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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28)화 (28/108)

28화

내려온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천장 위에서 발걸음 소리가 한 방향으로 멀어졌다.

“…….”

금방 오겠지?

혼자 움직이기보다 데일과 합류하는 게 우선이라 여긴 나는 그 자리에서 요가 다닐 때 배운 나비 자세로 틀어 앉았다. 양반다리랑 비슷한 자세였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일에나 힘쓰자 싶었다.

‘아이 씨.’

그러다 고개 숙인 시체에 다시 시선이 닿았다. 앉아서 보니까 눈높이가 비슷해져 더 기분이 나빴다. 살짝 이쪽으로 틀어진 고개 때문에 감긴 눈꺼풀이 잘 보였다.

‘평온, 평온, 평온하자, 평온해. 저건 죽은 놈, 죽은 놈은 말이 없고 움직임도 없지.’

그러나 나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산 놈이다.

내가 더 세. 겁먹을 거 없지, 암.

나는 나비 자세로 앉아, 오른쪽 무릎 위에 권총을 올려두고 있었다. 사실 마음의 평온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세보다는 손에 든 권총의 힘이 컸다.

‘정문에서 한 발 쐈으니 탄창에 남은 탄환은 총 14발.’

내가 적 한 명을 눕히는데 대략 몇 발의 총알을 소모할까.

세바스찬 할아버지라면 백발백중의 명사수니 14발로 적어도 열 놈 이상을 눕힐 거 같은데 나는…….

‘움직이는 표적을 맞혀본 적은 없으니 사실 상대가 쏘는 총알을 피해서 목숨만 부지해도 200점 아니냐.’

그렇잖아?

나는 고개를 천천히 왼쪽으로 돌렸다. 중간에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전등을 빼면, 그 외의 전등은 다 나갔는지 긴 복도는 끝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주기적으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제 존재를 알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막다른 벽이다.

내 엉덩이 아래서 뿜어져 나오는 레이더망 같은 금빛 물결이 막힌 벽을 타고 천장을 기어오르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여긴 긴 복도의 끝인데, 사방을 다 둘러봐도 1층에서 내려와 열고 들어올 만한 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 아니라면 저쪽이겠지.

데일이 지하로 들어온다면 문은 어둠 속에 가려진 저쪽에 있을 거다.

‘그리고 바깥에서 잠겼을 테고.’

그러니 겉보기엔 외상 하나 없는 저 시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여기 죽어 있는 게 아니겠냐고.

그렇다는 건 적어도 이 공간에, 나가지 못하고 아사해 죽은 시체들은 있을지언정 산 자는 나뿐이란 답이 나온다.

좀 안심…….

-도르르르.

도르르?

왜 공 굴러가는 소리가 나지.

누구인가? 지금 누가 소리를 내었어? 나는 아니었단 말이다, XX…….

‘굶어 죽은 시체뿐인 게 아냐? 누가 있어?’

하하하, 젠장. 잊고 있었다.

나는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바닥의 금빛 물결을 직시했다. 고꾸라진 시체 옆, 분명히 닫힌 상태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틈으로 나를 훔쳐보던 홍채 한 쌍이 그 위를 타고 흐르는 물결에 반사되어 빛났다.

-타다다다.

타인의 시선이 급하게 안쪽으로 숨어들어 제 존재를 감췄다.

나는 비어버린 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나 진짜 여기 와서 사람 눈 쳐다보는 일에 트라우마 생기겠어, 이러다가.’

-끼익.

녹슨 문을 여는 순간, 시스템 창이 떴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여전히 발밑에서 웅웅거리던 빛이 종적을 감췄다. 예기치 못한 암전에 급하게 안쪽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았다.

-팅.

나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한 바퀴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방의 모습은, 크기가 1층의 교도소장실과 비슷했다.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물건들이었다.

‘어?’

무언가 딱딱한 물건이 발끝에 걸렸다.

발끝에 차인 물건을 향해 라이터 불빛을 비추자, 그것은 어린애들이 타고 노는 흔들 목마였다.

그러고 보니 복도에서 내가 천장을 향해 던진 것은 세발자전거였지 않나? 이 자식 정체가 뭐길래 이런 애들 물건이 가득한 장소에 있는 걸까.

[보상에 대한 부가 정보: 기준치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일행일 경우 히든 보상이 있습니다.]

나름 종이 선별해 추천해 준 일행 후보님이시니, 전투력 미친놈이 아닐까 하는 기대는 되는데. 전투력이 말도 안 되게 높아서 히든 보상을 백만 개 준다 해도 소아성애자는 사절이야, XX.

천천히 방의 나머지 모습을 시야에 담을 무렵, 한쪽 벽에 나 있는 문이 보였다.

내 왼손엔 라이터가, 오른손엔 총구를 앞으로 겨눈 권총이 들려 있었다. 만나자마자 면전에 총구부터 박고 대화를 시작하면 대화가 긍정적인 쪽으로 흘러갈까?

