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우리처럼 하루 묵을 숙소가 필요했던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들어와서 필요한 물품을 챙긴 후 떠난 사람일 수도 있다. 거실엔 그런 사람이 왔었던 흔적이 가득했다.
이곳저곳 찍힌 발자국이라든가, 열린 수납장이라든가, 헤집어져 있는 물건들.
아, 이왕 먹는 거 좀 깨끗한 곳에서 밥 먹고 싶다.
그러나 오래 머무를 공간도 아니고, 잠깐 묵고 말 공간을 힘들여 청소한다는 게 아무래도 낭비처럼 느껴졌다.
“…….”
다시 식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메뉴를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 하나씩 부족하다 느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선한 채소와 야채가 없잖아.
물론 야채 통조림이 있긴 하지만 신선한 생야채에 비할 수 있을까.
가방에 들어 있는 씨앗 중 야채 씨앗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식물을 기르는 일은 어딘가 한곳에 정착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와, 낭비하고 싶다.”
내 체력 낭비할래. 뭐 어때.
그 즉시 몸을 일으켜 욕실로 걸어갔다. 데일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데일, 물어볼 게 있는데요.”
“어.”
“우리 내일 여기 하루 더 묵을 거라고 그랬었죠.”
“어.”
“알겠어요.”
오늘 살펴보지 못한 구역을, 그는 하루 더 머물면서 찾아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일 하루만 더 찾아보자는 그의 말에 오케이를 했으니 우리는 내일 밤까지 이곳에 묵다 여길 떠날 예정이었다.
좋아, 역시 그렇다면 청소다.
욕실 문 앞을 떠나려는데, 욕조 안에서 목욕을 즐기는 두 남자의 도란도란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이제 돌아앉아.”
“응.”
애런이 물장구라도 치는지, 연이어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욕조가 두 사람이 들어가 물장구를 칠 만큼 넓지는 않았는데, 저러다 데일한테 한 소리 들으려나.
“애런.”
“응.”
“대답 잘하네. 이름 마음에 들어?”
“응! 내 이름도 마음에 들고, 데일이랑 벨 이름도 마음에 들어.”
“내 이름까지 마음에 들어 해주다니 영광인데.”
“헤헤.”
수줍게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욕실 문 너머로 전달됐다. 그 웃음소리가 욕실 앞을 떠나려는 내 발목을 붙들었다.
조금 더 이 대화를 듣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욕실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몸을 기댔다.
“근데 너 교도소에 오기 전 기억은 전혀 없어?”
“응.”
“그럼 가장 오래된 기억은?”
“가장 오래된 기억은…….”
말끝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아이의 목소리는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됐어.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괜찮아.”
데일이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리 봐도 5살에서 6살은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제 나이를 2살이라고 하니까. 그도 나도 이상하게 여기던 와중이었다.
사실 이상한 게 어디 나이 한 가지인가. 아이가 왜 교도소 지하에 갇혀 있던 건지, 저 작은 아이가 그곳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홀로 생존한 것인지, 의문투성이였다.
“애런, 됐다니까. 괜찮아. 기억나지 않는 걸 기억하려고 애쓸 필욘 없는 거야.”
그는 아이를 추궁하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나 역시 저러지 않았을까 싶어 조용히 이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데일. 그럼 나 6살 할래.”
“왜. 너 2살이라며. 빨리 커서 뭐 하게.”
“데일처럼 키도 크고…… 다 커지고 싶어.”
“하핫, 참……. 나이만 바꾼다고 몸이 커지냐. 커지면 뭐가 좋은데. 들어서 좋은 게 있으면 6살로 해줄게.”
“손도 커지고, 어…… 손이 커지면 많이 잡을 수 있고. 발도 커져. 다리도 길어지고. 그럼 빨리 뛸 수 있어. 또…….”
풉.
아무리 생각해도 2살은 아니지만 아이다운 순진한 발상이 귀여웠다.
이쯤 엿들었으면 충분하지.
모레 떠난다는 걸 확인도 했으니 내 할 일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또.”
“…….”
“너 여긴 왜 쳐다보냐.”
“데일, 거기는 크면 뭐가 좋아?”
여기랑 거기라 하면 거기인가.
“여기는…… 하하. 여기는 사실 가장 커야 하는 곳이지.”
“왜??”
“왜냐면 여긴 우주거든.”
우주라니. 미X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주?”
“응 우주. 넌 소우주.”
“와, 나도 그럼 크면 데일처럼 소우주에서 우주가 돼?”
“어, 그건, 냉정한 사실을 전달하자면 커진다고 누구나 우주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
“헉 그럼 나는…… 20살이 되어도? 100살이 되어도?? 우주가 없어? 우주 못 가져?”
“하하하하하. 걱정할 거 없다, 애런. 나 같은 사람은 상위 몇 퍼센트라서 다수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다.”
