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울렁거리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데일, 애런이 가게 안쪽에 있어요. 데리고 갈게요!”
일단 아이부터 데리고 와야지, 그러나 나는 가게로 들어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야, 통조림!”
“??”
“네 걱정에 머리가 새하얗게 됐었다고. 알겠냐!?”
두근……. 뭐지 이 두근은? 설마 동료애라도 생긴 건가.
“XX, 앞으로 굶어야 되는 줄 알았잖냐!!”
“…….”
“통조림이면 통조림답게 가만히 있을 것이지.”
“…….”
“발 달렸냐?”
아…… 두근은 개뿔. 씨.
말없이 사라졌던 게 미안해서 내가 차마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
동료애는 XX, 이거나 먹어라.
나는 히죽거리는 은발 놈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
“애런.”
될성부른 우리의 막둥이. 뒤쪽 공간으로 가 애런을 부르자, 안쪽에 잘 숨어 있던 아이가 뽀르르 달려 나왔다.
“벨! 괜찮아?”
“혼자 있느라 무서웠지?”
“응. 아, 아니.”
아니긴, 내 볼에 제 볼을 부비는 아이의 뒤통수를 사근사근 쓰다듬었다.
“용케 잘 참았네, 잘했어. 다 끝났으니까 나가자.”
애런의 손을 잡고 잡화점을 나와 길 건너편에 섰다.
데일의 옛 동료인 녹색 머리와 그의 현 동료의 말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길을 건너며 자연스럽게 그 둘의 대화로 귀가 기울었다.
“저 사람 내 직속 상관이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네놈 상관이었지, 내 상관이야? 저 새끼는 나한테 상관도 뭣도 아닐뿐더러 내 얼굴 보이냐? 어?”
헨리라고 불린 녹색 머리가 제 동료를 이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잘 안 되는 분위기였다.
그때 옥신각신하는 둘을 지켜보던 데일이 앞으로 나섰다.
녹색 머리가 양쪽을 다 아니까, 징검다리 역할을 잘 해준다면 굳이 사상자를 내지 않고도 원만한 합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데일 역시 분위기를 잘 풀어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이. 때린 건 미안하게 됐어. 지금 얼굴이 걱정돼서 그러는 모양인데, 맞기 전에도 벼룩 같은 낯짝이라 큰 차이는 없으니까 그만 씨불였으면 하는데, 어때.”
“…….”
“안 믿겨? 거울이 필요한가?”
데일이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하며 묶인 남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단검이었다.
잘 벼려진 단검의 칼날 면이 거울처럼 묶인 놈의 얼굴을 비췄다.
“거울이 없네. 그래도 잘 보이지? 벼룩 같은 네 낯짝. 봐, 맞기 전이랑 별 차이 없잖아.”
풀기는 무슨, 기름이나 붓고 앉았다.
그러자 피딱지가 붙은 얼굴 아래로 혈관이 팽창하는지, 가로등에 묶인 남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데도 별말을 쏴붙이지 않는 걸 보면, 저를 보고 생글거리는 데일이 무섭긴 무서운 것 같았다.
씩씩대던 남자가 제 동료인 헨리를 째려봤다.
“XX. 풀어, 이거!”
“풀어줄 테니까 허튼짓하지 마. 호텔에 함께 갈 거니까.”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지금 풀어줘도 되는 건가. 나는 조용히 몸으로 애런을 가리며 권총이 든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호텔에서 그냥 받아줄 것 같아?”
녹색 머리에 의해 풀려난 남자가 묶여 있던 탓에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돌리며 일어섰다.
“내 상관이었다고 몇 번을 말하냐고!”
“네 상관이었다는 게 뭐. 네놈이 무리에서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너 역시 아직 이방인이야, 씹X야.”
헨리라는 놈의 오른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주먹을 떨게 할 만큼 모욕적인 말은 이방인이었을까, 씹X였을까.
데일은 그런 옛 부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보다못해 내가 나섰다.
“저기요. 호텔인지 뭔지 안 받아줘도 되고요. 우리 편이 때린 건 미안한데 어차피 그쪽도 우리 트렁크 털어가려다 맞은 거잖아요. 서로 대충 이해하죠.”
“XX! 우린 다 호텔에 갈 거라고 했잖아!”
녹색 머리가 흥분된 모습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데일을 쳐다봤다.
‘당신의 옛 동료 상태가?’
시선의 의미를 읽었을 텐데 데일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죠 대령님?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절 여기 두고 가실 리가 없죠. 하하……. 저 여자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에 제가 그만 대령님 앞에서 불경하게 큰 소리를, 죄송합니다. 대령님, 저는…….”
기어오른 헨리의 오른손이 데일의 왼 팔뚝을 목숨줄처럼 붙들고 늘어졌다.
