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애런은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갔다.
오늘 그들이 묵기로 한 숙소는,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부엌과 욕실 등이 둥글게 붙어 있는 원룸 형태의 공간이었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널브러진 물건에, 떠다니는 먼지로 더러웠던 곳이었는데.
공간은 어느 정도 깨끗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거실 중앙에 다다라 소파의 앞을 보자,
“…….”
여자가 소파 등받이에 다리를 걸치고서 물구나무선 것처럼 거꾸로 잠들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쓰러진 밀대걸레와 네모난 물건, 까맣고 둥그런 데다 납작한 물건이 보였다.
“참…… 신기하다.”
데일의 혼잣말에 애런 역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른 자세로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보니까 이곳을 혼자 청소하고 지쳐 잠든 것 같은데, 저 자세로는 편한 숙면이 어려울 것 같았다.
살금살금 다가간 애런은 어딜 어떻게 잡고 몸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이 저 자세로 언제까지 잘 수 있는지 궁금하네.”
“벨, 피 쏠릴 텐데…….”
“자게 놔두고 가자. 배고프지?”
애런은 제 손을 잡아끄는 데일의 손에 이끌려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소파를 흘깃거렸다.
소파 등받이 위로 솟은 발에 신겨진 양말이 제 양말과 똑같았다.
❅
애런은 식사를 준비하는 데일을 뒤로하고 식탁 의자에 앉아 거실을 주시했다.
벨이 일어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엌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자마자 번쩍 일어난 여자가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으며 다가왔다.
애런은 식탁 의자에 앉아 벨을 올려다봤다.
“와, 언제 잠들었지.”
“벨, 깼어? 더 안 자?”
“응. 씻기도 해야 하고. 이따 잘래.”
목을 돌리고, 기지개를 켜던 벨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저를 향해 시선을 맞추더니 빙긋 웃었다.
애런은 조심스럽게 그 웃음을 흉내 냈다.
“애런, 머리 다 말랐나?”
머리카락을 헤집는 타인의 손가락은 기분이 좋은 거구나.
애런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앞머리가 너무 긴데, 눈 안 찔러?”
“…….”
대답을 안 하고 앉아만 있자, 벨이 방금 제 머리를 묶었던 머리끈을 풀어냈다.
“짠. 가위를 찾아서 앞머리를 자르기 전까진 일단 이렇게 하자.”
정수리에서 하나로 묶인 머리가 분수 모양으로 흔들거렸다.
오, 확실히 눈을 찌르지도 않고 간편하네.
애런이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자, 벨이 또 예의 그 부드러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애런은 식탁에서 두 다리를 쭉 뻗었다.
벨이 데일 옆으로 가 서자, 애런도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오, 저녁 준비해요?”
“어. 청소했더라.”
“네. 좀 깨끗한 곳에 있고 싶어져서.”
“아주 광이 나던데. 하루 이틀 묵을 곳에 뭐 하러 힘을 빼냐.”
“아 그냥…… 비효율적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퍽이나. 씻고 오기나 해.”
“근데 무슨 요리 해요?”
“고추요리. 제일 자신 있는 요리 중 하나지.”
“아. 절인 할라피뇨 요리인가 봐요.”
“…….”
“…….”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등을 보며 애런도 다정해 보이는 그 사이에 끼고 싶었다.
입을 오물거리던 애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절인 할라피뇨가 뭐야, 벨?”
“어, 작고 쪼그라들어서 볼품 따윈 없는 고추 피클.”
“하 참, 보기도 전에 겁이 나나 봐?”
“겁이요? 뭔 겁이요.”
“나도 볼래, 고추 피클!”
“…….”
“…….”
궁금해서 외쳤는데.
보여달라는 말이 과한 요구였을까.
다정한 대접에 그만 착각을 했나.
표정이 싸하게 굳는 벨을 보며 애런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당황한 벨과 다르게 데일의 옆얼굴은 웃고 있었다.
조리도구를 양손에 든 채, 데일이 애런의 앞에 와 섰다.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궁금한 건 봐야지. 형 손 없으니까 여기 벨트 잡고 당겨봐.”
“?? 여긴 우주가 있는 곳이잖아 형.”
“하…… XX. 아, 이런. 내가 애 앞에서 욕을……. 애런, 미안.”
왜 갑자기 벨은 힘이 빠졌을까.
터덜터덜 욕실로 향하는 벨의 기운 없어 보이는 어깨를 보며 애런은 고심에 빠졌다.
“왜, 신경 쓰여?”
“응. 기운 없어 보여.”
“냅둬도 돼.”
데일이 돌아서 조리를 이어나갔다.
남자의 넓은 등을 보며 애런은 둘의 사이가 헷갈렸다.
‘오락가락해서 알 수가 없네.’
❅
씻고 저녁을 먹고, 남은 일이라곤 곤히 자는 일밖엔 남지 않은 늦은 밤.
애런은 벌써 소파 등받이에 기대 곯아떨어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앉아 두꺼운 겨울 커튼을 살짝 열어젖혔다.
