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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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은 샤워 중이었다.
그의 굴곡진 상반신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하반신으로 매끄럽게 떨어졌다.
상체가 워낙 역삼각형이라, 가파르게 좁아지는 허리 라인에서는 물방울이 몸을 타고 흐르는 속도가 줄어들 정도였다.
물과 비누 거품이 섞여 제 몸 위를 흐르는 것을 바라보던 데일이 욕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욕실은 새 전구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랬는지, 조명 소켓은 3개인데 반해 달린 전구는 1개뿐이었다.
그래서 불빛이 어두웠고, 그의 굴곡진 신체에 음영이 더 짙게 드리웠다.
떨어지는 물소리 속에서 데일은 벨이 가르쳐 준 노래를 흥얼거렸다.
“네 못생김이 나를 불쾌하게 하네. 그러니까 저 멀리 떠나줘요. 어이 이봐, 다가오기만 해봐. 나…….”
잘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다음 가사가 뭐더라?
데일은 욕실 문 가까이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야, 핫소스. 네가 알려준 노래 가사 다시 불러봐.”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벌써 곯아떨어진 건가.
“…….”
남자가 바로 옆에서 샤워 중인데 잘도 자는군 싶었다.
저 여자는 본인이 엄청 무방비하다는 자각은 있는 건가.
“없겠지.”
샤워는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데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 가사 뒷부분을 멋대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네 못생김이 나를 불쾌하게 하네. 그러니까 저 멀리 떠나줘요. 어이 이봐, 다가오기만 해봐. 날붙이랑 합체시켜 줄 테니까…….”
데일은 상체와 하체의 중간 부분만을 흰 수건으로 대충 가린 채 욕실을 나섰다.
“야, 핫소스.”
욕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벨을 불렀다.
그러나 침대 위에 곯아떨어져 있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든 방 안에 있어야 할 벨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XX.”
낮게 욕을 읊조린 그가 물기도 채 닦지 않은 몸 위로 패딩을 걸쳤다.
그 노부부가 여자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니. 결국 이 사달이 나고 말았구나.
조금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방심한 탓이다.
책상 위엔 그가 욕실로 들어가기 전 놓아두었던 단검이 그대로 있었다.
방 상태도 딱히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방으로 밀고 들어와 여자를 납치해 가지는 않았단 소리다.
방 밖에서 말로 여자를 꼬여낸 후에 일을 벌였겠지.
“하, 그 머저리가 진짜.”
급히 방을 나선 그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살금살금 밟았다.
1층으로 내려선 데일은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지하 대피소 입구로 들어가는 문을 살폈다. 바닥에 난 지하 대피소의 문은 목재로 이루어져 그리 견고해 보이진 않았다.
분명 안에서 굳게 잠가두었을 테지만, 지렛대를 이용해 열거나 아예 부숴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생각을 정한 그가 벽 밖으로 몸을 빼내려는데.
-덜컥.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다 올라오지 않고 상체만 바깥으로 드러낸 노인은.
“플로라…… 플로라!”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벨이 노부부에게 납치된 것이라면 지금 노부부는 함께 있어야 하는데…….
무언가 미심쩍었지만 먼저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를 불러도 대답이 없자 노인은 지하 계단을 마저 올라왔다. 그리고 터벅터벅,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다가왔다.
데일은 계단 옆 구석 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노인이 첫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 데일의 단검이 노인의 등허리에 가 닿았다.
단검 옆엔 노인이 허리춤에 꽂아 놓은 권총이 있었다.
권총을 빼내려던 노인이 손을 끝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움직이지 마시죠, 어르신.”
“…….”
데일은 노인의 허리춤에 꽂힌 권총을 빼 제 주머니에 넣었다.
“핫소…… 아니, 벨은 어딨습니까.”
“나야말로 질문하지. 내 아내는 어디에 있나.”
“…….”
“…….”
두 남자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데일이 다시 말을 이었다.
“피를 보는 걸 그리 즐기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봐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습니다. 벨은 어디 있습니까.”
“바꿔 말하겠네. 내 아내 플로라를 돌려주게. 그 여자 없이는 난 안 되네. 내 이렇게 부탁하네.”
“…….”
이 노인이 지금 너무나 훌륭한 연기를 펼치고 있어서 내가 이리 헷갈리는 걸까.
노인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사실대로 실토 중인 건지 데일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정황상으로만 본다면 벨을 납치해갈 이들은 노부부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노인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플로라는 자네들이 잠옷이 없을 것 같다며 잠옷을 챙겨 2층으로 올라갔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어. 플로라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네. 그러니…….”
“……씻고 나왔더니 방에 있어야 할 벨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벨을 데려간 게 아니라는 겁니까?”
