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머리카락이 멋대로 자라나기만 해 비죽비죽하고 덥수룩한 아이의 뒤통수를 보던 나는, 아이가 여전히 얇은 죄수복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스킬을 사용했다.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불우이웃을 발견하였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불우이웃에게 희망의 종소리를 울려주세요.
탐색된 불우이웃: ???]
‘이름이 물음표로 떴네.’
내가 아이의 대답을 이름으로 인정하지 않아서인가.
어쨌거나 이 망할 종놈은 나 빼고는 다 된다.
이름이 물음표로 떴길래 혹 안 될까 걱정했는데, ‘연민’ 스킬을 이어 사용하자 아이는 어느새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가 새 옷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팔다리를 꼼지락대자, 데일이 아이를 편하게 고쳐 안았다.
“그 이름도 많이 쓰이긴 하는데, 새로 짓자. 원하는 거 있어?”
아이가 고개를 젓자, 데일은 나를 바라봤다.
“그럼 저 누나한테 지어달라고 하자. 물론 네가 저 누나가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도 돼.”
아이가 이번엔 조금 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하. 이거 고맙네.
두 남자가 같은 눈높이에서 날 빤히 쳐다봤다.
음.
“보이, 어때요?”
양심 없이 대충 지었지만, 쟤들이 알 턱이 없는데, 뭐.
“보이래. 어때?”
데일의 물음에 아이는 말없이 불만스러운 듯 작은 입을 오므렸다.
영어를 몰라도 대충의 냄새는 맡는 건가?
“그런 이름은 너나 쓰래.”
“…….”
하.
“그럼 키드?”
“…….”
“…….”
아, 몰라. 애니까 애런 해.
“애런. 이것도 맘에 안 들면 둘이 상의해요.”
“애런? 괜찮다. 꼬맹이, 그거 할까?”
“응.”
“됐네. 가자 그럼.”
교도소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한 데일의 뒤를 따랐다.
남자의 어깨 위에 제 고개를 올려놓은 아이의 시선이 뒤따라 걷는 나를 향했다.
아이의 머리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옆을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았는지, 데일이 무심히 아이의 머리를 털었다.
“와, 얘 머리 터니까 냄새 더 나.”
“거기 앞에 좀 닥치고 걷죠.”
“저 누나 입 되게 험하다. 뭐 먹고 크면 저렇게 될까.”
“…….”
아이의 눈동자 색은 깊이를 모를 까만색이었다. 데일의 어깨 옆으로 작은 손을 내게 뻗길래, 나는 달려가 그 손을 잡아주었다.
[불우이웃(???)의 이름이 수정됩니다.
불우이웃: 애런]
“나도 똑같은 옷이야?”
애런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데일이 무심하게 답했다.
“어, 다 똑같은 옷이야. 저 누나가 해준 거야.”
“…….”
애런은 반응이 빠른 아이는 아니었다. 데일의 말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아이가 한참 만에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감정을 드러냈다.
웃는 아이의 얼굴 위로 시스템 창이 떴다.
[스킬 사용 대상이 행복해합니다.
획득한 행복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팔을 번쩍 들더니, 애런은 환한 얼굴로 제 겨드랑이를 팡팡 쳤다.
“겨드랑이 숨길 수 있어!”
“하하, 그러네. 이제 안 보이네.”
제 콧등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보던 아이가, 나를 보고선 하얗게 웃고 있었다.
❅
교도소를 빠져나왔을 땐 이른 저물녘이었다.
우리 셋은 가장 가까운 마을을 향해 차를 몰았다.
이곳의 날씨는 성격이 변덕스럽기가 누구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거다. 팔랑개비처럼 성기게 내리던 눈은 어느 틈에 자취를 감추었고, 먹구름은 천천히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열린 차창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사이드미러에 비쳤다.
“손에 뭐가 잡혀?”
눈이 녹는 것이 그리도 신기했을까. 눈이 내리는 동안 아이는 내내 창밖으로 내민 손을 쥐었다 폈다.
눈송이를 잡았다 사라지고, 다시 잡았다가 사라지고. 손이 시리지도 않은지, 아이는 손을 쥐었다 펼 때마다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손이 빨간데, 얼굴도 빨갛고. 찬 바람을 오래 맞은 아이의 양 볼이 불긋했다.
이제 눈이 그쳐, 더 이상 손에 쥘 것도 없으니 창을 닫았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여전히 제 손바닥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빛.”
“빛?”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봤다. 차가 먹구름을 뚫고 나온 빛줄기 아래를 달릴 때마다, 아이의 손바닥이 환해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아…….
빛을 잡는다는 아이의 말에 데일도 힐긋 뒤를 돌아봤다.
“좀 춥지만 놔두자.”
“그래요.”
데일의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어린이의 감성을 알아채고 지켜줄 줄도 알다니. 자식, 나이를 몸으로만 먹은 건 아니구나.
“창문 닫으면 셋에서 둘이 될지도 몰라. 악취로 한 명이 질식사할 예정이거든.”
“와, 그 정도로 힘들었군요?”
야, 이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는 인간아.
바로 종이봉투에서 면회신청서를 꺼내 북 찢어 구긴 후 놈의 양쪽 콧구멍에 쑤셔 박았다.
“좀 낫죠?”
데일은 별 반항 없이 코에 종이를 끼운 채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 젖혔다.
“역시 날 신경 써주는 건 우리 통조림뿐이구나.”
“한마디 더 하면 미간까지 종이를 쑤셔줄게요.”
