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당신도 못 쓰는 마법 능력을 왜 전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럴싸한 설명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데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짧았다.
“몰라, 나도.”
“…….”
데일도 처음 듣는 클래스라는데 내가 더 알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전투력은 없어도 사기적인 능력이란 건 분명하니 이걸 개발해 나가야 한다는 건데…….
발전하고 있긴 했다. 빠른 속도는 아닌 것 같지만.
우측 생명력 게이지만 봐도, 게이지의 총량은 포인트가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게이지의 생명력을 담당하는 붉은 부분만 늘어날 뿐, 파란 부분은 변동이 없었다.
‘저 파란 부분을 늘리고 싶은데.’
어디에도 설명은 없으니 내 추측이긴 한데, 파란 부분은 내가 하루에 생명력을 소모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량인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물건을 몇 개 복제해서 저 파란 게이지를 다 쓰고 나면 화면에
[경고: 지금부터는 소모 자원으로 각성자의 생명력을 사용합니다.]
라고 떴으니까.
“왜 이렇게 심각해.”
데일의 말에 상념이 뚝 끊겼다.
“난 나 말고는 책임져 본 적이 없어요.”
“…….”
“근데 많이 책임져 봤을 것 같은 당신도, 누굴 책임지기 어려워서 내뺐는데. 내가 손 내밀어 데리고 오긴 했지만 나한테 누굴 책임질 능력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갑갑해졌달까.”
“…….”
“내 능력에 대해서도 파악이 잘 안 되고…… 하.”
먼저 물어놓고 아무 말도 없길래 옆을 봤더니.
이 자식, 제대로 듣지는 않고 천장을 쳐다보며 목이나 긁고 있는 게 아닌가.
하, 나도 참 사람 골라가며 진지한 얘길 해야지. 됐다.
“그래서…….”
나는 턴테이블을 끌어다 품에 안았다.
“한 시간 후에 죽는 거 확정이면, 나는 음악이나 실컷 듣다 갈 거예요.”
“…….”
“뭐 할래요, 데일은.”
“술이나 퍼마시지, 뭐.”
“풋…….”
“왜 웃는데.”
“진짜 별거 없어서요.”
그때, 애런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벨?”
“왜 일어났어, 애런. 어디 불편해?”
다가온 아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반쯤 덜 뜬 눈으로 내 품속에 턴테이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벨, 그거 틀고 싶어서 그래?”
“응. 근데 못 해.”
“…….”
애런은 까만 눈동자로 나와 턴테이블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한 발 다가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마에 닿는 아이의 볼이 보드라워 그만 웃고 말았다.
“목욕은 내가 시켰는데 포옹은 다른 사람을 해주네. 이야.”
“형아도 해줘?”
“어. 해줘.”
“잠깐만, 다 된 거 같아.”
뭐가 됐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애런은 소파로 뛰어갔다. 그리고 아이의 품엔 교도소에서 챙겨온 엘피판이 들려 있었다.
“벨 하고 싶은 거 하자.”
“이거 듣자고?”
“응.”
못 튼다고 얘길 했는데, 이해를 못 했나? 어쩌지, 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럴까 그럼, 뭐 들을까 우리.”
애런 앞에 앨범 재킷이 잘 보이도록 바닥에 엘피판을 쫙 깔았다.
애가 듣고 싶다는데, 손으로 엘피판이라도 돌리면서 노래라도 부르자는 생각이었다.
“이거.”
“이거? 그러자.”
애런이 고른 재킷은 중절모에 정장 입은 연주자가 트럼펫을 부는 앨범이었다.
버튼을 누르고 까만 엘피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리고 바늘을 그 위에 얹었는데.
“어…….”
음악이 왜 나오지.
돌아가는 엘피판 위로 바늘이 음악을 읽어 들이며 템포가 느린 재즈 트럼펫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어 애런과 데일을 번갈아 쳐다봤다.
데일도 나처럼 이해가 안 된단 표정이었다.
“데일, 이게…….”
“애런.”
“응?”
아이에게 질문하는 남자의 표정이 꽤 진지했다.
“어떻게 한 거야?”
“이거.”
애런이 내민 것은 동전 크기만 한 구슬이었다. 푸른 빛이 영롱하게 감도는 파란 구슬.
아이는 방긋 웃더니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데일, 그게 뭐예요?”
“마나핵인데, 이렇게 초소형은 처음 보는걸.”
애런이 마나핵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역시 교도소에 더 쓸 만한 물건이 있을지 모른다며 데일이 중얼거렸다.
그사이 애런이 홀로그램 박스를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박스에선 디x니 주인공들 같은 모습의 남녀가 왈츠를 추고 있었다.
“추고…… 싶어?”
홀로그램과 나를 번갈아 보는 애런의 얼굴이 너무 달떠 있어서 도저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 나 춤은 자신이 없어. 그리고 누가 들으면 안 돼서 애런, 음악 꺼야…….”
실망으로 물드는 애런의 얼굴을 못 본 척하며 엘피판 위에서 바늘을 거두려 할 때였다.
