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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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아 호텔에 근접하자 알 수 있었다.
‘근방에서 가장 고층건물이라더니, 크다.’
호텔은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원형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총 8층으로 층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건물의 규모 자체가 컸다.
더 다가가자 바리케이드 너머로 주차장이 보였다. 주차장 입구를 지키는 경비가 멈추라며 손을 뻗었다.
“못 보던 얼굴들을 잔뜩 싣고 돌아왔네?”
“내 옛 동료들이다. 대장에겐 내가 따로 말하겠다.”
험악한 인상의 경비는 헨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따로? 내가 귓구멍이 막혔나.”
귓속에 손가락을 넣고 후비던 경비는 운전자석 창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내 귓구멍은 멀쩡한데 그럼 이 새끼가 돈 거네. 차 키 건네고 얌전히 들어가라. 나머지는 원칙대로 처리한다.”
“야! 나도 이 정도는 대장에게 직접…….”
-쾅.
두툼한 손이 차 보닛를 내려치자, 보초를 서던 놈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차를 에워쌌다.
“두 번 말해야겠냐. 특별대우는 없다, 이 말이다.”
아,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헨리가 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
보통 호텔에 들어오길 원하는 신입이 있을 경우, 그들이 가진 것을 싹 빼앗은 후 받아줄지 말지 테스트를 거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자기가 신원을 증명해 줄 수 있으니 대장한테 말하기만 하면 그냥 통과될 거랬지만, 그냥 통과는 개뿔.
뒷좌석에서 바라본 데일의 뒤통수는 무표정했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저놈 저거, 튀어나가기 전이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부터 데일의 깽판으로 시작하면 앞으로의 호텔 생활이 과연 수월할까.
나는 즉시 데일이 벗어서 뒷좌석에 둔 그의 패딩을 입고 차에서 내렸다.
“원칙대로 따르겠습니다.”
“헤에…… 반질반질하게 생긴 놈이 내렸는데, 이거.”
다가온 경비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보초 서던 다른 놈들의 시선 역시 내게 와 꽂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하, 이거 아무래도 무리였나, 이 곱상하고 매끈한 얼굴로 남자 행세를 하는 것은?
내 얼굴의 파급력을 미처 생각지 못한 나의 오판이었나 보군.
조수석 창문 너머로 올려다보는 데일의 시선은 ‘네가 뭘 어쩌려고 나서냐’라는 듯했다.
“주머니에서 손 빼고, 손 위로.”
팔을 올리자, 외투의 소맷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손목을 드러냈다.
“야~ 손목 가느다란 것 봐라. 이 새끼 얼굴만 반반한 게 아니라 계집애 손목인데? 이거 남자 맞나? 너 장작은 패냐? 도끼는 잡을 줄 알아?”
내 손목이 도대체 어디가 재밌을까. 놈들은 지들끼리 낄낄댔다.
원칙대로 하자길래 곱게 따라주려고 내렸는데, 눈앞의 놈이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슬슬 비위가 역하기도 했고.
‘이미 만만하게 보였나 본데.’
계속 가만히 있으면 완전히 깔보여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깽판을 막기 위해 내렸지만, 시작부터 얕보이는 것보단 깽판이지.
깔보인 순간 조직 생활은 피곤해진다.
방향을 정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성대에 힘을 빡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미적 감각 떨어져 보이는 네 손목은 장작 패는 데나 써라. 아니, 잠깐만…….”
나는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표정을 구겼다.
“손목보다는 얼굴을 장작 패는 데 써야 할 것 같은데? 네 상판대기 사람용이 아니야.”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에?’
지금 완료될 만한 게 뭐가 있지?
곧바로 내용을 살폈다.
[히든 칭호 퀘스트 ‘요정인데 입이 험해요.’
내용: 험한 말로 정신계 공격을 가해 타격을 입힌다. (1/1)]
[‘요정인데 입이 험해요.’ 칭호 획득.]
[칭호 능력치: 불우이웃이 아닌 대상에게 험한 말로 정신계 공격을 가할 시 대미지가 약간 상승합니다.]
‘나이스!’
요정이어도 입은 험해야지 암요.
‘주력 스킬로 삼고 싶은데 칭호는 더 강화할 방법이 없는 건가?’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칭호 설정부터 했다.
내가 퀘스트 알림을 확인하는 사이, 뒤에서 낄낄대는 소리는 그 대상을 바꾼 상태였다.
“큭큭, 그래 저 새낀 차라리 손목이 더 잘생겼지.”
“근데 얼굴로 장작 패려면 어떻게 해? 입으로 물고? 되냐, 그게? 야 레키, 궁금한데 이거 물어봐.”
-툭.
레키라 불린 남자의 발치로 나무 손잡이가 달린 도끼가 떨어졌다. 그걸 보는 놈의 대 장작용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이 개X끼가…….”
죽일 듯이 날 노려보던 놈이 떨어진 도끼를 주우려 상체를 숙였을 때였다.
“…….”
머리카락 한 가닥 없는 민머리 위로 차가운 총구가 닿자, 레키란 놈이 동작을 멈췄다.
주변에서 나를 향해 각종 총기류를 겨누었다.
“내 손목이 가늘어서 너보다 못해 보이냐? 어차피 이 세상에서 손목 가는 놈이나 두꺼운 놈이나 대가리에 총알 한 방 박히면 골로 가는 건 똑같아, 이 새끼야. 어? 잠깐만…….”
“…….”
숙인 정수리에 갖다 댄 총은 그대로 둔 채, 천천히 상체를 굽혀 놈의 험악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칭호 효과가 잘 적용 중인가?’
