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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6)화 (16/108)

16화

-똑똑.

뭐지?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지도 않은 상태로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벨, 방에 있어요?”

플로라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일어서며 대답했다.

“네, 있어요.”

“줄 게 있어서 그런데 잠깐 나와줄 수 있어요?”

“…….”

책상 위엔, 지금은 욕실에 있는 데일이 두고 간 단검이 놓여 있었다.

줄 게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예, 하고 문을 열면 ‘응, 너에게 줄 건 사망.’ 이러면서 총구를 들이미는 건 아니겠지.

‘아이 씨.’

데일이 하도 부정적인 소리들을 늘어놓은 탓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다 이따위였다.

“데일.”

말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가지 않게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욕실에선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려올 뿐 대답이 없었다.

오늘 저녁 노부부가 우리에게 베푼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작정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 나갈게요! 잠시만요.”

나가기는 하겠지만 데일의 말대로 날 지킬 무기 하나 없는 상태로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단 판단이었다.

종을 꺼내 들고 책상 위 단검을 향해 속삭였다.

“복제…… 복제! 복제하라니까.”

그러나 종은 아무 일도 일으켜주지 않았다. 다만 또 그 창을 띄울 뿐이었다.

[스킬 ‘자기연민’이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이런 거지 같은.

나는 다시 단검을 향해 외쳤다.

“종의 요정은 난데, 날 위해서는 작동하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복제해 얼른.”

종: …….

이놈의 망할 종. 너 땡길 때만 스킬 쓰는 거냐?

“무기 복제를 안 해줄 거면 네가 무기로 변신이라도 하든가.”

종: …….

사람이 약간 미쳐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사물한테 자꾸 화를 내던 나는 다 집어치우고 벗어두었던 패딩을 몸에 걸쳤다.

하나밖에 없는 단검을 사용해야 한다면 나보다는 데일이 사용하게 두는 게 맞았다. 결국 나는 단검 대신 종을 주머니에 넣고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 잠옷으로 곱게 갈아입은 할머니가 보였다.

“아, 죄송해요, 할머니. 기다리셨죠? 지금 막 씻고 나온 참이어서.”

“아니에요. 내가 너무 늦게 왔죠?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복도 끝으로 이끌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방문을 흘깃거리며 그녀의 손에 잡혀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은 잠옷 두 벌이었다. 한 개는 원피스형의 여자 잠옷이고, 다른 한 벌은 남자 잠옷이었다.

“이거 예전에 내 손녀가 입던 건데…… 시간은 꽤 지났지만 많이 입지를 않았던 옷이라 깨끗할 거예요.”

하얀 잠옷 위로 직접 수놓은 듯한 아기 고양이들이 귀여운 잠옷이었다.

다른 하나는…….

“남자 거는 우리 집 양반 잠옷인데, 노인네들이 입는 거라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깨끗이 빨아둔 거긴 하니까…….”

“노인네들이 입는 거라 싫다뇨! 너무 좋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 남…… 나암편도 조, 좋아할 거예요. 하하하…….”

말끝을 흐리는 할머니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함을 표하자, 그녀의 얼굴 위로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보니까 들고 온 짐이 얄팍한 것이 잠옷 같은 건 없을 수 있겠다 싶어서……. 입어준다니 내가 더 좋은걸.”

나보다 키가 10센티는 작아 보이는 할머니가 수줍게 웃으시는 모습이 그리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데일의 경고도 잊고 그만 할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품에 쏙 들어와 안기는 할머니에게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이 마을에서 다른 사람 봤어? 여긴 저들밖에 없어. 오늘 우리처럼 여길 지나가는 이들이 이전에 없었을까? 있었겠지. 아무 의도가 없는 놈들도 있었을 거고 저 노부부를 약탈하려 했던 놈들도 있었을 거야. 근데 저 부부는 지금까지도 멀쩡히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데일이 방에서 했던 경고가 생각났다.

“저 노부부 세상 좋은 사람들처럼 웃고 있지만 생존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혀온 사람들이란 걸 기억해. 이 세상에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없으니까. 그 목적이 공격이든 방어든.”

그때, 내 품 안에 잠시 안겨 있던 할머니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있잖아요, 벨.”

“네? 아! 제가 말도 없이 너무 무례하게 끌어안았죠? 죄송해요, 그만…….”

“아니에요, 그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게 아니라…….”

