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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42)화 (42/108)

42화

처음 와보는 공간이 신기할 테니 이리저리 들쑤시고 돌아다닐 만도 한데, 애런은 방 한가운데 서서 목을 쭉 뺀 미어캣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애런.”

“응.”

“저 옷장 열어보고 싶지?”

“헉, 어떻게 알았어?”

아이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고개를 쳐들고 날 우러러봤다.

“그렇게 계속 보는 건 관심이 있다는 얘기라서.”

“그렇구나.”

“여기 우리밖에 없으니까 가서 마음껏 열어보고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얘기해 줄래?”

“응!”

장갑과 외투부터 벗어 던지고 테이블에 앉아 있던 데일의 시선이 옷장을 향해 뽀르르 달려가는 애런의 뒤를 따랐다.

나도 잔뜩 신난 아이를 지켜보다가 창틀에 팔을 올렸다.

창 너머로 탁 트인 전경이 들어왔다.

‘저기구나. 죄수들이 모여 있다는 장소가.’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상당한 규모의 호수와 그 건너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러 채의 집들.

‘낙원에서 불독을 시켜 찾는 물건이 뭘까. 뭐길래 낙원행 티켓까지 내걸고 찾는 거지.’

무슨 물건인지만 알아내면 굳이 불독을 통할 필요는 없다. 낙원에서 온 이들과 직접 거래를 해도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불독의 환심을 사서 물건이 뭔지 알아낼 때까지만 불독의 비위를 맞추자.’

“꺄하하하하. 꺄하.”

뭐야? 텐션 높은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웬 거대 누에고치 같은 걸 데일이 발로 굴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흰 가운에 둘둘 말린 건 애런이었다.

흰 가운으로 미라처럼 말려서 얼굴만 쏙 나온 애런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자지러지게 웃으며 데일의 발을 맞고 방바닥을 굴렀다.

“하하.”

난 추리물인데, 남자 둘은 호캉스 힐링물을 찍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무방비하게 깔깔거리는 그 모습에 계속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런, 발로 차이는 게 재밌어?”

“갸학, 응! 재밌, 꺄하하하.”

“데일도 재밌어요?”

“어. 잘 구르네. 너도 굴러볼래?”

“아뇨.”

근데 옷장에 가운이 있었나 보네.

나는 그제야 일어나서 방 안을 제대로 살폈다.

채광이 좋은 커다란 거실과 침실 두 개, 욕실 한 개가 룸의 구조였다.

욕실엔 뜯지 않은 어메니티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와, 이세계 어메니티라니.’

로션을 열어 코에 대자 달달한 코코넛 향이 올라왔다.

달기만 했다면 바로 뚜껑을 닫았을 텐데, 달게 훅 치고 들어오는 코코넛 향 뒤로 쌉쌀한 카카오와 패츌리 향이 단내를 감싸고 돌았다.

생각보다 좋은 향에 감탄하는데, 애런이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성인 가운을 질질 끌고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 굴렀구나. 애런도 맡을래?”

“후아~”

아이가 좋아할 만한 향은 아니라고 느꼈는데, 애런은 아닌가 보다.

단 향에 취한 듯 아이의 표정이 황홀했다.

“이 향 좋아?”

“응.”

좋다는 말에 로션을 콕 찍어 아이의 코에 발랐다.

애런은 푸시시 흩날리듯 웃는 얼굴이었다.

“이거 이따 씻고 몸에 바를까?”

“응응!”

신나게 대답하던 애런은 양손으로 제 귀를 감쌌다 열기를 반복했다.

“귀 왜 그래? 간지러워?”

“먹먹해.”

“귀가 먹먹해?”

“응.”

아…… 오늘 총성을 여러 번 들은 탓인가보다.

나는 어쩐지 귀를 여닫는 손짓이 안쓰러워 애런의 머리를 헤집다가 아이를 당겨 끌어안았다.

“오늘 일이 많았지. 무서웠을 텐데 엄청 의젓했어, 애런. 먹먹한 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응. 벨도 의젓했어.”

그러면서 안긴 채 내 등을 토닥여왔다.

톡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작은 손의 주인처럼 참 작기도 하지. 그러나 그 효과만은 작지 않았다.

데일이 차를 떠난 순간부터 호텔 방에 들어오기까지, 고작 반나절 만에 너무 많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아이의 작은 손길에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라, 나는 염치도 없이 가녀린 애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의 체온에 달궈진 코코넛 향이 몸을 눅진하게 만들었다.

