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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38)화 (38/108)

38화

그리하여 차를 타고 가는 인원은 총 네 명이었다. 운전자석엔 헨리, 조수석엔 데일이, 뒷좌석엔 나와 애런이 앉았다.

우리 차와 물건은 으슥한 주차장에 숨겼고, 지금 탄 차량은 헨리가 타고 왔던 차였다.

“조직의 우두머리는?”

“별칭 불독, 이름은 모릅니다. 불 베이팅 도박장에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던 자라 그런 별칭이 붙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데일, 불 베이팅이 뭐예요?”

조수석에서 헨리의 말을 경청하던 데일이 백미러로 내게 시선을 맞췄다.

“발정기의 수컷 소는 극도로 사나워지는데, 이 수소한테 끝까지 매달려 있는 개 주인에게 상금을 주는 질 나쁜 경기지.”

“아…….”

나와 데일을 보던 헨리가 말을 거들었다.

“불독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가 불 베이팅 도박을 좋아해서란 말도 있지만, 용병으로 전장을 누빌 때 찍은 상대는 물어뜯을 때까지 놓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습니다.”

“네가 볼 땐?”

“도박을 좋아하고 호전적인 마촙니다.”

데일의 질문에 대답한 헨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용병 출신으로 통치 기구가 와해되자 도시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자입니다. 지금의 호텔 세력은 그가 이끌던 용병단 세력과 도시의 자경단 세력이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개 용병이 무슨 수로 낙원행 티켓을 얻는다는 거지?”

“용병 시절 제국군 아래서 싸우면서 연을 텄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호텔 근처에 비행선이 착륙하는 걸 제 눈으로 봤습니다.”

비행선.

이전에 데일이 했던 말에 따르면, 최후의 낙원은 북으로 쭉 올라가 바다를 건너야 하는 섬일 거라고 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려면 쇄빙선이나 비행선을 타야 한다고. 그때 이동 수단을 쓰기 위해 마나핵이 필요하단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나는 손뼉을 짝 쳤다.

“비행선을 훔친 후, 조종사만 살려서 최후의 낙원으로 간다. 어때요.”

이번엔 앞자리에 탄 두 놈 모두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본대? 맞잖아요. 조종사는 낙원으로 가는 좌표를 알고 있을 테니까.”

“비행선을 탈취한다고? 누가 하는데.”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러지. 고개까지 돌려 질문한 데일에게 당당히 답했다.

“누구긴요. 우리가요.”

“…….”

“정확히는 데일이? 나랑 애런은 뒤에서 응원해야 하잖아요.”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너무 당당하게 일을 떠넘겼나? 아니, 그럼 약한 나랑 꼬맹이가 하겠니, 네가 하지?

“대령님, 근데 저분은…….”

백미러를 통해 날 흘깃거리는 헨리는 소개를 바라는 눈치였다.

“어, 내…….”

“동료요! 새로운 동료인 벨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헨리라고 부르면 되죠? 참고로 아까 녹색 머리 새끼라고 한 건 사과할게요. 그리고 아이가 개새끼라고 한 것도요.”

데일이 내 통조림이니 뭐니 장난치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아, 예 괜찮습니다……. 헨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래. 내…… 동료지. 내 새로운 동료, 벨.”

백미러를 통해 나를 보는 데일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왜, 뭐.

옷가게를 나와 나는 사이드미러에 얼굴을 비췄다.

“와, 뉘 집 아들이야 이거.”

거울엔 베레모를 눌러쓴 미형의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를 묶어 베레모 안으로 감추자 영락없이 중성적 매력을 뿜어내는 미소년이다.

그 옆으로 데일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아내라는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남장하는 이유가 뭔데.”

그가 심술 맞은 표정으로 내 볼을 제 볼로 밀어냈다.

“아, 모자 벗겨져요.”

“그렇게 토실토실한 볼때기로 돌아다니면 잘도 안 들키겠다, 어?”

“흐즈믈르그요.(하지말라고요.)”

억센 손으로 볼을 꼬집고서는 흔들어대기에 나도 질세라 데일의 양 볼을 잡아 늘였다.

“해브즈는 그냐, 틍즈림?(해보자는 거냐, 통조림?)”

“믄즈 슨 느아요.(먼저 손 놓아요.)”

“그능 느애 으내르을 흐라고.(그냥 내 아내라고 하라고.)”

“느가튼 노메 으내느은 흐안번으로 조카다고.(너 같은 놈의 아내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

“…….”

“저, 대령님.”

“므어!”

서로의 볼을 잡고서 고개를 돌리자, 헨리는 약간 움찔하는 것 같았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벨 양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즈 스애끼가…….”

에이, 유치해.

유치함에 염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남자의 볼에서 손을 떼자, 그 역시 곧바로 손을 놓더니 헨리를 바라보았다.

“벨 양의 말처럼 벨 양이 항상 대령님과 함께 움직이길 원한다면 남장을 하는 게 맞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호텔은 철저하게 여자들을 안에서 보호하려고만 드니까요. 행동이 제약될 겁니다.”

아, 볼 아파.

꼬집힌 부위를 쓱쓱 문지르자, 애런이 내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벨, 볼이 빨개.”

