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26)화 (26/108)

26화

교도소는 총 3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맨 앞이 1구역, 1구역 뒤로 거대한 운동장이 있고, 그 뒤로 나란히 2, 3구역이 자리했다.

막 1구역 입구로 들어선 데일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2, 3구역은 수감자들의 주된 수용시설일 거고, 행정처리를 위한 시설은 아마 1구역에 밀집해 있을 거야.”

나는 기차처럼 좌우로 길게 늘어진 1구역 건물 입구를 올려다봤다. 한쪽이 망가진 간판이 바람이 불 때마다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프론트 제국 제 5 교도소-

“데일, 근데 여긴 제국령이 아니잖아요. 왜 제국 교도소가 여기에 있어요?”

바닥에서 커다란 종이를 주워 펼쳐 들며 그가 대답했다.

“제국놈들 특징이야. 순혈만 좋아하거든. 더러운 범죄자들이랑은 같은 땅에서 숨도 쉬기 싫다는 거지. 약소국에선 거부할 능력이 없고. 오히려 교도소 자리 좀 내어주는 대가로 제국의 비호를 받을 수 있으면 좋으니까.”

“으음, 그렇구나.”

가만히 서서 종이를 내려다보는 데일의 뒤로 가 섰다. 어깨 옆으로 보니 그것은 교도소 내부 지도인 모양이었다.

“무슨 지도가 이렇게 대충대충 어설프지.”

“빈틈없이 지도를 그려놓으면 수감된 지 얼마 안 돼서 들끓는 놈들이 보고 탈옥하게? 어차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나와 있어. 여기.”

1구역 T자형 건물의 1층 맨 우측 방, 교도소장실이란 글자가 뚜렷이 적혀 있었다.

“꺾으면 바로야. 가자.”

“…….”

“안 오냐.”

“데일, 잠깐만…….”

나는 말을 다 마무리 짓지도 못할 정도로 왼쪽 벽면에 시선이 붙들려 있었다. 찢긴 신문지, 엽서 등 각종 종이 쪼가리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원래는 교도소 소식을 알리는 게시판 정도로 쓰였던 것 같은데…….’

덕지덕지 붙어 있는 종이들 중 눈에 띄는 몇 장을 속으로 읽어내렸다.

「여길 나가면서 가장 먼저 챙긴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 보낸 편지 꾸러미다.

나는 편지들을 잘 접어 품속에 감추듯 넣었다.

다른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이건 뺏기지 않을 거다.

내가 죽어 사라져도, 이 편지들이 내가 사랑받았던 사람이었음을 증명할 테니까.」

「맞아 내가 죽였어.」

「마지막 면회에서 그 여자는 내가 그녀에게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음을 평생 후회할 거라 말했고 나는 코웃음을 쳤는데, 젠장 네 말이 맞았어. 나는 너에게 말하지 않은 걸 후회해. 네게 모든 걸 얘기할 걸 그랬어. 미안해.」

「아직 흰머리도 나지 않았는데 종말이 왔다는 걸 믿을 수 없군.」

“…….”

죄수들이 붙여놓은 모양이었다. 한참을 서서 짤막한 문장들을 읽고 있으려니까, 다가온 데일이 제 턱을 내 정수리 위에 올렸다.

“왜. 마음에 드는 글귀라도 있어?”

“마음에 든다기보다…….”

나는 맨 처음 읽었던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모난 종이 끝에 튄 몇 방울의 핏방울이 색이 빛바래 있었다.

“여길 빠져나가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분명 아수라장이었을 텐데, 그 속에서 이걸 쓰고 있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까 그냥…….”

“그냥.”

“그냥……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요, 기분이.”

“그래. 아무래도 좀 그렇지, 기분이.”

“데일?”

웬일로 사람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해준다 싶었다. 뒤에서 뭔가 바스락거린다 싶더니, 단검을 꺼낸 데일이 내가 가리켰던 종이를 가로로 그어버렸다.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반토막이 난 종이 쪼가리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상에 젖지 마. 죽기 딱 좋은 상태니까.”

“…….”

“가자.”

등을 돌려 걸어가는 데일 뒤에서, 나는 게시판 아래 책상에 올려져 있던 종이 뭉치와 엽서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아직 사용 전인 깨끗한 면회신청서와 빈 엽서들이었다.

그 종이들을 갈색 서류봉투에 차곡차곡 담은 후, 바닥에 떨어진 펜 한 자루까지 담고 나서야 나는 발걸음을 뗐다.

“그건 왜 가지고 와.”

“우리 종이랑 펜 없잖아요.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서 챙겼어요.”

“제발 쓸모있는 걸 챙겨줘. 살상도구 같은 거.”

“최고의 살상도구가 내 옆에 있잖아요. 뭘 더 챙겨야 할 필요가 있나.”

“어디서 도구 취급이야.”

“피장파장이에요.”

지도에 표기된 교도소장실로 향하는 복도를 둘이 걸었다.

