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니? 내가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단 말이야?’
나는 허겁지겁 퀘스트 상세 페이지를 펼쳤다.
[히든 퀘스트 ‘남을 돕지 않는 자, 자기를 돌볼 가치도 없다.’
내용: 불우이웃을 도와 감사 포인트를 획득하십시오. (1/1)]
그 아래로 쭉 나열된 보상 목록의 맨 처음을 확인했다.
[보상1: 획득한 감사 포인트를 생명력으로 변환하여 저장합니다.]
[소모한 생명력 20 / 획득한 생명력 40]
[획득한 생명력이 총량을 초과하여 생명력 게이지의 총량이 늘어납니다.]
우측 시야에 못 보던 생명력 게이지가 보였다. 게이지의 끝 수치는 120이었다.
나는 확인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그러니까 원래의 내 생명력 게이지는 100이었는데 스킬 사용으로 20을 소모했고, 퀘스트 보상으로 40의 추가 생명력을 얻어 총 게이지가 120으로 늘어났다는 소리였다.
‘나 지금 개이득인 거 같은데?’
애초에 퀘스트가 있다는 걸 몰랐으니 이런 보상이 있는 줄도 몰랐고, 내 생명력을 소모해서라도 할머니만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거였는데…….
스킬을 사용하는 소모 자원인 생명력 게이지 자체가 120으로 늘어났으니, 스킬 1회 소모 자원이 20이라고 치면 나는 이제 스킬을 6번까지 쓸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이다.’
피통이 조금 뻥튀기된 것뿐인데 배가 불렀다.
“말짱하다더니 정말 몸 상태가 좋은가 보네.”
변태처럼 헤벌쭉 웃고 있는 내게로 플로라 할머니가 다가와 음식이 든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접시 위엔 노릇한 빵과 버터, 잼이 놓여 있었다.
“버터…….”
구하기 힘들 것이 분명한 버터가 떡하니 올라와 있길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저 진짜 먹어도 돼요? 라는 의미였다.
“안 먹고 뭐 해. 빨리 먹어요.”
“감사합니다.”
버터향 가득한 빵을 한 입 베어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왜 퀘스트가 이제야 완료된 거지?
퀘스트의 목표가 불우이웃을 도와 감사 포인트를 얻는 거면, 나는 이미 할머니를 돕기 이전에도 남을 도운 기억이 있었다.
바로 탁자 위에서 날 은은히 노려보는 저 남자를.
‘데일.’
내가 저 자식한테 패딩을 만들어서 입혔고, 지금도 잘 입고 다니잖아? 그런데 왜 그때 당시에 완료가 안 됐던 걸까.
아니, 설마 그럼 저놈…….
나한테 감사를 안 한 거야?
“…….”
괘씸한 놈.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옷을 만들어 입혀줬으면 넙죽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지.
저놈 싸패인가 진짜.
빵 맛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놈을 바라보자, 남자가 냉큼 입꼬리를 쭉 올렸다.
“빵 맛있어, 여보?”
“…….”
“우리 여보 많이 먹어~”
“…….”
어휴.
❅
히든 퀘스트의 보상은 생명력 게이지가 늘어난 것 외에도 더 있었다.
[업적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클리어.]
[업적 보상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칭호 획득.]
[칭호 능력치: 보상 획득 확률이 약간 상승합니다.]
‘헤에…… 퀘스트 완료 시에 칭호를 달고 있으면 보상 확률이 올라가겠네. 양을 늘려주는 건지, 질을 늘려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 완료 시점에만 칭호를 바꾸면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지금 내가 획득한 호칭이라곤 이거 하나뿐이었다.
나는 가뿐한 손길로 칭호 설정을 눌렀다.
“잠깐 이야길 나누고 싶습니다.”
데일의 말에, 밀린 시스템 창을 마저 확인하기도 전에 세 사람이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중요한 할 말이라도 있는지, 곁으로 와 앉는 데일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다른 이들의 눈엔 허공을 찔러대는 모양새일 테니, 나는 창을 확인하던 손길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
대신 곁에 와서 꼬리를 흔드는 말라뮤트를 끌어안았다. 복슬복슬한 털이 따스해 기분이 좋았다.
“어르신, 저희는 위로 올라갑니다. 최후의 낙원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최후의 낙원!’
놀라 데일을 돌아보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미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 눈치였다.
데일이 이야기를 주도해 나갔다.
“최후의 낙원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8개월 전 이 사태가 막 발발했을 무렵에, 친우가 마을을 떠나며 해준 얘기가 있네. 그 친구가 이 근방에 있는 제국 산하 교도소에서 일했거든. 교도소장이 제국 귀족 출신인데 그가 하는 말을 몰래 들었다더군. 제국은 빙하기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빙하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주거지를 건설했는데, 그게 최후의 낙원이라나 뭐라나.”
