 자격을 주었지만, 나는 곰으로서 별로 사자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엎드려 있는 사자 속 에즈라를 생각했다.

지금도 손톱에 베인 코끝이 따갑긴 했지만 이 기회를 틈타 상대를 때리고 싶진 않았다.

“아이들아, 곰은…… 진정한 강자는 싸우지 않는다. 존재만으로도 그 강함이 느껴지기 때문에 아무도 곰에게 덤비지 않기 때문이지.”

“곰아, 허세는 그만 부려라!”

“그래!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격투다!”

혹시 여기 격투장인데 내가 유치원으로 착각한 거냐?

아이들은 곰의 강함을 끝끝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곰과 사자가 싸우면 울면서 ‘싸우지 마~’하는 아이들은 이 세계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아이들의 동심에 품은 내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대충 시늉만 하고 끝내자.’

인형 탈을 쓰고 있었더니 더웠다.

관자놀이로 흐른 땀을 닦아내려고 인형 탈의 겉면을 문질러봤지만, 탈이 너무 커서 관자놀이에 닿질 않았다.

에즈라 쟤도 더운 건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쟤는 엎드려 있으니 더 힘들 거다. 대충 시늉이라도 해서 빨리 끝내주자 싶었다.

“좋, 좋다. 정 보고 싶다면 곰 펀치의 위력을 보여주지.”

사자에게 다가섰다. 밥으로 협박했을 때부터 에즈라는 잘까지는 아니어도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상체를 굽혀 사자에게 귓속말했다.

“애들 때문에 때리는 시늉만 할 거니까 가만히 있어라.”

“…….”

대꾸는 없었지만 알아들었겠지.

오른손을 쳐들었다. 탈이 크고 두툼해서 겉면을 좀 치는 정도로는 타격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받아랏, 사자!”

이목이 쏠린 가운데 곰이 앞발을 내리쳤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사자가 벌떡 일어나며 내 손에 머리를 가져다 박았다.

“…….”

“꺄아! 사자 목이 떨어졌어!!”

“곰이 사자 목을 찢어버렸어!!”

에즈라의 어깨 위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을 뒹구는 사자 머리를 보며 아이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야, 이건…….”

“…….”

땀과 산발이 된 머리가 엉켜 망나니 같은 모습으로 그녀가 날 노려봤다.

“야!”

-쾅!

무서운 속도로 내 앞을 지나쳐 간 에즈라가 방을 나갔다.

‘하…… 기분 참 뭣 같네.’

나는 곰 머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숨어 들어가듯 한 방으로 사라지는 에즈라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야,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

흥분된 숨을 고르는 듯, 그녀의 어깨가 들렸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아니라고? 이때다 싶어서 복수한 거 아냐?”

“나 그렇게 유치한 사람 아니야.”

“그럼 뭔데? 너 뭐라도 돼? 네 형 되게 세 보이더라. 그거 믿고 이래?”

잔뜩 흥분한 상태의 사람이랑 대화다운 대화가 될까.

“그래. 지금은 말이 안 통할 것 같으니까 나중에 얘기…….”

-퍽.

등을 돌리자마자 날아온 손이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쓰고 있던 베레모가 발치로 뚝 떨어졌다.

길게 땋아서 모자 속에 감춰둔 머리가 이마를 타고 늘어져 코를 간질였다.

“…….”

X됐다.

길게 땋은 머리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천천히 숙인 채 앉아서 모자를 주운 뒤 태연하게 다시 쓰면 어떨까.

생각한 바를 실행에 옮기려는데 뒤에서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은 뻔한 말이 들려왔다.

“너 여자였네?”

“…….”

장발 미남이라고 우기면 통하려나? 이게 개그 만화라면 가능할 텐데.

“야, 너…… 그럼 뭐야? 삼 형제라며, 삼 남매야?”

그러나 벌써 저쪽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기정사실화 하고서 이야길 진행하고 있었다.

‘하……. 밥으로 협박했는데 이제 내가 협박당하게 생겼네.’

“야, 아깐 말만 잘 하더니 왜 입이 꾹 닫혔어?”

-끼익.

문소리와 함께 모습을 보인 것은 애런이었다.

고개를 빼꼼 내민 애런은, 문 앞에 서서 머리로 미간을 가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베, 벨?”

“애런…….”

“벨이 갑자기 사라져서…….”

다가온 애런이 내게로 작은 손을 뻗었다.

“무슨 일이야 벨? 머리…… 치워줄까?”

“응…… 아냐, 괜찮아 애런.”

“으응, 괜찮은 거구나. 그래, 벨이 괜찮은 거면…….”

아무래도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하는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애런은 손을 내렸다.

“야, 꼬맹이. 마침 너 잘 왔다.”

제게 다가서는 인영에, 아이가 내 옷깃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들킨 거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뭐 어쩌겠냐 싶어서 나는 떨어진 모자를 주워 썼다.

“너희 뭐야? 삼 남매? 아니, 가족은 맞아? 얘가 네 친누나야?”

애런은 눈치가 완전히 꽝인 타입은 아니었는데, 아이는 아이이지 않은가.

어른이 무서운 얼굴로 몰아세우자, 능숙하게 거짓말은 못 하겠고 겁을 집어먹은 아이가 내 눈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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