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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27)화 (27/108)

27화

“마나핵이 있었으면 했는데 없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트렁크를 더 채울 물건들은 다 챙기셨나, 우리 통조림?”

“데일.”

먼지 묻은 손을 털며 곁으로 다가온 데일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거 볼래요? 이 근처에서 누굴 고문한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교도소의 살풍경한 장면을 떠올렸다. 교도소 내에서 암암리에 일어나는 죄수들, 또는 죄수들과 교도관 사이에 오고 가는 폭언과 폭력을 떠올리며 나는 데일에게 일지를 내밀었다.

내가 내민 페이지를 쓱 눈으로 훑은 그가 가볍게 말했다.

“흔한 일이지. 근데 이 주변은 아닐 거야. 교도소장실이랑 고문실이랑 붙어 있는 교도소는 본 적이 없거든.”

생각해 보니 그랬다. 고문실 근처에 있으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에 시달려야 할 텐데, 교도소에서 가장 상관인 자가 제 거처를 왜 그 근처에 두겠는가.

데일이 마나핵에 관한 내용이 있을지 모른다며 내게서 일지를 받아 갔다.

“아참, 옷 벗어볼래요?”

패딩을 벗어 넘기란 의미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고개 숙인 채 일지를 읽던 남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러네, 여기 분위기가 나쁘진 않네. 게다가 도중에 웬 놈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적절한 스릴까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내가?”

“레코드판으로 목젖을 탁 치기 전에 입 닥치고 옷 내놔요.”

“야, 듣기만 해도 아파.”

데일은 씁쓸한 표정으로 제 목을 문지르더니 옷을 벗어 내게 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패딩을 손에 들고 옵션창을 불러냈다.

메인 퀘스트 개방과 동시에 클래스 지배력이 약간 상승했다더니. 정말이었다.

옵션창에 새로 생긴 옵션들이 줄줄이었다.

[방탄 효과를 부여합니다.]

[기본 방어력을 약간 높입니다.]

[무력에 대한 저항력을 약간 높입니다.]

[마력에 대한 저항력을 약간 높입니다.]

옵션창에서 부여할 수 있는 이로운 효과란 효과는 모두 부여한 후 남자에게 옷을 건넸다. 그는 일지에 정신이 팔린 모양인지 대충 옷을 받아 책상 위에 던졌다.

‘이 빌어먹을 종.’

이번엔 내 옷에 같은 효과를 부여하려 했지만,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내 옷을 쥐고 아무리 옵션창을 외쳐도 뜨는 게 없었다.

“…….”

그래, 말자. 사람 차별하고 안 해준다는데 말지 뭐. 더럽다, XX.

총알 날아오면 저 자식 뒤로 잘 숨어보지, 뭐.

“저쪽은 다 본 거예요?”

“대충.”

“혹시 모르니까 그거 읽어볼 동안 내가 한 번 더 볼게요.”

빠른 속도로 일지의 페이지를 넘기는 그를 뒤로하고 데일이 뒤졌던 수납장 앞에 섰다.

‘여기는 잡동사니뿐이고, 이다음 서랍은…….’

문에서 가장 가까운 서랍부터 시작해서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서랍 앞에 섰을 때였다.

-웅, 웅, 웅.

발밑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금빛 물결이 내 발아래서 바깥쪽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통조림, 우리 더 찾아봐야 할 곳이 있는 거 같은데…….”

“…….”

데일이 뒤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일단 눈앞에 뜬 상태창부터 읽었다.

[일행 후보가 근처에서 탐색됩니다. 접근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아까 네 추측이 맞는 거 같아. 아마 지하가 있는 모양인데.”

일행 후보가 탐색된다고? 그럼 데일의 일행을 만나기까지 메인 퀘스트를 미루지 않아도 되잖아.

한시라도 빨리 동료를 만들어서 전력을 보강해 두면 더 좋은 일이지, 뭘 물어.

“당연히 예스지.”

“뭐?”

“데일,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우리 여기 다 찾아본 거 같은데 다른 곳으로 이동…….”

[클래스 ‘종의 요정’의 명령이 입력되었습니다. 접근합니다.]

“??”

순간, 웅웅거리기만 하던 금빛 물결이 강한 바람과 함께 발아래서 위로 솟구쳤다.

까뒤집혀 산발이 돼가는 내 머리 스타일을 봐서 그런가?

잔뜩 구겨진 미간으로 노려보던 데일이 급하게 내게로 손을 뻗었다.

“야!”

“???”

불어온 강한 바람 때문에 내 머리카락이 자꾸 뺨 때리길래, 그저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는데.

눈을 떴을 때, 나는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접근하시겠습니까? 라는 말이, 대상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위치를 알려준다든가 뭐 그런 말인 줄 알았지. 이렇게 예, 라고 말하자마자 순간이동을 시켜버리는 일인 줄 알았겠냐고. 꿈에도 몰랐다고.

“…….”

데일, 놀랐으려나.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졌으니 아마 놀랐겠지?

“후…….”

그러나저러나 여긴 어딜까. 어딘진 몰라도 일행 후보님이 근처에 계시긴 할 텐데.

공간은 꽤 어두웠고 공기는 탁했다. 케케묵은 공기 속에서 곰팡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손등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그때.

-쿵쿵쿵쿵.