플로라 할머니가 살짝 고개를 빼더니 내가 나온 방을 힐끔 쳐다봤다.

“남편은 지금 씻고 있죠? 괜찮으면 나랑 얘기 좀 할래요?”

“…….”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친절한 사람이, 이 정겨운 사람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내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날 지배하려 들었다.

“왜 그러시는지…… 여기서 해도…….”

“남편 몰래 하고 싶어서 그래요.”

“…….”

나는 주머니 안에 든 종을 꽉 쥐었다. 분명 또 위험한 상황에서 뭔갈 요청하면 자기연민은 비활성화란다, 이런 말이나 띄우겠지만, 그렇다고 내게 다른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단단하니까 적어도 둔기로는 사용할 수 있겠지.

이 사람이 날 해하려는 무서운 마음을 먹었다면, 이 순간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해도 결국 오늘 밤 안에 사달은 나고 말 것이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를 따라가서 역시 내가 생각했던 좋은 사람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고픈 마음이 컸다.

‘내 욕심인가.’

“…….”

내가 말없이 서 있자, 그녀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만약 위협 감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할머니의 머리 위에 떴을 글씨는 빨간색이었을까 흰색이었을까.

데일은 경고했지만, 마음이 자꾸 그녀를 믿어보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위협 감지’ 없이 상대를 신뢰해 보세요.]

[당신의 ‘첫 번째 신뢰’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말이지, 저 말이 자꾸 걸린다고.

‘응원이라는 말에 뭔가 보상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다녀와서 남자에게 큰 소리로 말해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당신이 결국은 차를 돌려 내게 돌아와 준 것처럼 이 할머니도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을 건넸다.

“네, 좋아요.”

플로라 할머니와 함께 집을 나선 나는, 앞장서서 걷는 그녀를 따라 집 뒤편에 있는 창고로 갔다. 요 며칠간 노부부가 창고를 드나든 적은 없는 모양이다.

사박사박 눈 위를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깨끗한 눈 위에 나란히 찍혔다.

“마침 저녁을 만들고 났더니 밀가루가 똑 떨어졌지 뭐예요. 창고에 밀가루 한 포대가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네에…….”

얘기도 할 겸, 바닥 난 밀가루도 꺼내올 겸 그녀는 창고로 가서 이야길 마저 하자고 제안했다.

“결혼 8개월 차면 지금 신혼이나 다름없네~”

“그렇죠.”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씩씩하게 따라나섰지만, 할머니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손바닥이 젖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결혼하자마자 닥친 빙하기라니……. 신혼을 인류의 멸망과 함께해서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불행한 시대를 함께 이겨낼 상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참 아리송하네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걸요.”

“그래요? 그리 봐주면 고맙지. 세바스찬은 참…… 내 부족한 점을 알고 잘 채워주는 사람이랍니다.”

앞서 걷던 할머니가 그의 남편 이야길 하며 뒤돌아 웃음 지었다. 그녀의 손에는 빈 밀가루 포대가 들려 있었다.

“다 왔다.”

-끼익.

“이거 조심해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열린 문 앞에 서서 플로라 할머니는 내게 주의를 시켰다.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 조심할게요.”

통나무로 얼기설기 지어진 창고의 온도는 외부와 별다를 바 없이 추웠다.

안쪽에 자리한 각종 식재료와 저장 음식들이 보였다. 슬쩍 하나씩 들춰보자, 종류는 다양하게 있었지만 양은 거의 떨어져 가는 듯했다.

아마 얼마 못 가 바닥나지 않을까…….

“잠깐 여기 앉을까요?”

그녀가 나를 창고 구석의 통나무 의자로 안내했다. 나는 덜 마른 머리가 추워서 깊게 후드를 잡아당겼다.

“음…….”

플로라 할머니는 살짝 고민이 되는 듯, 말 꺼내기를 망설였다. 그리고 말을 꺼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로 예상외의 것이었다.

“혹시 지금 남편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가 벨 양의 남편이 아니라면…….”

“예?”

들켰나 싶어서 나는 넘어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장난으로 저런 말을 꺼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플로라 할머니의 표정은 진지하고도 심지 굳어 보였다.

“그러니까 어떤 강요나 폭력, 학대로 인해 억지로 아무 사이도 아닌 그 남자에게 끌려다니는 상황이라면…….”

“???”

“나랑 세바스찬이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게요.”

“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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