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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23)화 (23/108)

23화

세바스찬과 플로라는 두 사람이 탄 차가 떠나는 방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제 급작스러운 우박이 내려 걱정했는데, 다행히 새벽에 날씨가 갠 모양이다. 아침에 나와보니 맑게 갠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플로라는 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양손을 맞잡았다.

‘저 두 사람이 가는 길에 탐욕스러운 이들을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부디 두 사람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희망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빙하기가 도래하고 혹여 폭풍이라도 닥치면 기온은 영하 50도까지 떨어졌다.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죽은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게 죽어갔고, 산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사람이길 포기했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이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짖다 신을 찾기를 관뒀다.

“신이 우리를 버린 거야. 아니면 처음부터 그딴 건 없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플로라는 여전히 신을 믿었다. 다만 오래오래 침묵하고 계신다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신이 응답해 주는 일은 없었다. 이웃들이 다 떠나 마을이 황폐해지고, 남은 이웃들이 서로를 약탈하고 얼어 죽고, 근처 교도소에서 풀려난 죄수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지하 대피소에서 남편 세바스찬의 손을 꼭 쥐고 오들오들 떨면서, 플로라 역시 신의 이름을 찾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플로라는 오랜만에 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봬서 죄송한데, 이제 그만 답해주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양심이 있으시면 저 아이들 가는 길에 모든 난관을 거두어 가소서. 그리고 우리 세나, 세나가 살아 있다면 그 아이 곁을 부디 저런 자들로 채워주시길.’

“감기 걸리겠어.”

세바스찬은 들고 나온 양털 케이프를 플로라의 어깨에 둘렀다.

“세바스찬, 저 아이들, 잘 가겠지?”

“그리 믿어야지.”

“아이 참……. 며칠간 먹는 입이 늘어서 분주했는데 다시 한가해지겠네.”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장작 좀 패서 들어갈 테니까.”

“응.”

한 번 더 차가 사라진 방향을 흘깃 보고 나서 플로라는 아쉬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창고 문이 열려 있음을 발견했다.

왜 창고가…….

며칠 전 겪었던 사고가 떠올라 버린 플로라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녀가 급하게 제 남편을 불렀다.

“세, 세바스찬!”

“어?”

“저기…… 창고가 열려 있어.”

“뭐? 그럴 리가…….”

창고 쪽으로 몸을 꺾은 세바스찬의 표정 역시 굳었다. 사고가 있고 난 직후, 세바스찬은 캐드 대령과 함께 창고를 수리했다.

그 이후로 창고를 드나든 사람이 없었을 텐데.

“플로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집 안으로 들어선 세바스찬이 엽총을 챙겨 들었다. 벨과 데일 두 사람을 향해 겨눴던 그 총이었다.

총구를 열린 문에 겨누고서 세바스찬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창고로 다가갔다. 플로라 역시 남편 등에 바짝 붙어서 걸음을 옮겼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낯선 이가 튀어나올까,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키며 세바스찬이 발로 문을 걷어찼다.

누군가 안에 있다면 놀라 튀어나올 것이다.

탄창 안에 놈을 위한 총알이 잠들어 있다. 세바스찬은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검지를 굽힌 상태였다.

“…….”

“세바스찬?”

앞서 창고로 들어간 세바스찬이 들고 있던 총을 내렸다.

총을 내린다는 것은 침입자가 없음을 확인했다는 것. 그럼에도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세바스찬의 뒷모습에 플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바스찬, 뭘 그렇게…….”

“플로라, 이게 도대체…….”

궁금해진 플로라가 입구를 가린 세바스찬을 옆으로 밀며 창고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텅 비었던 창고 내부가 빈틈없이 꽉 찬 모습이었다.

분명 한 포대였던 밀가루는 열 포대로 늘어났고, 각종 조미료는 수십 개가 생겼다.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조림은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다.