머리 위였다. 급히 달려나가는 사람의 발소리.

본능적으로 고개가 천장을 향해 꺾였다. 누군가 방금 내 머리 위, 저 천장 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데일인가.’

발소리의 주인이 사라진 날 찾으러 뛰어가는 데일이라면, 나는 아마 교도소장실이 있던 건물의 지하에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데일이 아닌 누군가라면…….

“…….”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권총이 손에 잡혔다.

내 위치를 데일에게 알리는 게 급선무인데…… 그러려면 일단.

‘아, XX.’

나는 코앞에서 발견한 형체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 차갑고 눅눅한 지하의 돌벽이 가까워지자 목 뒤가 서늘했다.

반대편 벽에, 앞으로 고꾸라진 상태로 죽어 있는 시체가 보였다.

‘당황하지 마.’

여기 좀비 없다. 저건 이미 죽은 사람일 뿐이다. 시체라고 시체. 갑자기 일어나 날 물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아, 데일.”

그가 옆에 있을 때 시체를 봤을 땐 이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혼자서 시체를 마주한다는 것은, 누군가 내 곁에 있을 때 마주하는 것과는 무섭도록 다른 일이었다.

-웅, 웅, 웅, 웅.

그러거나 말거나 내 발밑에서 금빛 물보라는 여전히 물결쳤다. 사방으로 균일하게 퍼져 나가던 물보라가 이제는 한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문지기처럼 문 옆에서 고꾸라져 있는 시체의 바로 옆 방문이었다.

“저 방이야?”

종: …….

“야, 종. 경고하는데 다음에도 이렇게 설명 없이 어딘가로 보내버리면 불길 속에 던져서 싹 녹여버릴 줄 알아라.”

종: …….

저 방 안에 나의 일행 후보님께서 계신다는 말인 거지 그러니까.

일행 후보면, 적어도 나한테 적대적인 놈은 아니겠지.

“맞지?”

종: …….

뭘 기대한 거냐.

나는 볼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입속에 통증이 번지자,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다시.

-쿵쿵쿵쿵, 쾅.

또 천장이었다. 층간 소음이 끝내주는구나. 누군진 몰라도 뭔 일이 생겼길래 저렇게 뛰어다닐까.

‘도박을 좋아하진 않지만.’

걸어볼까. 저놈이 사라진 내 행방을 찾아 뛰어다니는 데일이라는 쪽에.

‘실패면?’

좀 일찍 뒤지는 거지, 뭐.

나는 근처에 있던 어린이용 세발자전거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상한 느낌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했다. 데일은 텅 비어 있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눈앞에서 여자가 사라졌다.

그가 급하게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길게 나 있는 복도를 내달리면서 여자의 흔적을 살폈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복기하며 데일은 1구역 건물 입구를 빠져나왔다.

당황한 기색의 그를 맞이한 건, 아까 전 여자가 쏜 총성에 날개를 펼쳤던 새들이 다시 내려앉아 바닥을 쪼는 풍경뿐이었다.

‘놓친 게 있나.’

데일은 일지의 내용을 상기했다. 교도소장이 그저 일반 죄수에 대해 적어놓은 내용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이상한 내용들이 눈에 띄었다.

「스피커의 볼륨을 아무리 키워봐도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음악 소리를 찢고 귓속으로 파고든다. 날카롭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 짐승이 내가 제 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같다.」

「놈의 수감실을 2구역이나 3구역으로 옮길까? 아니. 그랬다간 저 새끼의 비명을 들은 수감자들 사이에서 교도소가 괴물을 키운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

「매일매일 폭력에 노출시키라는 지령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맨날 울다 나자빠져 자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적어도 이런 X 같은 지령을 줄 땐 기간이라도 정해줬어야…….」

발아래에서 들려온다는 내용으로 보아, 교도소장실 아래, 지하에 일지에 적힌 ‘짐승’에 관련된 공간이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교도소장실 수색을 이만 끝내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자는 말을 하는 도중, 여자는 사라졌고.

‘사라진 장소에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데일은 다시 교도소장실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여자가 서 있던 장소에 뭔가 설치된 것은 없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벨이 사라진 수납장 앞에 선 그가 서랍 한 개를 쭉 빼서 뒤집었을 때였다.

-쿵.

서랍에서 와르르 쏟아진 물건들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안타깝게도 아래에서 들려온 소리가 묻혔으나 데일은 제가 딛고 선 바닥에서 울린 미세한 진동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곧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귀를 가져다 댔다.

“…….”

조용했다.

내가 반응하길 기다리는 걸까?

그가 빼낸 빈 서랍을 손에 쥐었다.

-쾅!

나무로 견고히 짜인 서랍의 모서리가 우그러질 만큼 강하게 내려치는 소리였다.

그러자 아래서.

-쿵.

다시 들려온 소리.

여자다.

확신한 데일이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야, 통조림!! 너냐!!”

-쿵.

“말로 대답해 봐!”

“X, xxx!”

‘아, 나라고! 인가?’

짐승의 비명 소리가 울려 죽겠다던 교도소장의 일지에 비하면 말소리가 정확히 전달되진 않았다.

그래도 여자의 목소리인 건 틀림없었다.

“내려간다! 기다려!”

-쿵.

대답 잘하네.

그가 굽혔던 무릎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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