“내 동생들은 참 형을 신경도 안 쓰지.”

의자 등받이에 가슴을 대고 앉은 데일은 누가 그 아니랄까 봐 영락없이 비꼬는 말을 던졌다.

“나 혼자 배다른 형인가 봐.”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애런의 어깨에 묻은 얼굴을 들어 올리고 싶지 않았다.

“배다른 형이 뭐야, 형아?”

“애런, 대답해 주지 마.”

“응.”

역시 애런은 내 편이다. 데일보다는 내 말을 훨씬 잘 들어준다.

나 혼자 아는 승리감에 취해 있는데, 이쪽으로 다가와 털썩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생들아, 배다른 형도 안아주자.”

그가 애런을 안고 있는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가 애런한테 했던 것처럼 베레모 위로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데일 형도 안아주자, 벨.”

내 품 안에서 꼬물꼬물 방향을 튼 애런이 데일의 왼쪽 가슴을 안아주길래, 나는 그의 오른쪽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아이를 다시 끌어안았다.

‘말을 해 말아.’

사실 아까부터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할 타이밍을 잡기도, 입 밖으로 꺼내놓기도 어려웠다.

그의 품속에서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자에게 말을 꺼냈다.

“데일, 일행들 소식은…… 유감이에요.”

“…….”

일행 중, 떠난 그를 찾아 나선 무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나머지 일행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그는 오늘 헨리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

마음이 좋지 않을 거다.

등에 닿은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주제넘기는.”

차갑게 대답한 것 치고는 끌어당기는 팔의 힘이 점점 거세지는 것만 같다.

호텔 방 한가운데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우리를 품에 안은 남자는, 양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나와 애런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댔다.

-툭.

베레모도 떨어지고 난리 났네. 머리가 얼마나 산발일지.

그래도 확실히 애런의 부서질 것 같은 어깨에 기대는 것보다 역시 남자의 가슴팍이 튼튼하고 편안하…….

“위로 끝.”

“??”

“애런, 초콜릿 먹자.”

“초콜릿이 뭐야?”

“끔찍하게 좋은 거.”

“와, 끔찍하게 좋은 거!!”

어, 잠깐만.

미련 없이 일어나 나를 떠난 두 남자는 손수레를 향해 걸어갔고, 어느새 방바닥엔 나 혼자 앉아 있었다.

야바위에서 따낸 물건 중엔 커다란 초콜릿 바도 있었다.

데일은 은박지를 벗긴 초콜릿을 뚝뚝 조각내 애런의 입에 넣어줬다.

“와…….”

초콜릿을 입에 문 애런의 표정은 세상에 이런 맛이 있는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는 너무 맛있어서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다.

“하핫…….”

내가 방바닥에 앉아 헛웃음을 흘리자, 초콜릿에 정신이 팔렸던 두 남자가 그제야 나를 돌아봤다.

“벨 머리가.”

“가관이네.”

지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가관이라니, 진짜 웃기고 있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어, 그런데.

“초콜릿! 한 개뿐인 거 아니에요? 아, 샘플 하나 만들어두고 먹어야죠!”

그러자 손수레 안을 뒤적인 데일이 다른 초콜릿 하나를 꺼내 들었다.

“또 있네.”

“와, 식겁했네.”

어휴, 놀라라.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집된 돌발 퀘스트

대상: 불독

내용: “물건을 찾아야 해. 그래야 낙원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초콜릿 조각을 입속에서 천천히 녹이며, 불독의 돌발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불독이 찾는 물건을 그에게 안겨주면 퀘스트가 클리어된다는 소린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아래 뜬 창은 왜 내가 돌발 퀘스트를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돌발 퀘스트 2개 이상 클리어: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보류권 지급

돌발 퀘스트 3개 이상 클리어:

히든 보상 지급.]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보류권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거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 최후의 낙원을 찾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여정을 위한 새로운 일행을 합류시키세요. (?/1)

⚠오류]

왜냐하면 퀘스트가 저 모양으로 오류 상태니까.

첫 번째가 계속 저 상태면 두 번째 메인 퀘스트는 열리지 않는다. 그럼 나는 마지막 퀘스트에 도달할 수 없게 되겠지. 안 된다고, 그건.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깊게 기댔다.