저 헨리라는 사람, 데일을 꽤나 의지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풀려난 남자가 데일의 눈치를 보며 내 앞으로 지나갔다.
“호텔에서 받아는 줘도 처벌은 못 피할 거다. 무리의 일원을 이렇게 때려놨는데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
-탕.
팍 튀긴 핏방울에 본능적으로 애런을 감싸며 돌아섰다.
“쓰레기 같은 새끼가 누굴 처벌한다는 거야, 감히.”
-탕탕탕.
그 뒤로 몇 번의 총성과 데일이 녹색 머리를 제지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놀라 정지했던 애런이 품속으로 파곤 들었다.
“벨.”
“응, 괜찮아. 괜찮아, 애런.”
나는 고개를 돌려 데일을 째려봤다. 저 미X놈이 네 지인이면 알아서 좀 처리하란 의미였다.
“으.”
애런이 품에서 펄쩍 뛰길래 살펴보니, 길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가 아이 쪽으로 흐른 모양이었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
“그게 사실이에요?”
“응.”
데일이 강제로 옛 동료의 흥분을 가라앉힌 후, 그와의 대화에서 얻어온 정보는 실로 놀라웠다.
낙원행 티켓이라니.
“이 길을 쭉 가면 제국 귀족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호텔이 있는데, 그곳에 생존자들이 다 함께 모여 사는 모양이야.”
“그럼 거짓말이네요. 낙원행 티켓이 정말 있었으면 왜 거기 모여 산대요? 낙원에 안 가고.”
“아직 티켓을 얻진 못했는데, 호텔의 우두머리가 얻을 방법을 안대. 어떤 물건을 찾아오면 티켓을 주겠다고 소수에게만 은밀히 말을 한 것 같아.”
‘그렇다는 건 그 우두머리도 아직은 본인 몫의 티켓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자신은 이미 티켓이 있어 언제든 낙원으로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료들 몫의 티켓까지 구해주기 위해 남아 있다?
‘정말 희귀한 성인군자거나 우두머리 몫의 티켓도 찾는다는 그 물건에 달려 있을 확률이 커.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겠지.’
“그 물건이 뭔데요?”
“자기 측근들한테만 몰래 말했다는 모양이야.”
‘그럼 저 사람은 우두머리의 측근이 되고 싶지만 아직 되지 못한 사람 정도로 보면 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빼 헨리를 쳐다봤다.
그는 우리 셋이 머리를 모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차 보닛 위에 앉아 있었는데, 제 동료에게 총을 갈겨대던 정신 나간 얼굴에서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데일, 저 사람.”
“헨리야.”
“그래요. 헨리라는 저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자예요?”
옛 동료라는 그의 소개에 조건 없는 신뢰를 보내고 싶다만, 좀 맛이 가 보이는 이 찜찜함을 지울 수가 있어야 말이지.
데일은 내 질문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을 좀 했던 거 같아.”
남자의 얼굴이 또 씁쓸해졌다.
오랜만에 만나 생사를 확인한 동료가 한쪽 팔을 잃은 상태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스트레스가 너무 크면 그런 정신 나간 표정이 나올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낙원행 티켓이라는데, 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네 생각은 어때.”
“나?”
내 질문을 받은 애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애런, 크기는 1인분에 못 미치지만 너도 당당한 우리 일행 중 한 명이라고. 의견을 내봐.”
“의견, 음…… 나는 저 사람 싫어! 저 사람 처음 보는 사람, 개새끼!”
애런, 입력이 잘된 건 알겠는데 누가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래.
본인이 큰 목소리로 말해놓고 자기가 놀란 애런이 녹색 머리의 눈치를 보며 내 뒤로 숨어들었다.
헨리 쪽을 보자, 그도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데일, 나 믿어요.”
애런의 거친 언행에 놀라 살짝 얼이 나가 있던 그가 나를 보았다.
“…….”
“헨리라는 사람. 솔직히 말하자면 영 찝찝한데, 당신이 그렇다니까 믿어보겠다는 소리예요. 나는 당신은 믿으니까.”
데일은 입이 큰 편이라 웃을 때 유독 시원한 인상을 줬다.
“역시…….”
가로로 길게 늘어난다 싶던 그의 입술이 결국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범하게 결정할 줄 아는군. 내 통조림이다.”
이로써 호텔에 가는 것으로 깨끗하게 결정된 줄 알았는데, 애런이 불퉁한 얼굴로 내 손가락을 당겼다.
“벨, 이럴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어본 거야?”
아, 그게…….
“의견을 낸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경험을 주기 위해서였어.”
“힝.”
대충 둘러댄 말에 애런은 시무룩해졌고 데일은 같잖다는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하여튼 개똥 같은 소리는 이 중에서 제일이다,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