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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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메인 퀘스트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마지막 메인 퀘스트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보통 게임이든 소설이든 마지막 메인 퀘스트가 끝나면?
준비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메인 퀘스트가 있었어. 마지막 메인 퀘를 깨고 나면 아마…….’
확신에 차올랐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생존에 생존을 거듭해 마지막 퀘를 깨고 나면 내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있었어……. 작가가 만들어두긴 했었네, 맞네……. 흐흐흐, 흐하하…… 흐하하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거리는 나를 보고 다들 놀란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절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 여보가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쳤던 거구나. 누워, 누워……. 다시 눕자. 어쩐지 너무 멀쩡하더라.”
데일이 다가와 제법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소파에 눕히려 했다.
“흐하하하.”
“누우라니까, 자.”
나를 눕히려고 상체를 숙인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기쁜 마음에 뭐라도 끌어안고 방방 뛰고 싶었는데, 마침 눈앞으로 단단하고 커다란 가슴이 배달되니 이거 딱이었다.
나는 남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목을 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소파 쪽으로 기울어지겠다 싶었는데, 그는 마치 석상처럼 단단하게 나를 매단 채로 내 무게를 가만히 버텼다.
“데일, 데일! 퀘가 있다니까요! 흐하핫, 퀘스트요! 메인 퀘스트 명이 뭔 줄 알아요?”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있다고 치고 누…….”
막연하게 이 세계에서 열 고개, 백 고개를 넘어 생존하다 보면 무언가 돌아갈 방도가 생기겠지…… 하던 어제와는 달라진 거다. 눈에 보이는 확연한 희망이 생긴 거니까.
최후의 낙원을 찾아 생존하게 되더라도 돌아갈 방법 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100퍼센트는 아니었지만 전혀 가망이 없던 종전의 상황에 비하면 내 기분은 천지 차이였다.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엄마를 볼 수 있어.
내 가족, 내 친구들이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이 망한 세상에서 나가서 평범한 대학생이던 나로 돌아갈 수 있어.
“데일.”
“응.”
“나 데려가 줄 거죠? 갈 수 있죠, 최후의 낙원?”
“어, 알았어. 너는 버리고 나 혼자, 아니 여보랑 같이 가야지. 걱정하…….”
갑작스러운 기쁨과 기대, 희망으로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살 거야, 생존할 거야.
무슨 퀘스트를 주든 다 깨버릴 거야.
엄마가 있는 내 세상으로 돌아갈 거야.
“흐어어엉……. 흑, 나 데려가 줄 때까지 죽지 말아요!”
그는 아마 내가 최후의 낙원이란 곳을 제게서 처음 듣고 희망에 차올라 우는 것으로 생각할 거다. 짐덩이 같은 게 또 울기나 한다고 갖다 버릴 거라고 구박할 줄 알았는데…….
품속의 나를 내려다보는 데일의 눈빛이 여리게 흔들렸다.
시퍼렇기만 해서 차갑다고만 여겼던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따뜻한 햇살을 품은 맑은 하늘처럼 보였다.
“안 죽지. 내가 죽을 것처럼 보이냐, 너?”
“흑, 끄흑.”
“……데려가 줄게.”
“끄흡.”
뭔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이기가 창피해서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자기 옷이 내 눈물로 젖어가는 걸 알면서도, 데일은 내 머리만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대답을 하는 눈앞의 남자가, 평소의 껄렁한 데일에서 군 대령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던 진지한 그 데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데려가 준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목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목 졸라 죽일 생각이냐, 너.”
“내가 당신을요? 미치지 않고서 왜 그러겠어요. 난 어떻게든 당신 옆에 붙어 있을 건데.”
“…….”
“그러니까 최후의 낙원…….”
“아, 알겠어. 가슴 축축해! 콧물을 얼마나 흘려대는 거야! 내 옷이 손수건인 줄 알아?”
꽉 끌어안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제 목에 감긴 내 팔을 너무도 쉬이 풀어냈다. 단단하고 뜨끈한 걸 안고 있으니 좋았는데, 솔직히 순간 좀 아쉬웠다.
버럭 소리를 지른 그가 가볍게 날 들어다가 소파에 눕혔다. 벌게진 눈두덩이 위로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그만 울어요, 여보. 너무 못생겼어요.”
“…….”
벌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데일이 보였다.
누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가슴 근육에 달라붙은 상의를 펄럭이며 욕실로 사라졌다.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직 끄지 않은 시스템 창이 떠 있었다.