천장엔 훈제 고기와 말린 음식이 매달려 있고, 상자를 열자 안에도 저장음식이 빼곡했다. 마치 창고 안에 있던 음식들이 스스로 몸을 불린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함께 눈으로 보고 있잖아.”

신의 응답인가?

플로라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상식선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다.

문 옆에 떨어진 쪽지를 보기 전까진.

플로라가 바닥에 떨어진 작은 쪽지를 주워 들었다.

“세바스찬, 이리 와. 와서 이것 좀 봐.”

혹시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신기루인가 싶어 통조림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던 세바스찬이 플로라 옆에 섰다. 그가 플로라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펼친 쪽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지내는 동안 마음도 몸도 따듯했습니다. 모두 두 분께서 잘 보살펴주신 덕입니다. 잘 머물다 갑니다.

창고에 물건들은 제 작은 보답입니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니 의심치 말고 드세요.

그리고 걸어둔 옷은 패딩이란 외투인데, 아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분홍색은 플로라 할머니 거구요, 옆에 검정색은 세바스찬 할아버지 거예요.」

옷? 어디에?

두리번거리던 세바스찬이 제가 발로 차버린 문을 앞으로 당겼다. 문 뒤에 가려져 있다 드러난 것은 벨과 캐드 대령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낯선 외투였다.

“이게 패딩……. 입어봐, 플로라.”

세바스찬이 옷걸이에 걸린 패딩을 빼서 플로라에게 권했다. 플로라는 얼른 케이프를 벗어 패딩을 걸쳤다.

“다 입은 건가? 이렇게 입는 게 맞나?”

플로라는 처음 입어보는 외투가 낯설었다.

세바스찬은 패딩을 입고 어색하게 서 있는 플로라를 자세히 살폈다.

뭔가 더 해야 할 게 남은 것 같은데……. 아, 저거네.

-지익.

한쪽 무릎을 굽힌 세바스찬이 플로라가 입은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잠갔다.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어때 플로라?”

“빙하기가 가버린 것 같아. 너무 포근해.”

조금 과장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살짝 격양된 플로라의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깔이 패딩 색과 닮아 있었다.

그런 플로라를 보는 세바스찬의 얼굴에도 흐뭇함이 감돌았다.

“잘 어울려, 플로라.”

“정말 마음에 들어. 세바스찬도 어서 입어 봐.”

이제 두 사람 모두가 패딩을 입고 있었다. 세바스찬과 플로라는 벨이 남긴 쪽지의 마지막 글귀를 함께 읽었다.

「두 분께 함께 떠나자고 조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떠납니다.

이곳에서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었어요. 마지막으로 감사한 마음을 두고 갈게요.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히, 그리고 안녕히.」

플로라는 작은 일에도 쉽사리 눈물을 보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흐른다, 흘러.

에구, 울지 말아야지. 쉽게 울음을 터트릴 때마다 세바스찬이 놀리곤 했으니까.

그녀는 손등으로 흐른 눈물을 닦으며 옆을 흘깃 보았다. 세바스찬의 볼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픽 실소하며 제 남편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찔렀다.

“나한테 주책맞게 운다고 뭐라고 할 땐 언제고.”

“…….”

그러자 세바스찬이 민망한 얼굴로 서둘러 제 얼굴을 문질렀다. 얼마나 세게 문댔는지 남편의 얼굴이 벌겠다.

마음이 울렁이면 우는 게 당연한 거지, 뭘 저리 민망해할까.

플로라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신이 내게 응답해 준 게 아닐까. 그래서 천사들을 보낸 거 같아.”

‘플로라, 단언컨대 신은 우리 창고 사정엔 아무 관심도 없을 거야.’

세바스찬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신실한 플로라에 비해 세바스찬은 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천사 같다는 말엔 동의하는 바였다.

“응. 우리가 천사를 만났었네. 허허, 참…….”

플로라는 다시 한번 양손을 맞잡았다. 감사 기도를 올리는 플로라 옆에서 세바스찬은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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