대미지가 수치로 표시되는 것도 아니라서 잘 감이 안 왔다.
철컥, 철컥.
내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나를 향해 집중된 총기들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까 워낙 사람하곤 거리가 멀게 생겨서, 총알 한 발론 부족할 거 같기도 하네. 시험해 볼까? 여기 나 말고 궁금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봐. 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눈을 들어 주변을 살피자, 나를 바라보는 놈들의 표정이 살얼음처럼 얼어 있었다.
그리고 왼쪽 조수석 창문에서 손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손.”
님 말고요.
데일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왼손은 언제라도 차 문을 열 수 있게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
충분하다, 더 가지 말자.
이 정도 했으면 찍소리 못하는 바보천치로 보이진 않았겠지.
“푸핫, 크크큭…….”
적막을 깬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저 뒤쪽에서 들려왔다.
“크큭, 웬 또라이 하나가 들어왔네.”
“…….”
“야, 안 그래? 쟤 말 틀린 거 하나 없잖아. 곱상한 놈이나 뭣같이 생겨먹은 놈이나 총 맞고 사는 놈 있어?? 근데 왜들 무서운 표정으로 총 들고 있어. 귀여운 신입한테 환영은 못 해줄망정.”
모습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가 총을 내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고 있자, 나와 차를 에워쌌던 인원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끝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머리를 올려 빗어 이마를 드러냈지만, 딱 붙이지 않고 풍성한 볼륨감을 준 퐁파두르 스타일을 한 남자였다.
왼 다리를 다친 모양인지, 그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다가온 남자가 내 앞에 와 섰다.
“신입, 나는 신입 환영해. 가뜩이나 재미없는데 너같이 재밌어 보이는 놈이야 환영이지.”
“…….”
“그러니 그만 그 총은 내리자.”
만만해 보이기 싫었던 것뿐이지 나도 정말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나 대신 수습해 주면 반갑지.
알겠다는 의미로 총을 거두자, 총구 아래로 고개를 처박고 있던 민머리가 나를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물러났다.
그런데도 아무 반항을 못 하는 걸 보면 이 목발 짚은 남자가 상관은 상관이군.
“우리 말이 잘 통하네?”
반말, 존대? 고민하다가 이미 잔뜩 부린 허세, 끝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나도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어.”
“어. 그럴 거 같았어.”
그가 눈을 접으며 빙긋 웃었다.
“난 크리스다.”
“벨이다.”
사르르 접혀 웃음 치는 눈매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크리스가 만나서 반갑다며 내미는 손에, 나도 손을 마주 내밀었을 때였다.
“데일이다.”
조수석 창문에서 쑥 튀어나온 긴 팔이 크리스의 손을 덥석 채갔다.
“반갑다, 크리스. 어? 왜 나를 보고선 안 웃냐, 반가운데.”
“어, 어…… 그래. 데일이구나.”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리는 제 팔을 보며,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런데.”
크리스의 시선이 운전자석의 헨리를 향했다.
“왜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여? 헨리.”
헨리에게 총살당한 남자를 묻는 질문이었다. 헨리가 우리에게 예고했던 대로 준비한 대답을 내놨다.
“호수 건너편 놈들이랑 접전이 있었다.”
“그래?”
“…….”
“그랬구나.”
그러자 크리스는, 그때까지도 데일에게 잡혀 있던 손을 조용히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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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사람들이긴 하지만 큰 상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거야. 원칙대로 따라줘.”
크리스는 우리에게 그리 말한 후, 죽은 동료의 시체를 수습하러 간다고 했다.
큰 상해를 입히는 일은 없으면 작은 상해는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나마 우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놈이 자리를 비운다는 게 못내 걱정스러웠다.
내가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댔던 레키라는 놈이 계속 나를 째려보고 있었으니까.
‘뭐, 이 못생긴 자식아.’
그래도 아까 전 일이 꽤 임팩트 있던 모양인지, 노려보기만 할 뿐 달리 취해오는 행동은 없었다.
“갑시다, 신입분들.”
뒤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놈들에게 둘러싸인 채 호텔로 들어서자, 말 그대로 호텔 안은 별세계였다.
몇 층을 통으로 뚫어놓은 건지, 호텔의 천장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될 만큼 높았고.
내부 모습은 원형의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2층과 3층에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박스석이 달려 있었다.
“호텔은 1층부터 3층까지 공연장입니다. 제국의 귀족들은 호텔에 머무르며 서커스나 연극 같은 각종 공연을 즐겼다죠. 객실은 4층부터입니다.”
차로 올 때 헨리의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여긴 도대체 뭐냐고 이미 물었을 거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보자, 화려한 조명 사이로 서커스 줄타기 공연에 사용했을 법한 굵은 밧줄이 천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교도소에서 찾지 못한 마나핵이 여기 다 있는 건 확실하군.’
켜놓은 조명만 수십 개다. 호텔은 전기를 전혀 아끼지 않고 펑펑 사용해 대고 있었다. 휴대용 발전기 몇 대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수준.
“여기, 소지한 모든 무기류 반납하세요.”
“…….”
“호텔 안에서 무기 소지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기존 분들이건 새로 오신 분들이건 마찬가지죠.”
앞서 입장한 이들이 두고 간 각종 무기가 테이블 위 투명한 상자에 담겨 있었다.
순순히 말을 따르는 표정으로 권총 한 자루와 단검 한 자루를 내려놓고 지나치는데.
“잠시만요.”
물자관리 담당자로 보이는 여자가 매서운 표정으로 날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안쪽 주머니에 숨겨놓았던 총 한 자루를 기어코 빼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