데일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한 50분쯤 남았으려나.”
“…….”
“추자, 달에 깔려 죽을 때까지.”
그가 끄는 방향으로 몸이 가볍게 일으켜져 딸려갔다. 어느새 나는 남자의 가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까는 절대 안 틀 거라더니.”
“달님께서 떨어지고 계신다며. 별수 있나. 죽자, 그냥.”
“하.”
어이가 없어서 설익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웃기는.”
데일이 내 오른손을 제 팔뚝 위에 올렸다. 왼손은 이미 그의 손바닥 위였다.
“애런, 넌 초보니까 먼저 형이 추는 거 잘 보고 배워.”
“응, 알겠어. 그런 이유면 분하지만 참을게.”
“…….”
순서를 빼앗긴 게 그리 억울할 일인가. 데일도 한마디를 얹으려다 관두는 것 같았다.
“넌 발 올리고.”
“발이요? 어디요.”
남자가 제 발등을 눈짓했다.
“불쑥불쑥 발 밟아댈 거 생각하면 아예 올리고 추는 게 나아.”
그의 크고 하얀 맨발 위에 발을 올리는 게 내키지 않아 입을 옹송그리자,
“싫으면 내가 올리고.”
어마어마한 발로 내 발을 즈려밟으려는 것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당장 남자의 발등 위로 발을 올렸다.
제가 시키는 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사선으로 말려 올라갔다.
남자가 이끄는 방향으로 가볍게 몸이 따라 움직였다. 재즈 트럼펫 선율이 느려서 다행이었다. 느린 음악 속에서는 아주 천천히 움직여도 춤이라고 고집부릴 수 있으니까.
“푸핫.”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와 그의 가슴에 코를 묻고 말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처음 만나서 계단 아래 있던 게 생각나네요.”
“…….”
“나 살려준 거 후회 안 하죠? 이렇게 죽기 전에 춤춰줄 수도 있고.”
“말은 바로 해라. 내가 춰주는 거다.”
“애처럼 삐딱하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일의 손을 놓았다.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 작은 분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형이랑 추는 거 잘 봤어?”
“응!”
“좋아. 저와 한 곡 추시지요.”
꼬마 신사에게 정중히 춤을 신청하자, 작은 손이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았다.
“어, 근데…….”
애런은 바닥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애런. 무슨 일인데? 말해봐.”
“내 발 너무 작아서 벨이 발을 올릴 수가 없어…….”
“아.”
아이가 성인 남자를 어떻게 다 따라 할 수 있겠니.
나와의 춤을 마친 데일은 어느 틈에 부엌으로 간 건지, 잔에 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넌 형 따라 하려면 100년은 이르다, 꼬마야.”
손에 든 잔을 입안으로 기울이며 남자가 주제넘은 짓이라는 듯 얘기하자, 애런의 작은 어깨가 더 폭 처졌다.
저놈은 끝마무리가 항상 저딴 식이다.
나는 고개 숙인 애런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너 잘못 알고 있어. 남자 발이 아래가 아니라, 큰 발이 아래 하는 거야. 자.”
“그래도 돼? 벨, 발 아프지 않을까?”
“전혀.”
개나리꽃처럼 다시 피어난 얼굴로 조심스레 발을 올리는 아이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사실 왈츠라기엔 부족했다.
데일이랑 췄을 때야, 왈츠를 아는 그가 나를 이끌었다지만 나랑 애런은 둘 다 왈츠를 몰라서.
그래서 왈츠라기보단 그저 천천히 빙글빙글 돌면서 좌우로 함께 몸을 흔드는 것에 가까운 몸짓이었지만.
“좋아, 춤.”
주홍빛 촛불 아래 아이의 두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데, 몸짓이든 춤이든 어떠한가. 아이가 이리 기뻐하는데.
“나도 좋아.”
“진짜 좋아, 춤.”
“응, 나도 진짜 진짜 좋아.”
“헤헤.”
‘아, 몰라.’
내가 너를 책임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만난 게 아닐까. 머리 싸매봤자 도움도 안 되는 고민은 이제 집어치우기로 했다.
애런은 춤을 추는 내내, 계속 나를 빙글빙글 돌리고 싶어 했다.
똑같은 줄무늬 양말을 신고 올라선 작은 발이 너무 귀여워서 봐줬는데, 슬슬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데일, 애런이랑 춤추는 영광을 그쪽이랑 나누고 싶은데요.”
데일은 여전히 식탁에 기댄 채 이쪽을 보며 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너 혼자 실컷 누려.”
개자식, 나 허리 아프단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일하고 오래오래 추다 끝에 가서 애런한테 추자고 할 걸 그랬다.
“벨.”
“응?”
“저거 봐.”
홀로그램 박스에선 아직도 애런이 켜둔 왈츠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춤출 땐 상대방 보는 거야.”
“으응…….”
마지못해 대답하자 애런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폈다.
행복해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죽자 죽어.
그날 밤 나는 허리가 끊어져 죽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