스산한 달빛에 감싸인 도시 정경은 뿌옜지만, 건물의 높낮이는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난 마을에선 찾을 수 없던 고층건물이 여럿 보였다.
플로라 할머니 댁이 있던 곳이 ‘마을’에 가까웠다면 이곳은 ‘도시’에 가까웠다.
차를 타고 며칠을 달렸을 뿐인데, 마치 한 세기가 지난 듯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이 달라졌으니.
이럴 수 있는 일인가.
우리가 묵고 있는 이 숙소만 해도 그랬다. 이곳은 5층짜리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이었다.
“…….”
한참을 내려다보다 커튼을 닫았다.
“많이 다르지?”
“그러네요.”
소파 위 잠든 애런을 흘깃 보며 다가온 데일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제국 교도소가 들어서기 전엔 이렇게 발전한 곳이 아니었을 거야. 로사 마을이랑 비등비등한 수준이었겠지. 근데 제국 교도소가 들어왔으니까.”
교도소를 관리했던 제국 귀족 출신들은 교도소에서 가까운 이곳에 터를 잡았을 것이라 했다.
어디 관리자들뿐인가.
일반 제국민이 다수긴 하지만, 교도소 죄수 중엔 제국 귀족 출신들도 있었다.
그들과의 면회를 위해 제국민들은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게 이곳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거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제국민들은 귀족이 아니더라도 타국보다 월등히 부유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벌어질 수 있나 싶어서 자꾸만 커튼 밖으로 시선이 향했다.
숙소로 들어올 때 보았던 화려한 상점가 거리, 넓고 잘 정비된 도보, 가로등까지.
시대를 뛰어넘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도 여기 있었던 건가.’
나는 전기가 없어 무용지물인 턴테이블을 괜히 손으로 쓸었다.
있으면 뭘 하나 듣질 못하는데.
“그렇게 아쉬워?”
“네.”
“어차피 전기가 들어왔어도 음악은 못 틀어.”
식사 후에도 끄지 않고 켜놓은 초의 불빛이 작은 공간에 안개처럼 스며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 초에 시선을 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음악 틀면 그걸 듣고 어디서 나타난 괴한들이 우릴 죽일 테니까?”
“…….”
“지금 음악을 틀면 괴한들한테 발각돼서 그들이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대략…… 한 시간?”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럼 우리 한 시간 후에 죽겠네요.”
그러자 그가 옆에 앉은 날 쳐다봤다.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단 머저리 같은 얼굴이다.
“그럴 일은 없어. 안 틀 거니까.”
“그럼 이건 어때요. 한 시간 후에 달이 떨어져요. 그래서 우린 다 죽을 거예요. 한 시간밖에 안 남은 거죠. 그럼 뭐 할래요, 한 시간 동안.”
“너 나 몰래 술 마셨어?”
“없는 술을 어떻게 마셔요.”
“찬장에 술 있더라. 먹을 건 싹 다 쓸어갔는데 술병은 무거웠나 보지.”
“그걸 왜 이제 말한대.”
“…….”
소파 위 잠든 아이의 얼굴 위로 시선을 던졌다.
걱정 없이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의 얼굴이, 어여쁘기도 하고…… 저 어린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입이 썼다.
“나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한 번 버렸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쪽 이런 기분이었어요?”
천천히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는 남자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까, 놈은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눈치였다.
“아니라곤 못 해.”
“그랬구나. 이제야 이해되네.”
“기특하네. 그 순간을 이해받게 될 줄이야.”
그래도 네가 그런 식으로 겁줘서 쫓아내려 든 건 이해 못 하지만.
아까 불러낸 시스템 창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 최후의 낙원을 찾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여정을 위한 새로운 일행을 합류시키세요. (?/1)
⚠오류]
숫자 0은 물음표로 바뀌어 있고 퀘스트 끝엔 못 보던 오류 표기가 생겨났다.
‘어째서.’
애런은 애런대로 함께하고 메인 퀘스트를 깨기 위한 일행은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혹시나 해서 켜본 시스템 창은 저리 바뀌어 있었다.
‘그럼 애런을 새로운 일행으로 인식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애런을 일행으로 인식한 거라면 히든 보상은 안 줘도 메인 퀘스트는 멀쩡히 완료되어야 했으니까.
엄청 간단한 퀘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 퀘스트부터 이렇게 막히다니.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행으로 아이가 생긴 만큼 내 능력치를 빨리 올려야 할 텐데.
‘내 정보 보여줘.’
[이름: 벨
클래스: 종의 요정(Lv.2)
스킬:
‘탐색(Lv.2)’
‘연민(Lv.2)’
하위 분류:
‘연민-복제(Lv.2)’
❯필요에 따라 대상을 복제한다.
‘연민-치유(Lv.2)’
❯필요에 따라 대상을 치유한다.]
‘근데 왜일까. 마법 계열은 다 사라졌다는데 왜 나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주어진 능력이니 계속 사용해 왔지만 의문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