“응. 데일 좀 혼내줘, 애런.”

“어떻게 혼내?”

“데일한테 가서 머리카락 세 가닥만 뽑아다 줘.”

“응.”

그러나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는 내 머리카락부터 한 가닥 뽑았다.

“벨도 형 꼬집었으니까 한 가닥 뽑았어.”

왜 이런 데서 공평하려 드는데.

데일은 제 머리카락을 뽑으려 달려드는 애런을 한 팔로 안아 올렸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뽁, 뽁, 뽁 뽑히면서 헨리의 말을 경청했다.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호텔은 안의 일과 호텔 밖의 일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있습니다. 호수 건너편에 교도소 출신들이 모여 사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죠. 이 때문에 항상 경비를 서는데, 경비를 서거나 수색을 나가는 것은 남자들 몫입니다. 여자들은 호텔 안에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들을 하고요. 호텔에서 여자는 혼자 밖에 내보내 주지도 않습니다.”

“헨리.”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제 옛 부하를 불렀다.

“예. 대령님.”

“아내는.”

“아, 아내는……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무사합니다. 지금 호텔에 있습니다.”

헨리는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래.”

제법 편안한 미소로 헨리에게 다가간 데일이 비어 있는 한 팔을 그의 어깨에 둘렀다.

“고생했다, 헨리.”

“아, 대…… 대령님. 저는…….”

머뭇거리던 녹색 머리가 결국 그의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데일은 헨리의 어깨를 짚은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팔을 잃은 왼쪽 어깨였다.

“이리 와, 애런.”

나는 다가가 데일에게 안겨 있던 애런을 넘겨받았다.

얼마 전 내게 해준 이야기처럼 데일은 아이를 잃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혼자 일행을 떠났다.

그때 데일을 가장 크게 말렸던 사람 중 한 명이 헨리라는 말을 나는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데일의 행동을 두고 무리의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단다.

무리를 이끌고 있던 사람의 선택이라기엔 지나치게 이기적이라며 데일을 비난하는 쪽과, 데리고 있던 아이를 잃지 않았느냐며 그를 이해하는 쪽.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들에겐 무리를 이끌 데일이 필요했고, 그래서 데일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것에선 의견이 일치했다.

쪽지 한 장 남겨두고 훌쩍 떠나버린 그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몇몇이 데일을 데려오겠다며 나섰다.

그중엔 헨리와 그의 아내도 있었다.

쪽지를 발견하자마자 지체 없이 출발했으니 사람들은 데일과 금방 합류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길 바라는 사람들의 예상일 뿐.

그들은 데일과 만나지 못했고 시련을 겪고 뿔뿔이 흩어졌다.

헨리는 아내와 둘이서 떠돌다 왼팔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떠돌다가 호텔에 자릴 잡은 무리를 발견해 들어간 참이라고 했다.

“왜, 왜 떠나셨습니까. 왜요.”

“…….”

“당신이 사라지면 저는, 제가 이제는 오롯한 한 명의 군인이라고 보십니까? 아니요. 저는 아직도 제대로 된 군인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라진 당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원망과 울음 섞인 말을 토해내는 헨리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울인 채, 데일은 말이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헨리라는 저 사람이 분명 안쓰러운데, 왜 말이 없이 서 있기만 하는 데일의 뒷모습이 더 안쓰럽게 느껴지는지.

“벨. 표정이 왜 그래?”

품에 안긴 애런의 질문에 나는 살포시 웃었다.

“저 남자의 어깨가 넓다고 해서 멋대로 짐을 얹지 말란 말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라 표정이 이래.”

애런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

“애런.”

“응.”

“역시 넌 내 책임이다.”

널 책임지는 일을 데일에게 미루지 않겠어.

“벨.”

“응.”

“그럼 벨은 누가 책임져?”

“나?”

나야 뭐, 어른인데.

“어른은 자신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 난 내가 책임져.”

그러자 애런이 내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 위로 제 턱을 올렸다.

“그럼 벨은 나도 책임지고 벨도 책임지려면, 어깨가 모자라겠어.”

어깨가 모자라다니, 우리 꼬맹이 응용이 빠르네?

피식거리자 애런이 내 목에다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벨이 나 책임져. 벨은 내가 책임질게.”

“하하.”

밤톨만 한 아이의 듬직한 발언이었다. 의지만 있지 실행할 능력은 안 되는 허무맹랑한 말이었지만 뭐 어떠한가.

“오케이. 계약 성립이야.”

“응, 성립이야.”

내 말을 따라 하며 애런은 머리를 묻었다.

나는 여전히 붙어 있는 두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헨리 일행이 우리 쪽으로 들어와서 같이 움직이게 되는 건가?’

헨리라는 저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뭔가 찝찝해.

하지만 내가 데일과 함께 하는 이상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만약 내가 헨리가 싫다고 데일에게 말한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헨리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준 데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냐, 그러지 말자.

나랑 데일은 이해관계로 얽힌 사이인 반면, 저쪽은 아주 오래전 형성된 신뢰 관계가 아닌가.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릴 순 없겠지.

순간 내 길잡이를 잃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해서 그런가.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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