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푸핫…… 아하핰…… 아, 죄송해요. 너무 크게 웃어버렸네요.”
세상 진지한 얼굴을 한 사람을 앞에 두고 폭소를 터트려버렸다.
잠깐 놀란 듯해 보이던 플로라 할머니는 이내 다시 진정을 되찾고 살가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닌 거예요?”
“네, 전혀요. 한참 잘못 짚으셨어요. 으흐흐.”
“정말이죠? 데일이라는 그 남자는 딱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인상을 지녔지만, 우리 세바스찬도 나름 우수한 군인이었답니다. 벨이 도와달라고 말만 해주면 어떻게든…….”
“플로라 할머니, 정말이에요. 전 그 사람에게 어떤 협박도 받지 않았고 제가 원해서 그 사람 옆에 있는 거랍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딘가 계속 못 미덥다는 듯 나를 훔쳐보던 할머니는, 이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데일 군한테 미안하네. 벨한테도 그렇고. 미안해요. 괜한 일에 걱정이 많은 노인네 노파심이라고 생각해 줄래요? 내 눈엔 아무리 봐도 부부 사이라기엔 데면데면해 보였거든요.”
“아, 하핫…….”
예, 매의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할머니.
맞혀버린 정답을 아니라고 박박 말하며 조금 양심이 찔렸다.
플로라 할머니가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아왔다.
“아유, 벨 손에 무슨 땀이……. 어디 안 좋아요?”
“아, 하하…… 그러게요. 왜 땀이 났지.”
할머니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의심과 공포로 얼룩진 내 손바닥을 닦아주셨다.
마음이 몹시 찔렸다.
“벨이 손녀를 닮아서…… 자꾸 눈길이 가다 보니까 쓸데없는 망상을 한 모양이에요.”
“손녀라면 아까 그 세나라고 하셨던…….”
“네, 맞아요. 세나.”
내 손을 살짝 거머쥔 자글자글한 손에 힘이 실렸다. 그와 동시에 플로라 할머니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수한 기술자였답니다. 날고 기는 다른 기술자들 머리 꼭대기에 서서 현장을 진두지휘할 만큼 빼어난 아이였죠. 빙하기가 온 게 8개월 전이니까……. 네, 맞네요. 2년 하고도 8개월 전에 큰 프로젝트를 책임지게 됐다면서 제국으로 떠났죠. 그게 그 아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 줄은…… 어찌 알았겠어요.”
맞잡은 손 위로 할머니의 눈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벨처럼 긴 머리에 총명한 까만 눈동자를 가졌던 아이라…… 오랜만에 더 생생하게 그 아이가 생각났지 뭐예요. 아마 세바스찬도 그랬을 거예요. 내색은 안 하지만.”
할머니 세나 양은 어딘가 잘 살아 있지 않을까요? 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저 말없이 그녀의 자글자글한 손을 꽉 틀어쥘 뿐이었다.
할머니가 그런 내 손을 다른 한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이구……. 어린 아가씨가 어른을 위로할 줄도 알고, 애긴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다 컸네. 고마워요, 벨.”
한 번 더 내 손을 꾹 잡았다 놓은 플로라 할머니가 빈 밀가루 포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바닥에 놓인 거대한 포대에서 작은 빈 포대로 밀가루를 퍼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쉬익, 팅!
통나무의 빈틈 사이로 들어온 화살이 코앞을 스쳐 날아가 반대편 벽에 꽂혔다.
방금 날아온 화살의 화살대가 진동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할머니!!”
플로라 할머니를 부르며 몸을 바닥으로 수그렸다.
뒤돌아본 그녀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나를 따라 몸을 수그렸다.
몸을 바짝 낮춘 상태로 창고 문까지 기어가 안쪽 빗장을 걸어 잠갔다.
“후…… 후우…….”
오르내리는 가슴이 보일 정도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신 차리자.
어떻게,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생각해 내자.
“할머니, 이 빗장 튼튼해요?”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선 이 문부터 더 막죠.”
무거운 나무 상자를 둘이서 질질 끌어다 문 앞에 놓았다.
그렇게 문 앞을 총 네 개의 상자로 틀어막고 나서야 나는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로 눈을 가져갔다.
‘젠장, 어디냐.’
화살이 창고의 뒤편에서 날아왔으니 이 방향이 맞을 텐데, 도무지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해 질 녘엔 보이던 폐가들도 어둠 속에 몸을 꽁꽁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왜 대뜸 화살부터 날렸지? 우리가 창고로 들어오는 걸 확인했다면 여자 둘인 만큼 기습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을 텐데…….
설마 상대는 창고 안에 우리가 있는 걸 모르는 걸까.
“아마 그놈일지 몰라요.”
“네?”
“세바스찬이 한 일주일 전부터 초록색 모자를 쓴 놈이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 같다고 언질을 주더라구요.”
“…….”