저 내용을 보고 주위로 눈을 돌렸을 때, 무대를 구경하던 이들 중 다수가 돌아간 상황이어서 다른 돌발 퀘스트는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이제까지 확인한 건 불독의 돌발 퀘스트 1개. 시스템 창의 내용을 보면 내가 확인하지 못한 돌발 퀘스트가 적어도 2개 이상 있다는 소린데.

‘누구지.’

누구 머리 위에 별이 떠 있을까.

불독의 퀘스트만 봐서는 퀘스트의 전체적인 난이도를 알 수 없었다. 어차피 3개를 다 클리어할 생각은 없으니 3개 중 쉬운 것으로 골라 2개만 할 생각인데 말이지.

뭐 그러다 3개 다 할 수 있으면 하는 거고 말이다.

‘근데 이 상황이 원작에 있던 에피소드일까?’

만약 원작의 주인공들에게도 이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주인공들은 이곳에서 낙원행 티켓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소리다.

티켓이 있었는데 얻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예 티켓이 없었을 수도 있고 둘 중 하나겠지.

‘티켓이 없을 확률이 더 높지 않나?’

그렇지 않나.

낙원에서 티켓을 뿌릴 정도로 낙원행이 쉬운 일이었다면 주인공들은 왜 끝내 낙원에 못 간 거냐고.

“데일 나는, 티켓이 없을 확률도 크다고 생각해요.”

남자가 초콜릿 조각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 제국놈들은 쉽게 외지인을 받아들이는 놈들이 아냐. 있을 거란 확신은 안 해. 어디까지나 알아보기 위해 들어온 거다.”

“그럼 데일도 호텔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는 거죠?”

“어, 확인만 하면 뜰 거야.”

“으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에 처박혀 있어봤자 돌발 퀘스트를 가진 인물들이 찾아와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나가서 찾아봐야지.

호텔에 언제까지고 있을 것도 아닌데 빨리 깨자.

“어디가.”

“호텔 한 바퀴 돌게요.”

“호텔 한 바퀴를 왜 돌아. 얌전히 있어.”

“그 이름이 뭐랬지, 크리스? 그 사람한테 가보게요.”

그러자 데일이 날 따라 일어섰다.

“왜.”

왜긴, 돌발 퀘 찾아야지.

“거참 꼬치꼬치 캐묻네. 다 나름의 중요한 이유가 있거든요?”

“눈 맞았냐?”

“??”

눈? 눈이 맞다니? 순간 남자의 말을 이해 못 해 뻐금거렸다.

아, 그 눈.

“흑발이 좋다더니 그놈은 갈색 머리던데, 그냥 남자면 좋은 거 아냐?”

“아, 갈색 머리였죠. 갈색 머리는 잘 모르겠지만 다리 한쪽 다쳐서 목발 짚고 있던 모습이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뭐 그런 건 있던데. 아무튼, 나가요.”

“야!”

“아, 왜요!”

데일이 내게 통조림 한 캔을 던졌다.

“3층에 물류보관소 가서 통조림 주면 원하는 물건으로 교환해 준대. 아몬드 초콜릿 있으면 바꿔와.”

“…….”

“딴 길로 새지 말고 빨리 와라. 먹고 싶을 거니까.”

“응, 벨 보고 싶을 거니까 빨리 와야 해.”

둘 다 초콜릿을 좋아하는구나. 그래. 빨리 와준다, 내가. 호텔 방을 나서려고 막 문 앞에 섰을 때였다.

-똑똑.

“방에 계신가요?”

문 너머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데일에게 눈짓했다.

‘누구 올 사람 있어요?’

그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누구지, 헌데 호텔에 무단 침입한 것도 아니고 당당히 방을 내어 받은 건데 왜 쪼냐, 나.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 문 너머로 대답을 건넸다.

“네, 있는데요. 누구시죠?”

“저…… 스칼렛인데요!”

스칼렛이라고 하면 내가 아냐고.

“저기요. 전달받은 게 없는데 무슨 일로…….”

“아.”

짤막한 탄식을 내뱉은 데일이 걸어와 잠금장치를 풀고 덥석 문고리를 돌렸다.

문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칼이 허리에서 흔들리는 시원한 눈매의 여성이었다.

“대령님,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로.

[돌발 퀘스트

대상: 스칼렛

내용: “남편을,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어.”

기한: 퀘스트 발견 시점부터 3일.]

별과 함께 돌발 퀘스트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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