‘응, 그럴 거 같아.’

어떻게 굴러먹던 놈인지 아무 정보도 없는데, 이럴 땐 총 들고 시작하는 거지.

종이 추천해 준 사람이니 향후 도움이 될 놈이라고 추측하긴 하지만, 일행 후보지 아직 내 일행은 아니잖아.

‘허튼짓하면 쏜다.’

“저기요! 대답은 없지만 댁한테 용무가 있어서요. 들어갑니다?”

나는 문을 발로 걷어찼다. 힘껏 차인 문이 회전해 벽과 부딪히며 제법 큰 소리를 냈다.

문이 열렸다고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광경엔 역시나 사람의 형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구석에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들어오는 순간을 노리는 중인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려나.’

총이나 찌를 수 있는 날카로운 물건들. 첫 타자로 룰루랄라 저 방에 들어갔다가 푹찍 하고 죽고 싶진 않았다.

어쩌는 게 좋을까.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대치 상태인 이대로 데일을 기다려 볼까.

‘아.’

-도르르르.

옆으로 살짝 비켜선다는 게 그만 발 옆에 놓여 있던 공을 차고 말았다.

‘아까 굴러가는 소리가 났던 게 이 공이었나 보네.’

천천히 굴러간 공이 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힘이 다해 방 한가운데 터를 잡은 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사각지대에서 작고 꼬질한 손 하나가 쑥 모습을 드러냈다.

‘애?’

믿기지 않아 눈을 찌푸려봐도 그것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안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이는,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내 일행 후보님인데. 전투력 만렙이어서 내게 히든 보상을 안겨줄, 적어도 어른.

“으.”

그러나 짧은 앓는 소리와 함께, 손끝까지 힘을 준 모양인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저 팔은 분명 어른의 것은 아니었다.

“흐으.”

공을 주우려면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팔을 뻗고 나서야 깨달았는지, 애처롭게 허공을 몇 번 움켜쥐던 작은 손이 다시 사각지대로 쏙 들어갔다.

와…… 이거 말이 안 되는데, 화나려고 해.

“저기.”

“…….”

“너 말이야, 아까도 몰래 훔쳐보다가 숨고, 지금은 다 들켰는데도 왜 숨는 거야? 다 봤어 나.”

“…….”

“무서워서 그래?”

“…….”

대답도 안 하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얼굴이라도 봤으면 싶은데, 허락도 없이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애가 더 겁에 질릴 것 같았다.

“너 아까 나 몰래 훔쳐봤잖아. 험악한 인상은 아니었을 텐데, 뭘 그렇게 무서워할까.”

“…….”

“20년 넘게 살면서 얼굴로 남한테 겁줘 본 적은 없었는데, 와 이거 속상해지네.”

“…….”

계속 혼잣말을 지껄여서는 애 얼굴 보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강수다.

“너 안 나오면 저 공 들고 여기 나가버릴 거야. 나 달리기 엄청 빨라.”

“…….”

“진짜야.”

“…….”

“농담하는 줄 아나 보네. 하나, 둘…….”

“흐아, 아…… 안 돼!”

애절한 외침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막만 한 생명체였다. 정말 공을 빼앗아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작은 남자아이는 제 배 밑으로 공을 숨겼다.

공을 꼭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웅크린 모습이, 마치 발을 다쳐 주저앉은 병아리 새끼처럼 애달파 보였다.

공을 제 자식처럼 품에 안고 몸을 떨던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아, 총.’

맞닥뜨린 장면이 너무 당혹스러워 내가 총을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네.

들고 있던 총을 허겁지겁 내렸다.

주머니 속으로 사라지는 총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다시 고개를 말아 공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저 공 더럽던데.’

물론 못지않게 아이의 몰골도 더러웠다.

허름하고 얼룩진 낡은 잿빛 죄수복. 어깨선의 실밥은 다 터져서 그 사이로 겨드랑이가 보였다.

게다가 사이즈마저 아이용이 아닌 어른용을 입혀놓은 건지, 아이의 체구에 비해 목둘레가 너무 넓어서 숙인 고개를 타고 내려온 옷이 당장에라도 벗겨질 듯했다.

“안 쏴. 안 쏠게. 걱정 마.”

“…….”

방 안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총이 없는 빈손이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보였는데 애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특정 행위를 예상한 듯한 익숙한 반응. 구태여 옷을 들춰 알몸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폭행의 흔적이었다.

아, 나 자꾸 싫은 상상을 하게 되네.

“…….”

방 안을 둘러봤다. 복도에서 1차로 곰팡내에 습격당해서 어느 정도 코가 적응했다고 여겼는데, 습기 찬 좁은 방 안의 냄새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녹슨 내, 쇠 냄새, 바닥에 굴러다니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도구들에 묻은 피 냄새까지.

“후…….”

이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남아 있는 흔적들이 하기 싫은 상상을 하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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