“잠옷만 주고 오겠다던 사람이 하도 오질 않아서 방금 막 나온 참이네. 우린 어린 아가씨를 해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네.”
“…….”
“…….”
다시 정적.
두 남자는 치열하게 서로를 믿어야 하는지, 믿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딸랑딸랑딸랑딸랑딸랑.
덫을 밟았을 때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방울소리였다.
노인이 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창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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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둘이 창고로 간 모양이야.”
두 남자가 눈길을 달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특히나 노인은 쌓인 게 퍽 많은 듯했다.
“이 시간에 창고를 왜 간 겁니까?”
“내 말이 그 말일세! 위험하니까 내가 내일 가져다 두겠다고 말을 했는데도!”
“…….”
“아마 잠옷을 전해주고 밀가루를 푸러 간 모양인데, 밤이 어두우니 그 아가씨가 함께 가준 거겠지.”
“…….”
“둘만 있는 거라면 덫이 울리지 않았을 거야. 플로라한테도 그 정도 조심성은 있으니까, 아마 벨에게도 주의를 시켰을 거라 생각하네.”
“외부인이 울렸다는 말씀이시군요.”
데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창고에서 멀지 않은 폐허의 무너진 벽을 참호 삼아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손엔 야간 투시경이 들려 있었다.
“제길. 넷…… 다섯? 적어도 다섯 놈 이상이 창고를 둘러싸고 있네.”
노인의 옆에서 데일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총성을 울려 위협 사격을 하면 어떻습니까. 멀리 저격수가 있다는 걸 알면 도망갈 텐데요.”
“그래만 준다면 일이 수월하게 풀리겠지만…….”
노인은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 듯, 앞으로 고개를 쭉 뺐다.
“시야에 들어온 다섯 놈 말고 창고 뒤에 가려진 놈들이 몇 명 더 있는 거 같아. 한 놈은 전기톱까지 들고 있어. 창고를 털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온 모양이니 쉽게 물러가진 않을 것 같네.”
데일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인 건 아직 놈들이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다는 거야. 둘이 안쪽에서 문을 막은 모양이지. 플로라라면 당황해서 문을 막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거네. 안에 아가씨가 함께 있는 게 분명해.”
데일이 초조함으로 제 턱을 매만졌다.
문을 막았어도 상대에겐 전기톱이 있으니 창고의 한쪽 벽면이 잘려 나가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그럼 놈들이 창고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가 가겠습니다. 엄호해 주십시오.”
“지금 저길 혼자서 들어가겠다는 말인가? 자네 제정신인가?”
“안타깝게도 제정신입니다. 엄호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이, 이보게!”
차를 향해 뛰는 데일의 뒤로 그를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에 자리한 데일은 고글을 올려 썼다.
그의 고글은 일반 고글이 아니었다. 그가 고글 다리에 부착된 작은 조절기를 돌리자, 렌즈가 변화해 야간 투시력이 올라갔다.
-부아아앙.
갑자기 들린 차 소리에 놀란 무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데일은 무리의 중앙으로 차를 직진시켰다.
“뭐야? 야, 야! 멈춰! 멈추라고 씨X!”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차 앞에서, 창고에 붙어 있던 무리가 산산이 흩어졌다.
데일이 탄 차가 창고의 바로 뒤에 정차했다. 그가 운전석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넌 뭐야?”
“나? 잠깐만……. 아, 이거 고글 나사가 헐거워졌나, 자꾸 내려오네.”
말을 하며 데일은 내려오지도 않은 고글의 양쪽을 잇는 다리 부분을 가운뎃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나 너네 혼내러 온 사람.”
그러자 창고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은 벨이 창고 벽을 쾅쾅 두드렸다.
“핫소스, 너 거기 있냐?”
“데일! 저 여깄어요. 할머니랑 같이 있어요.”
그러자 여자의 생존을 확인한 데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네가 알려준 노래 처음 가사가 뭐였지?”
“네? 아, 지금이 그런 질문을 할 때예요?”
“대답이나 해.”
“어…… 네 못생김이 나를 불쾌하게 하네. 그러니까 저 멀리 떠나줘. 어이 이봐, 다가오기만 해봐.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거야. 이거요.”
‘……날붙이랑 합체시켜 준다가 아니었네.’
노래 가사를 확인한 데일이 좌우로 목을 풀었다.
“어쨌거나 제대로 대답하는 거 보니 어디 하나 잘려 나간 데는 없나 보네.”
“아, XX! 아주 그냥 악담을 해라, 인간아!!”
“킥.”
벨은 멀쩡하다 못해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여자의 상태를 확인한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진하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