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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41)화 (41/108)

41화

“공이 어디에 있냐면.”

“…….”

“당신 발밑에 있네?”

그러자 사회자, 야바위꾼, 그 주위에 있던 모두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갑자기 숨을 죽인 건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른발이었나, 왼발이었나. 그건 좀 헷갈리네.”

“XX,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억측하지 말라며 소리친 것 치고는, 야바위꾼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게임의 규칙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공은 분명히 세 개의 컵 중 한 개 안에 있으니…….

안 되는데.

사회자가 말을 하는 동안, 야바위꾼 주위에 있던 놈들이 다가와 우리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야에서 컵을 차단한 그사이에 여분의 공을 몰래 집어넣고, 야바위꾼의 발아래 깔린 공을 치울 생각이겠지.

그럼 곤란하기에 초조해하고 있을 무렵.

“악!”

상대편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데일이 거침없이 놈들 사이로 밀치고 들어가, 컵에 손을 데려던 남자의 손까지 통째로 밟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데일이 짓밟은 손을 발로 비비며 입을 열었다.

“야바위꾼 발아래를 확인하기 전엔 이 컵 오픈 못 하지.”

그리고 손을 밟혀 옴짝달싹 못 하는 놈의 정수리 위로 칼날이 형형한 단검을 내리꽂을 자세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료 정수리 두 짝 나는 거 보고 싶은 사람 있어? 없으면 발 치워.”

이야, 기분 좋게 말려 들어간 입꼬리까지 표정이 비열 그 자체다.

나는 이 게임에서 이길 거라고만 말했지 어떻게 해달라고는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필요한 역할을 잘해주는 거지.

새삼 그가 내 편인 게 다행이었다.

-어 그, 그러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회자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대는 것도 잊은 채 그가 입을 뻐금거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위로 시선을 주었다.

사회자의 시선이 닿은 곳엔, 불독이 웃고 있었다.

‘됐다.’

아까의 지루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흥미로워 보인다.

원하던 전개다.

도박 관련 별명이 붙을 정도로 도박을 좋아하는 놈이, 늘 신입이 패하는 결과가 정해진 뻔한 게임에 흥미를 느낄 리 없지.

“바, 발 뗄게.”

겁먹은 얼굴로 야바위꾼이 발을 떼자, 납작하게 눌려 있던 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관객석이 조용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기였잖아?”

“난 사기인 줄 진즉에 알고 있었다고!”

“누가 모르고 당했어? 어쩔 수 없으니 당했지.”

“동생이랬나? 맹랑한 놈인 줄 알았는데 영리하잖아?”

“근데 저래도 되는 거야?”

그리고 연이어 뜬 상태창.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딸랑.

상태창이 뜨자마자 종소리가 울렸는데 그땐 알아채질 못했다.

드러난 사기 행각, 바뀌는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무대 위 놈들을 관찰하는 중이었으니까.

놈들은 어쩔 줄만 몰라 하지 딱히 거친 행동은 하질 않았다.

미안한데 나는 상황이 더 악화되길 바란다고.

“공이 어디 있는지 맞췄으니 우리가 이겼네요? 그럼 물건들은 가져갑니다.”

상품이 쌓인 테이블로 다가서자 아까부터 계속 날 노려보던 민머리 레키가 내 앞을 막아섰다.

“뭐 해? 이 새끼들 당장 쫓아내!”

그 말이 발화점이 되어 놈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예상대로였다. 딱 봐도 강해 보이는 데일에게 달려드는 놈은 없었다.

놈들이 달려드는 방향은 나와 애런.

퍽퍽, 내 앞으로 몸을 날린 데일의 발차기에 순식간에 몇 놈이 나가떨어졌다.

앞쪽은 문제없다, 그렇다면.

나는 뒤를 돌아 총을 발사했다.

-탕!

우리 팀 최약체에게 손을 데려던 놈들이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X, XX. 어떻게 총이…….”

“애런, 이리 와.”

새하얗게 질려 있던 아이가 뽀르르 뛰어오자, 데일이 잽싸게 아이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다른 한 팔로는 제 주머니에 복제된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 역시 권총을 쥐고 놈들을 노려보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여기서 그냥 나갈까, 네놈들 머리에 구멍 한 개씩 박고 나갈까. 머리 혈액순환 하고 싶은 사람?”

“와…… 우리 통조림 XX 그냥 악당이네.”

“나 지금 즐거우니까 입 다물어요.”

살면서 이런 대사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고.

“어, 네가 많이 즐거웠음 좋겠어.”

등을 맞댄 데일이 자꾸 피식피식 웃어댔다.

지금이 웃을 때냐고 이 남자야.

-탕!

내게서 총을 빼앗아 간 물자관리 담당자 앞에 놓인 무기 상자, 그곳으로 달려가던 놈의 앞길에다 총알을 갈겼다.

“원해, 혈액순환?”

“…….”

방심할 틈이 없네.

말은 사람 몇 놈 저세상으로 보내줄 것처럼 했지만 사상자를 낼 생각은 없었다.

이쯤 했으면 반응이 와야 하는데.

“푸하하핫.”

모두가 숨죽인 넓은 공연장에 야단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크리스가 돌아와 있었다.

“벨이랬나? 진짜 재밌다, 너.”

“…….”

“푸핫, 와…… 앞 장면을 놓쳐서 너무 아쉽네.”

목발을 부여잡고 연신 웃어대던 크리스는 돌연 3층을 쳐다보더니 외쳤다.