[메인 퀘스트 명: 최후의 낙원을 찾아서.]
[첫 번째 메인 퀘스트: …….]
[메인 퀘스트 개방과 동시에 클래스 지배력이 약간 상승합니다.]
소파 뒤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도란도란한 대화가 들려왔다.
“허헛 참, 대령님은 부부 사이도 저리 좋으시니, 복도 많으시군.”
“세바스찬, 꼭 신혼 때의 우릴 보는 거 같지 않아?”
세바스찬 할아버지는 살짝 정색했다.
“?? 우린 더 좋았지 플로라.”
저 할아버지도 은근 캐릭터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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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다들 내 몸 상태를 걱정했지만 나는 전혀 아픈 구석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났더니 너무 쌩쌩해 몸을 좀 움직이고픈 기분이었다.
이제 슬슬 여길 떠날 준비도 해야 하고…….
“어딜 가.”
주섬주섬 패딩을 걸치자 데일이 물었다.
“창고에요.”
“창고? 왜 부인이 또 같이 가재?”
“아뇨, 저 혼자요. 그리고 몰래 가는 거니까 혹시 저 찾으면 둘러대 줘요.”
“뭐 하러 가는데.”
“어 그게…… 작별 선물을 좀 두고 올까 해서…… 헤헷.”
침대 한켠에 등을 기대앉은 데일은 비뚜름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랫입술을 살짝 무는 그 얼굴은 무언가 불만스럽다는 눈빛이었다.
“넌 왜 나한테 같이 가달라는 말을 안 하냐.”
그 말에 내 눈썹이 크게 들렸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말하면 지가 고분고분 같이 가줄 것도 아니면서.
“두고 오려는 선물이 무겁거나 그런 게 아닌데요? 도움 필요 없어요.”
“…….”
데일의 입술이 약간 비틀렸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입 안쪽 살을 가볍게 깨문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 없어? 하긴, 그 얼굴로 돌아다니면 다 무서워서 도망치긴 할 거야. 지금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얼굴 상태가 그렇게 심한가?
슬쩍 거울을 들여다봤다.
“…….”
아까 신나게 운 탓에 두 눈이 툭 불거져 나왔다. 사람 가발 쓴 황소개구리인 줄, 어이구야.
내 꼴이 우스워서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음, 창고에서 그런 일도 있었으니……. 그럼 같이 가줄래요? 옆에 있어주면 더 안심이죠.”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어, 음, 그런 거 같은데요?”
그러자 남자가 대뜸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갈 준비를 하고 문 옆에 서 있는 내게로 걸어온 그가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오늘 우리 수건은 한 장만 쓰는 건가?”
뭔 멍멍이 소리야.
“뭐야 그게. 옆에 있어주는 대가로 씻겨달란 소리예요? 물물교환해요, 지금?”
“아까 네가 묻힌 콧물 빨래하느라 힘이 다 빠진 건 알아? 넌 무슨 눈물보다 콧물을 더 흘리더라, 신기하게. 봐봐.”
데일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턱을 쥐고서 남자는 그 파란 눈동자로 내 얼굴을 위에서 샅샅이 훑고 다녔다.
“눈은 이렇게나 크고, 콧구멍은 작은데…… 어떻게 이 콧구멍에서 그렇게나 많은 콧물이 나오지, 너는?”
“에이 씨. 놔요!”
왜 남의 콧구멍은 들여다보고 지X이야.
훌쩍.
많이 흘려서 코가 텅텅 비긴 했다.
“빨래를 너무 열심히 해서 혼자 씻을 힘이 없다고, 나.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울래?”
“…….”
“어?”
그러면서 은근히 내 어깨 위에 제 머리를 올려놓는다. 아직 씻지 않았다는 남자에게선 비누향보다 원래 그가 가진 체향이 짙게 풍겼다.
자연스럽게 차렷 자세로 떨궈놓은 내 손등에 남자의 크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자꾸 스쳤다.
나는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간지러움을 참다 말고,
“힘이 없으면 씻지 말고 처자!”
하고선 문을 쾅 닫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지하 대피소 문을 열고 안으로 내려가려던 플로라 할머니가 때마침 날 발견하고선 의문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벨? 왜 남편이 힘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게, 저기…….”
그때, 등 뒤에서 내가 닫아버린 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열린 문틈으로 허연 머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보, 정갈하게 침대 정리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어머나, 아이구, 그래서…….”
“앗! 그게 아……!”
수줍은 미소와 함께 얼굴을 붉힌 할머니가 재빠르게 대피소로 내려갔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