“힝…….”
“넌 그냥 지금 태어난 그대로 잘 크면 돼. 이제 나갈까?”
뒤이어 물이 크게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내 귀.
숙소를 청소하기 전에 내 귀부터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더러워진 귀를 후비며 자리를 떴다.
❅
애런은 욕조에 걸터앉아 데일을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인정사정없이 털어대던 남자가 일순 수건질을 멈추고 애런을 흘겨봤다.
“꼬맹이 물기 있는 곳에 그렇게 앉아 있다간 미끄러진다.”
“아, 응.”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자, 데일이 제가 털던 수건은 어깨에 둘러놓고 새 수건을 꺼내 들었다.
“눈 감아봐.”
“응.”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거센 수건질은 성인 남성 한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작은 머리통을 쥐고 어찌나 퍽퍽 수건을 비벼대는지, 애런은 저도 모르게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히힛.”
“왜 웃어 꼬맹이.”
“그냥.”
“실없긴.”
무릇 어린아이에겐 더 살가운 수건질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지점에서 헛웃음이 나온 것이었지만 애런은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함께 욕실에 있는 동안, 그는 꽤나 다정하고 친절하게 자신을 씻겨주었으므로.
데일이란 남자는 매서운 눈매에 시퍼런 파란 눈, 콧등에 가로로 난 흉터까지, 무서운 인상이었다.
덩치가 좋은 몸 군데군데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꽤 여럿 보였다.
손도끼를 들고 나타났던 첫인상만 생각하면 애런은 지금도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했던 행동들을 보면, 이 형 꽤 다정한 사람일지도?
“자.”
데일이 제 어깨에 둘러멨던 수건까지 총 2장의 수건을 애런에게 내밀었다.
애런은 얼떨결에 수건을 받아 들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도 닦아달라는 말인가?
“이번엔 내 차례야?”
“응?”
“형이 나 닦아준 것처럼, 나도 형 닦아줄게.”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깨를 가볍게 들어 보였다.
“아니. 나 말고 욕조.”
“욕조를??”
“어. 욕조랑 세면대 곳곳에 물 튄 곳 잘 확인해서 싹 닦고 나와, 애런.”
“…….”
“할 수 있지? 이 정도는 보통의 어린이도 해낼 수 있는 1인분이야.”
“어…… 응…….”
“그래. 먼저 나간다.”
그러더니 바로 등을 돌렸다.
양손에 반쯤 젖은 수건 두 장을 들고서 애런은, 욕실을 나가는 데일의 등을 향해 외쳤다.
“근데 형.”
“왜.”
“그렇게 나가면 벨이 놀라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는 물기만 닦았지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였으므로.
욕실에 튄 물기를 닦는 것은 수건 한 장으로도 될 것 같았기에, 애런은 나머지 수건 한 장을 데일에게 내밀었다.
형의 우주만이라도 수건으로 가리고 나가란 뜻이었다.
제 앞으로 내민 수건을 보던 데일이 씩 미소 지었다.
“어, 실수야, 이건.”
누가 실수를 의식한 채로 해.
휙 문을 열고 욕실을 나가는 데일의 등을 보며 애런은 뻗었던 팔을 내렸다.
왜 저러는 거지.
알 수 없는 남자다.
❅
꼼꼼히 욕실 청소를 마친 애런은 천천히 욕실 문을 밀었다.
욕실 문 아래 잘 개어진 옷이 보였다.
‘내 건가?’
옷을 들어보자 여자가 입고 있던 옷의 축소판이었다.
옷 사이즈가 아무리 봐도 데일이나 벨이 입을 사이즈는 아니었다.
‘나 입으라고 준 옷이 맞나 보다.’
애런은 혹여 새 옷을 욕실 바닥에 떨굴까 조심하며 옷을 입었다.
“…….”
옷은 제 몸에 꼭 맞았다.
목둘레가 너무 넓어서 가슴까지 줄줄 흘러내리지도 않았고, 교도소에서 입던 옷은 바지가 너무 길어 자주 넘어졌는데 새 바지는 제 발목에서 딱 끊겼다.
애런은 팔도 쭉 뻗어보았다.
손목에서 딱 끊기는 팔의 기장이 군더더기 없이 산뜻했다.
옷은 더할 나위 없이 포근했고.
기분 좋다.
포근해진 건 몸인데 어쩐지 마음까지도 전염된 느낌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애런은 욕실을 나섰다.
나가자 어느새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은 데일이 1인용 소파에 앉아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가가며 그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일이 보는 것은 긴 3인용 소파였다. 저게 뭐지, 애런은 눈을 찌푸렸다.
소파 등받이 위로, 머리 대신 줄무늬 양말을 신은 발 한 쌍이 올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