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제 머리 위에 뭐가 있나요? 설마 벌레? 날씨가 얼어붙고 나서 좋은 점이라곤 벌레를 보기 힘들어졌다는 거 하나뿐인데 설마…….”
갑자기 맞닥뜨린 돌발 퀘스트에 그만 넋을 놓고 너무 오래 쳐다본 모양이었다.
나는 여자의 머리 위를 보던 시선을 갈무리하고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아뇨. 벌레는 없어요. 제가 뭘 잘못 봤나 봐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머 뭘 그런 걸로 사과까지 하고 그러세요. 민망하다.”
구김살 없는 밝은 웃음과 대처였다.
“들어가도 될까요?”
내가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여자가 고개를 살짝 떨구며 물어왔다. 내 정신 좀 봐. 나는 급하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저런 옷은 어디서 구한 거지?’
여자는 아이보리색 원단에 치맛단이 풍성한 로판 웹툰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아까 전 무대에서 관객석을 지켜봤을 때도, 남녀를 불문하고 저런 귀족들이 입을 법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많아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대뜸 옷부터 물어보는 것은 실례인 것 같아 망설이고 있자, 그녀가 데일을 향해 다가섰다.
“캐드 대령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 많이 했는데…….”
나와의 대화에서 조금은 붕 떴다고 느껴질 만큼 명랑한 목소리던 여자는, 조금은 정돈된 목소리로 데일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제야 여자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이 여자가 헨리의 아내인가.’
그건 데일의 표정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가 또 헨리의 빈 왼쪽 팔을 볼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조금 더 어쩔 줄 모르는.
“위컴 부인, 걱정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무사하셨으면 된 거죠! 호호, 저 여기 앉을게요?”
꼭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로 서 있는 데일을 지나쳐, 스칼렛이란 여자는 스스로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제가 갑자기 방문한 이유가 궁금하시죠? 별거 아니랍니다. 말씀드릴 테니까 앉아보시겠어요?”
“…….”
나는 테이블로 걸어가며 괜히 데일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뭐.’
그가 눈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짓고 있는 얼굴이 아주 비 맞은 새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진짜 오늘 더럽게 못생긴 거 알아요? 그동안 잘생겨 보인 건 환상이었나?”
“뭐?”
“뭐요. 앉기나 해요. 앉으라잖아요.”
“…….”
입을 가로로 다문 남자는 평소 같았으면 지지 않고 한마디를 했을 텐데, 지켜보는 눈이 있어선지 아무 말도 없이 테이블에 착석했다.
그게 또 짜증이 났다. 나 오늘 왜 이러지. 뭐, 이래도 짜증이 나고 저래도 짜증이 나네.
“호호호. 헨리에게 들은 그대로네요? 대령님이랑 벨 양이 아주 친한 것 같다고 얘길 해주더라구요.”
“벨 양이라뇨……. 하, 하하.”
여자인 거 알고 있나? 깜짝 놀라 물었더니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답했다.
“아! 저 알고 있어요. 호텔 내에서 남장한 채 지내실 거라고 헨리한테 들었거든요.”
“…….”
내 동의 없이 돌아가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헨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상, 그의 아내에게까지 사실을 숨기기는 어차피 힘들었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가볍지 않답니다. 그리고 대령님의 동료분이시라면 저와 헨리의 동료나 마찬가지니까요.”
이 스칼렛이란 여자, 눈치가 빠르다. 내 낯빛이 어두워진 걸 바로 읽어내 상대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답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답을 건네자 이번엔 여자의 시선이 애런에게 향했다.
“네가 애런이구나? 안녕?”
“응. 안녕…….”
안 건네니만 못한 인사를 건네고 애런은 쪼르르 달려와 내 뒤에 숨기 바빴다.
“아하하, 아이가 숫기가 없는 편이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렴요! 애기인데요. 처음 보는 다 큰 어른이 무서울 만도 하죠.”
여자는 넉살 좋게 받아쳤고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오래 걸렸습니다. 그럼 제가 왜 왔냐면…….”
“…….”
“필요하신 물건을 지급해 드리기 위해서랍니다. 호호홋.”
“필요한 물건이요?”
“네, 예를 들면 샤워할 때 필요한 물건들도 좋고. 음, 외투는 가지고 계신 것 같으니 실내복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와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펜과 종이를 챙긴 후 다시 앉았다.
“필요하신 물건이 많은가 봐요.”
“아, 네. 주신다는데 빼먹지 않고 받으려구요. 하하. 근데 그냥 주시는 게 맞나요? 아니, 일단 그만큼 물건이 넉넉히 있다는 게 놀라운데요.”
스칼렛은 싱긋 미소 지었다.
“몇 가지 선에서는 그냥 드리고, 요구가 많아지면 통조림 같은 걸로 교환할 수 있는데, 보통 그런 경우는 없어요. 다들 들어올 때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어버리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여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굴렸다.
뭘 적지. 그래, 가장 우선순위는 역시 이거지.
나는 종이 위로 반듯하게 ‘칫솔’이라 적었다.
복제 능력을 알기 전에 얻은 칫솔뿐이라, 그렇지 않아도 새 칫솔이 필요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이게 웬 기쁜 소식이냐 싶었다.
스칼렛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사람들 불만이 크진 않았던 게 보통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 뭔갈 빼앗겼다 싶을 정도의 물건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들어와서 기본적인 물건을 챙겨주기도 하고요.”
“불독이라 불리는 남자, 멋대로 들어오려는 사람들 사기 쳐서 물건이나 빼앗는 불한당 독재자 같은 사람으로 봤는데, 그렇게까지 질 나쁜 사람은 아닌 건가요?”