“넌 다 지켜봤을 거 아냐. 부럽다, 불독. 요즘 재밌는 구경이 어디 흔하냐고. 그렇지 않아도 맨날 네놈들이 신입들 등쳐먹는 거 아주 X같이 지겨웠는데 말이야.”

말을 받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불독의 표정은 당장에라도 소를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웠지만.

“그러게. 나도 오랜만에 아주 재밌다.”

말의 끝에 가서는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반대로 크리스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짝, 짝, 짝.

불독이 두툼한 손으로 치는 느린 박수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몸수색을 대충 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무기를 숨기고 무대에 오른 거지?”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말을 하는 불독의 시선은 데일에게 가 있었다.

“뭐 방법은 상관없어. 어리바리하게 내어달란 대로 무기 다 내어주는 천치 같은 놈들보다 100배는 낫지. 내가 한 가지 알겠는 건 네놈들이 적진에 떨어트려 놔도 살아서 돌아올 만큼 강한 놈들이라는 거다. 바로 나한테 필요한 놈들이지. 호텔에 온 걸 환영한다.”

관객석이 떠들썩했다.

곧 무대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휘파람 소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딸랑.

‘종소리?’

데일이나 애런을 보니 별 반응이 없다. 내게만 들리는 건가?

‘뭔데, 무슨 일인데.’

종을 부르자 어김없이 상태창이 떴다.

[미확인 알림 1개.]

‘미확인? 확인해.’

명령하자마자 펑펑 터지는 폭죽 이미지와 함께 시야를 뒤덮은 것은 거대한 핸드벨 이미지였다.

종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단 핸드벨이 공중에서 몸을 흔들었다.

[클래스 ‘종의 요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종의 요정(Lv.2)’

⇒ ‘종의 요정(Lv.3)’]

[클래스 레벨 업에 따라 스킬 ‘탐색(Lv.3)’의 적용 범위가 확장됩니다.]

내게 있는 탐색 능력이라 하면 하나밖에 더 있나. 적용 범위가 확장되었다니 뭔가 새로운 걸 찾아낼 수 있게 된 걸까?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주저 없이 읊조렸다.

“불우이웃을 탐색해 봐.”

그리고 시스템 창이 떴다.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없음.]

“뭐야, 이거.”

시스템이 고장이라도 난 건가 싶어 창을 노려보는데, 위쪽에서 번쩍거리는 빛에 의해 시선이 이끌려 올라갔다.

불독의 머리 위, 별이 보였다.

[‘탐색(Lv.3)’으로 특정 대상의 돌발 퀘스트를 열어볼 수 있습니다.]

[돌발 퀘스트 대상: 불독]

호텔의 객실은 4층부터 8층까지로 불독이 묵는 층은 8층이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객실은 5층에 있는 방.

신입이 들어오자마자 4층이 아닌 5층에 방을 배정받은 적은 없었다며 방을 안내해 주는 남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철컥.

타고 올라가야 할 엘리베이터의 꼬락서니가 참으로 볼만했다.

이중으로 된 철문을 닫고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불독 눈치를 보느라 말은 못 해도 속이 시원한가 봐요.”

“내기 도박에서 이긴 게요?”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 선 남자는 데일이 끄는 손수레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손수레엔 원래 우리가 가져온 물건과 야바위에서 따낸 물건이 그득 담겨 있었다.

“네, 다들…… 도박에서 패해 가진 물건을 다 잃고 들어왔으니까요. 사기인 걸 알았다 해도 어쩔 수 없잖아요. 그게 싫어도 밖으로 내몰리는 것보다 여기서 폭력에 가까운 보호를 받는 게 낫다는 거죠.”

“네…… 저도 혼자였으면 반항 못 했을 거예요.”

동의하자 그는 한층 쾌활해진 목소리로 웃었다.

“하하, 동의해 주실 줄은 몰랐는걸요.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자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요.”

“전 힘이 없어요. 힘은 우리 형이 다 물려받았거든요.”

“아하하, 그런가요? 그렇다면 형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다 가지고 태어나신 모양입니다. 아, 도착했네요.”

5층에 내리자, 복도에 깔린 푹신한 카펫이 밟혔다.

“이 방입니다.”

“저 그런데…….”

방 앞에서 키를 건네는 남자는 무엇이든 대답해 줄 것처럼 우리에게 친절한 태도였다.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불독과 크리스는…….”

“아.”

말끝을 흐렸지만, 그는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이해한 눈치였다.

그가 아무도 없는 빈 복도를 돌아봤다.

“용병단을 이끌던 불독과 자경단을 이끌던 크리스, 처음 호텔은 1인 대장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호텔의 화합과 평안을 위해 크리스가 대장 자리를 양보하기 전까지는요. 답이 되었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돌아가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벨이라고 하셨나요? 참고로 저는 크리스가 이끌던 자경단 소속이었고, 지금도 호텔이 아닌 자경단 소속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웃음 띤 얼굴로 복도를 돌아 나갔다.

‘여기도 뭔가 복잡하네.’

돌아가는 남자의 뒤를 보고 서 있자, 데일이 내게서 키를 가져갔다.

-달칵.

“멍 그만 때리고 들어와.”

“그래. 벨, 들어가자.”

애런이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호기롭게 자신의 소속을 밝힌 남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곳에 들어온 이상,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근데 데일의 부하인 헨리는 아무리 봐도 불독 편에 붙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아, 모르겠다.”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긴장으로 뻣뻣해졌던 어깨를 돌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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