“…….”
“그 교도소장의 뒤를 따라 이동할 생각인데 같이 가지 않겠냐며 물었지.”
“거절하신 겁니까?”
“그렇다네.”
말라뮤트는 굉장히 영민한 개가 분명했다. 제 주인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개가 내 품에서 벗어나 노부부에게로 가서 얼굴을 비볐다.
조금 쓸쓸한 표정이 된 할머니가 그녀를 위로하는 개의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셨군요.”
“…….”
“저와 벨은 곧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원하신다면 함께 떠나길 제안하려 했습니다만…… 거절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말라뮤트의 미간을 쓸며 말을 이어나갔다.
“낙원이란 곳이 정말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지낼 곳이 그곳에 있겠는가 이 말일세. 소수의 귀족을 위해 마련된 공간일 게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가 이곳을 떠났는데 혹시라도 세나가 돌아온다면……. 안전한 주거지를 찾아 몇 해 안 남은 생을 더 이어가는 것보다 우리가 더 원하는 건…….”
따스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저 손녀딸의 얼굴이나 한 번 더 봤으면 하는 거니까요.”
주름진 두 분의 손이 겹쳤다. 겹쳐진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지켜보던 데일이 말을 꺼냈다.
“어르신의 친구분이 한 말에 보태 말하자면, 최후의 낙원은 있습니다, 어르신.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 물으신다면…….”
데일의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초반부터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노부부를 향해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는 남자의 옆얼굴은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에르반 공국 제2 전투여단 데일 캐드 대령입니다.”
“제2 전투여단의 데일 캐드, 캐드면…… 이런.”
할머니는 모르는 눈치였는데 할아버지는 뭔가 확 깨달은 얼굴이었다.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데일을 향해 경례를 올리곤 허리를 숙였다.
“몰라뵀습니다, 대령님. 제가 지은 결례를…….”
“어르신, 이러지 마십시오. 불편합니다.”
“대령님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뵀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으나 설마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말을 낮춰 주십시오.”
“군에 있을 때도 연장자분들껜 상호 존대를 했습니다. 조금 전처럼 편히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군에서 중사 전역했습니다. 타국임에도 대령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르신.”
데일이 세바스찬 할아버지의 말을 끊고는 90도로 숙인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딴판이 된 그의 모습에 속으로 경악했다.
‘깡패같이 행동하더니, 제법 군인 같네.’
원래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너무 저질스러워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의외의 모습이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부부라고 했던 거짓말을 정정하진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저 ‘님이 존경받는 군인? 안 어울려~’라는 눈길로 남자를 쳐다봤다.
데일이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대령은 옛 계급일 뿐입니다. 지금은 어르신의 도움을 받아 추위를 피한 일개 남자일 뿐이죠.”
“…….”
다시 할아버지를 자리에 앉게 한 그가 하던 이야기를 지속해 나갔다.
“최후의 낙원은 있습니다. 더군다나 손녀분이 기술자로 일하다 종말을 맞았다면 낙원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
“그리고 어르신의 사격 솜씨가 훌륭한 것은 제 눈으로 확인을 했습니다만 노부부께서 지금까지 생존하신 것은 더없는 행운이었을 겁니다. 언제까지 여기서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어제와 같은 일은 계속 일어나겠죠. 다시 제안 드립니다. 두 분,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세바스찬 할아버지와 플로라 할머니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눈으로만 대화를 이어나갔다.
할머니가 흐릿하게 미소 짓자,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데일을 향해 답했다.
“두 분 향하는 길이 안전하길 바라겠습니다. 저희는 이곳이 좋습니다. 이 늙은이들이 새로운 곳을 찾는다 한들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추억이 있고 손때가 묻은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내려 합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언제 떠날 생각이십니까?”
밖은 이미 어둠의 권역이었다. 게다가 나도 바로 떠나기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였고.
“며칠만 더 신세 지려 합니다, 어르신. 아내가 쾌차하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그렇다면 곧 가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오히려 저희가 아쉽습니다.”
잠시 동안 네 사람 모두가 말이 없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듯 보였다. 두 분에게 함께 가길 제안한 데일의 말에, 나도 잠시 두 분과 함께하게 될까 싶어 설렜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길 원하는 분들에게 함께하자고 계속 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노부부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던 나 역시 고개를 내렸다. 밀린 시스템 창이나 마저 확인하자 싶었다.
나는 소심하게 작은 손동작으로 밀린 창들을 허벅지 위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
[히든 퀘스트 완료로 메인 퀘스트가 개방됩니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확인하세요.]
그것은 내가 너무나 원하고 바라왔던 일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