스칼렛은 잠시 눈을 굴렸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불한당 독재자는 맞는데 영리한 불한당 독재자랄까요?”
대충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힘으로 짓누르긴 하는데,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당근을 잘 쓴단 말처럼 들렸다.
“궁금한 게 더 있는데요. 화려한 의상을 입으신 분들이 많던데…….”
말끝을 흐리며 여자가 입은 의상을 흘깃 보자, 스칼렛은 바로 이해했는지 거침없이 답을 내놨다.
“호텔에 귀족들을 위해 구비된 물건들이 아직도 굉장히 많이 남아 있다고 알고 있어요. 옷도 그렇고 고급스러운 옷감도 많은가 봐요. 특히 호텔에서 재봉사로 일하셨던 분이 남아 계시거든요. 그분께서 옷을 지어주세요.”
“아.”
“저는 화려한 옷은 취향이 아닌데, 아무래도 임신 중이라 풍성하게 퍼지는 옷이 편할 것 같아서 말씀드렸더니 지어주셨어요.”
임신 중이었구나. 허리 라인 없이 풍성한 주름이 잡힌 드레스라 미처 몰랐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그러려고 온 건데요.”
칫솔은 적었고, 또 뭐가 없더라. 머리를 굴리며 양옆에 앉은 두 남자를 보는데 둘은 말이 없었다.
“애런, 애런은 뭐 필요한 거 없어? 자유롭게 말해봐, 주신대.”
애런은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응? 난 초콜릿.”
“오케이, 애런도 새 칫솔.”
“벨은 자주 답을 정해놓고 물어보는 거 같아.”
이글이글 불타는 애런의 눈을 피해 몸을 좌측으로 틀었다.
그런 내 등을 향해 애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꼬리를 잡았다.
“자유롭게 말하랬으면서.”
“큼큼. 데일은요,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남자가 귀를 달라는 손짓과 함께 상체를 내게 기울였다.
“소곳.”
뭐라는 거야. 입도 혀도 멀쩡한데 왜 말을 뭉개는 거냐고.
거 스칼렛 눈치는 더럽게 보네, 진짜.
“뭐라고요? 다시 말해봐요.”
“…….”
데일은 왜 말을 못 알아듣냐며 눈으로 욕을 보냈다. 그가 다시 내 귓불을 잡아당겨 조금 더 정확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새 속옷, 많을수록 좋고.”
“오케이, 데일 캐드 대령님은 팬티 여러 장이요.”
“아…….”
아, 뒤에 XX이란 쌍욕이 들린 것도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고개 숙여 조용히 웃음을 삼키던 스칼렛이 말을 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으면 가서 보고 정하셔도 돼요. 보면 또 필요한 물건이 생각날 테니까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 가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자, 스칼렛이 배 아래를 손으로 받치며 따라 일어났다.
“얼마든지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임신 중이라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데 안내까지 부탁해도 되나. 하지만 잘 모르는 호텔 안을 혼자 헤매고 싶진 않았다.
“그래 주신다면, 네. 감사드립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웃음과 함께 자리를 뜨는 스칼렛을 따라나섰다.
아, 맞다. 호텔 방의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나는 몸을 돌려 외쳤다.
“데일, 팬티 얼마나 중요해요? 못 준다 그러면 우겨서라도 받아올까요?”
그러자 미간을 구긴 남자가 세 번째 욕을 눈에 실어 보내왔다.
“…….”
아, 재밌네.
❅
함께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뜬 퀘스트 내용을 훔쳐봤다.
[돌발 퀘스트
대상: 스칼렛
내용: “남편을,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어.”
기한: 퀘스트 발견 시점부터 3일.]
우리 가족이라 하면 그녀 자신과 남편, 그리고 뱃속의 태아까지 세 명인가.
어차피 이들은 데일의 일행이니 데일 역시 이들을 지키려고 하겠지.
별일 없다면 자연스레 완료될 것 같은데…….
“대령님은 여전하세요.”
“네?”
머리에 생각이 많던 차라 말을 놓쳤다.
스칼렛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대령님이요. 그사이에 헨리가 왼팔을 잃은 걸, 분명 자기 탓으로 돌리실 거란 우려를 하면서 방문을 두드린 거거든요.”
“아, 네…….”
“근데 그러지 않으셨으면 해서, 그건 대령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냥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불운이 저희에게 일어난 것뿐이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더 밝게 인사드렸는데 어쩔 수 없더라구요. 그래서 벨에게 감사했어요.”
“예?”
갑자기 내 손을 쥐고 인사를 전해오는 스칼렛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중간중간 농담해 주신 덕분에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었어요.”
“아…… 그냥 저 좋자고 한 거라,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닌데요. 하핫.”
머쓱해져 뒷목을 문지르자, 그녀는 깔깔거리는 밝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엇.”
깔깔거리던 그녀가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자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나는 재빨리 몸을 기대 스칼렛을 부축했다.
“감사해요. 혹시 괜찮으시면 잠깐 앉았다가 가도 될까요? 사실 몸 조심해야 할 때인데, 대령님께서 오셨다길래 인사드릴 겸 제가 가겠다고 나선 거거든요.”
“네, 얼마든지요.”
3층에 내려 그녀의 말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1층에서 3층은 중앙에 뻥 뚫린 무대, 그 주변으로 관객석과 박스석이, 그 뒤로는 여타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를 부축하며 복도를 꺾어 돌자, 의자와 테이블이 여러 개 놓인 텅 빈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