앞서 걷던 그가 홱 뒤를 돌았다.

“어, 거기 앞에 시체!”

“아, XX.”

“푸헉.”

놀라 피하느라 헛발을 디뎌 벽을 짚고 미끄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데일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혀 처웃었다.

그래, 살상도구나 더 챙기라던 놈의 말처럼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저놈의 머리를 후려칠 무언가가 아닐까.

나는 품 안에 든 갈색 서류봉투를 구겼다.

“어어, 미간 구기는 거 안 돼. 어디 약자 주제에 보호자한테 미간을 구기지? 상황 파악, 주제 파악해야지, 통조림.”

일어나 엉덩이를 털자, 다가온 데일이 내 눈썹뼈를 쭉쭉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펴, 어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우리 긴장감 좀 챙겨볼까요?”

“너 긴장을 너무 많이 했나 봐. 눈썹뼈가 딱딱하게 뭉쳤는데.”

“뼈니까 딱딱하겠죠. 뇌가 없으신가.”

“하하하하, 말대꾸하지 마라.”

“…….”

“어차피 다 왔어.”

내 눈썹에서 손을 뗀 그가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가 섰다. 데일의 손엔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넘겨준 열쇠가 들려 있었다.

“네 말대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저쪽이나 보고 있어.”

“…….”

예, 그러죠.

그가 열쇠를 넣고 돌리는 동안, 나는 꼭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처럼 생긴 긴 복도를 주시했다.

-딸칵.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빈 복도를 울렸다. 데일이 내게 먼저 눈짓했고, 눈빛을 받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잡은 문고리를 돌렸다.

스르륵 열리는 문틈으로 데일이 빨려 들어가듯 진입했다.

“어?”

그리고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상 없네.”

방 안에 어떠한 위험도 없음을 확인한 데일이 얼굴 가까이 들어 올렸던 총을 내렸다.

“뭐야, 너 또 왜 무섭게 헤벌쭉 웃고 있어.”

방 한켠에 서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그가 열린 문을 닫으며 물었다.

“데일, 이것 봐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거 환상 아니고 현실 맞죠?”

“……이거?”

내 시선이 꽂혀 있는 물건으로 그가 시선을 옮겼다.

넓은 교도소장실 구석 작은 협탁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던 그것은.

‘턴테이블이라니.’

세상에.

더 이상 저놈이나 내가 부르는 어설픈 노래가 아니라 전문 음악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건가.

협탁 뒤 선반엔 잘 정리된 엘피판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오 마이.

“할아버지 말이 맞았네요. 여긴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을 거라더니.”

침입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방 한가운데 넓게 깔린 고급 페르시안 카펫에는 흙 묻은 발자국 따윈 없었고, 책상 위나 선반 위 물건들은 누가 방금 각을 맞춰 놓은 듯 흐트러짐 없이 나란했다.

이름 모를 이곳의 교도소장은 음악 감상이 주된 취미였는지, 근무 공간을 아예 음악 감상용으로 개조한 모양이었다.

벽 한쪽이 온통 관련된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자식은 일은 안 하고 뭔 음악만 들었나.”

문도 닫았고, 불도 켜지 않았지만 얇은 커튼으로 스며든 햇살 덕분에 방 안을 살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쇠창살이 달린 창 너머를 주시하던 데일이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반대편에 서서 손이 가는 대로 레코드판을 끄집어냈다.

‘들어보고 고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누군가 있을지 모를 이곳에서 음악을 직접 들어볼 순 없었다. 대충 앨범 재킷을 살펴서 마음에 드는 엘피판을 몇 개 챙긴 후, 나는 교도소장의 책상 위를 살폈다.

‘오, 이게 더 멋지네.’

복도에서 챙긴 펜보다 훨씬 멋진 디자인의 펜이었다. 펜을 손에 쥐고 책상 맨 위 서랍을 당겼다.

굳게 잠긴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데일, 열쇠 좀 줄래요? 여기 잠겼어요.”

마나핵이 있을 만한 장소를 살피던 그가 뒤돌아 열쇠를 던졌다. 그가 건넨 열쇠꾸러미엔 총 세 개의 열쇠가 달려 있었다.

‘아까 방문은 이걸로 열었으니까…….’

가장 화려한 열쇠를 제외하고 남은 두 열쇠 중, 사이즈가 제일 작은 열쇠를 서랍에 넣고 돌리자.

예쓰, 열린다.

서랍에서 나온 건 많이 사용한 듯 모서리가 닳아 있는 일지였다.

“헛걸음인가.”

건너편에서 탄식하는 데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무래도 이건 교도소장의 일지 같았다.

「저 짐승 새끼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황실은 왜 내게 저놈을 맡긴 거지? 이 별 볼 일 없는 외지로 보내버린 것도 모자라, 저런 위험한 짐승까지 맡기다니. 어디까지 엿 먹어보라는 심보지?」

「끝없이 울어댄다. 사람 새끼도 아닌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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