“그렇게까지 챙겨줄 필욘 없는데.”
대답 대신 종이를 구겼다.
“하하하하, 조용히 할게. 나 콧구멍이 따가워.”
“숙소를 찾으면 일단 애부터 목욕 시키자구요.”
“그래.”
사이드미러로 뒷좌석을 살폈더니 애가 보이지 않았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아이는 뒷좌석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맞닥뜨린 얼굴에 놀라 움찔했더니 아이 역시 살짝 몸을 떨었다.
“이름이…… 통조림이야?”
“푸핫.”
아이의 순진한 물음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 데일의 코에서 발사된 종이 뭉치가 내 허벅지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아오, 진짜.”
내가 질색하며 몸을 뒤로 물리자,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빈 한쪽 콧구멍을 엄지로 눌렀다.
“자, 사랑스러운 통조림 양에게 하나 더. 훅.”
“아, 제발 좀!”
“아하하하.”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에 투닥거리던 그와 나 모두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아이의 접힌 눈꼬리엔 눈물방울까지 달려 있었다.
그래, 나는 어른이다. 애 앞에서 유치하게 뭐 하는 거람.
“벨.”
“응?”
“네가 물어봤잖아, 내 이름. 통조림 아니고 벨이야.”
“아…… 벨, 벨이구나. 벨…….”
벨, 벨…….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되뇌는 아이가 귀여웠다.
“이 아저씨는 데일.”
다시 운전에 집중하는 데일을 가리키며 말해줬다.
“이 아저씨는 데일?”
“응.”
“이 아저씨는 데일. 이 아저씨는 데일.”
“풉.”
그러자 데일의 시선이 백미러 속 아이에게 가 닿았다.
“쟤가 순진한 얼굴로 먹이는데? 내가 왜 아저씨야.”
“아저씨는 데일! 아저씨는 데일!”
입맛을 다시는 데일의 표정을 읽고는 더 신이 났는지 아이는 좌석에 앉아 엉덩이까지 들썩거렸다.
그가 운전대를 다잡으며 끝내 한마디를 던졌다.
“아, 이래서 애는 질색인데.”
아오, 애 시무룩해진 표정 봐.
급히 주눅 든 아이를 향해 턱짓하자, 그가 마지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몇 살인데. 몇 살인데 내가 아저씨냐.”
“나이?”
“응, 애런 나이. 애런은 몇 살이야?”
음, 겉보기엔 한 5, 6살쯤 되었으려나 싶었는데.
그러나 아이는 작은 손을 쫙 펴더니.
“2살.”
손가락 세 개를 꼽았다.
❅
“데일.”
욕실 앞에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는 막 욕조에다 마지막 끓인 물을 붓고 욕실을 나서던 중이었다.
“씻을 거죠?”
“…….”
“먼저 씻을래요?”
그가 뒤로 시선을 던졌다.
열린 욕실 문 사이로, 찰랑찰랑 넘칠 정도는 아니지만 몸을 푹 담글 정도의 물이 담긴 욕조가 보였다.
“먼저 씻어. 난 찬물도 상관없으니까.”
“아뇨. 제가 찬물에 씻을게요.”
“하루 종일 찬 데 있다가 겨우 잠깐 욕조에서 몸 덥히는 걸 포기하겠다고? 무슨 변덕이야?”
“하하하, 오랜만에 냉수마찰이나 해볼까 싶어서요. 그리고 욕조에 물 채운 건 데일이잖아요. 양심을 지키고 싶달까요?”
“…….”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인 그는 날 내려다보다가, 멀리 오도카니 서서 우리를 쳐다보는 애런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저거 때문이냐.”
“…….”
“욕조에 물도 내가 채우고, 애도 내가 씻기고? 양심을 지키긴 개뿔. 너는 양심이라곤 한 점이 없다?”
눈치 빠르긴.
나는 두 손바닥을 합쳐 그에게 들어 보였다.
“데일은 애를 돌봤던 경험이 있잖아요. 난 없단 말이에요. 어린애를 씻겨본 적이 있어야지……. 너무 어색할 것 같아요.”
“…….”
“좀 해줘요. 다음엔 내가 할게요.”
그러자 들어주지 않을 것처럼 내내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던 그가 아이를 불렀다.
“애런, 이리 와.”
“응.”
“사내 대 사내끼리의 합동 목욕 훈련이다. 잘할 수 있겠지?”
“응!”
“그럼 즉시 벗고 들어간다. 실시.”
“응.”
두 남자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훌렁훌렁 벗기 시작하길래, 부러 목이나 주무르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툭툭 바닥에 옷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욕실 문이 마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벨은? 같이 안 해?”
“아…… 그게 애런, 나는…….”
“저 누나는 몸을 보일 자신이 없대. 군살이 많은가 봐.”
“호오…….”
호오라니, 애런.
“아니, 나한테 군살이 있는지 없는지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어? 그리고 있든 말든 뭔 상관이야??”
“알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탁, 문이 닫혔다.
나는 옷 위로 쓱쓱 내 허리를 문질렀다. 분명, ‘허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내 손에 잡혔다. 군살이 어디 있어, 내가.
“무슨 해골 뼈다귀가 이상형이신가.”
나는 닫힌 욕실 문을 향해 가볍게 눈을 부릅떠 준 후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엔 차에서 오늘 밤 묵을 이곳으로 들어올 때 꺼내왔던 각종 저장 음식이 가득했다.
“이걸로 뭘 해볼까. 음…….”
식탁 의자에 앉아 메뉴를 고민하던 차에, 숙소 거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