“분명 이 창고에 있는 식량이 목적일 게 뻔하죠. 세바스찬한테 또 나타났다는 말이 없길래 이곳을 뜬 줄 알았는데…….”
그럼 상대는 초록색 모자 한 놈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문을 열고 나가 집에 있는 두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 명이 미끼로 창고에 남아 버티고, 한 명이 도움을 요청하러 달려 나가기엔 할머니가 걸렸다.
내가 달려 나간다고 하면 할머니가 미끼로 남아줘야 하는데, 혼자서는 버티지 못하실 거란 계산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미끼로 남기엔 할머니는 너무 느렸다.
‘한 놈 정도면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 창고에 무기로 쓸 만한 거 없어요?”
“무기? 아!”
할머니가 잡동사니 사이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돌아선 그녀의 양손에는 창술사들이 쓸법한 거대한 창이 들려 있었다.
“왜 이런 게 창고에…….”
“우리 영감이 들짐승을 사냥하러 나갔다가 쓸 데가 있을지 몰라 주워왔는데, 쓸 일이 없어서 창고에 처박아 뒀지 뭐.”
“아무튼 좋아요. 제게 주세요.”
창의 긴 손잡이를 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여긴 나랑 할머니뿐이야, 내가 해야 해.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그때 다시.
-쉬익!
두 번째 날아온 화살은 창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창고 외벽 통나무에 박힌 화살대가 첫 번째 화살과 같이 몸을 떨었다.
아무리 명사수라도 이 어둠 속에서 창고 벽을 이루는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로 화살을 날려 사람을 맞추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첫 번째 화살이 통나무 사이로 들어온 건 우연이라 보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저 화살들은 목표물을 맞히기 위한 화살이라기보다…….
‘위협용이거나 창고에 우리가 있는 줄 모르는 거야.’
정말 모르는 걸까.
확실히 창고 안은 10미터 밖도 분간하기 어려운 바깥보다도 더 어두컴컴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이다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왔다.
“할머니 이쪽으로 오세요. 제 옆으로요.”
그러자 구석에서 날 바라보고 있던 플로라 할머니가 내 곁에 다가와 섰다.
우리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는 창고 안에서, 정확히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놈이 창고 근처로 올 거예요.”
“응.”
“와서 문을 열려고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숨죽이셔야 해요. 아무 소리도, 인기척도 내지 마세요.”
“응. 알겠어요.”
우리는 창고 한가운데 서서 인기척을 지웠다.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정체 모를 누군가가 창고로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커져 왔다. 상대방이 지척에 와 있었다.
‘왔어.’
창고 뒤편에서 걸어온 그는 벽에 박힌 화살을 회수하려는 모양이었다. 화살이 잘 뽑히지 않는지, 그가 끙 하고 힘쓰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목을 살짝 오른쪽으로 뺐다. 그러자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 벌어진 틈 사이로 초록색 모자가 언뜻 비쳤다.
‘지금이다!’
다른 곳은 그렇지 않았는데 유독 크게 벌어져 있던 틈이 있었다.
틈 사이로 매섭게 창을 찔러넣자 창끝이 단단한 무언가를 찢고 들어가는, 끔찍한 느낌이 났다.
빈 창고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을 그는 피하지 못한 것이다.
“컥.”
“젠장.”
놈이 제 몸에 박힌 창을 쥔 모양이다. 그러나 창끝에서 미약하게 느껴지던 힘은 곧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사라졌다.
“쿨럭…… 컥…….”
피를 토하는 몇 번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쿵, 하고 창고 벽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이 바깥 바닥을 향해 기울었다.
그때까지도 손바닥이 뚫릴 듯 거세게 창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는 풀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죽……었나?’
바깥으로 나가 눈으로 확인을 해야 확실할 것 같은데,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죽은 거 맞지?
그래서 나도 살고 내가 할머니도 지킨 거 맞지?
그런데 왜 눈물이, 눈물이 왜…….
‘울 거 없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울지 말자, 울지 마.
달달 떨리는 허벅지를 두 손으로 꾹 눌러 진정시켰더니 이번엔 호흡이 가빠왔다.
진정하자,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은 이제…….
“뭐야? 어, 이거 봐라?”
갑자기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정신이 나가 있던 사이, 모르는 목소리들이 창고 곁에 다가와 있었다.
“어? 이 새끼 뒈졌는데?”
퍽퍽, 묵직한 무언가를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포심에 질려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니까 왜 허공에다 화살은 쏘고 지X이야, 화살 아깝게. 그러니까 뒈지지. 활 연습하다 뒈진 새끼는 또 처음 보네, 큭큭큭.”
상스러운 목소리와 그에 걸맞게 더 상스러운 내용들이 창고 바깥에 존재했다.
나는 천천히 감아버렸던 눈을 떴다. 그러자 내가 창을 찔러넣었던 그 틈으로.
“이 씨X. 너구나, 찌른 게.”
모르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