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5)화 (15/108)

15화

야, 이 미X놈아 뭐 하는 짓거리냐, 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 말마저도 남자가 오른팔로 내 얼굴을 휘감아 버린 탓에 할 수 없었다.

굵기가 내 얼굴만 한 팔뚝에 입이 막혀 읍읍거릴 뿐이었다.

그가 내 머리를 감싸 안은 오른팔을 제 쪽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그리고 살갑게 제 이마를 내 머리에 부벼왔다.

“예, 부붑니다. 8개월 된.”

내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대신 대답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의 물음에 답을 마친 그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

“어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착 치며 할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으니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해야겠네.”

그러자 부엌으로 가는 할머니를 따라 할아버지 역시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가 나간 쪽에서 소형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그 틈을 타 얼굴의 반을 가린 남자의 팔뚝을 밀어냈다.

“이봐요. 내가 당신이랑 왜 부부……. 아니, 왜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들키면 괜히 의심만 사죠. 거짓말해서 뭣 하려고 그래요. 그리고 멋대로 남의 얼굴에다가…….”

잔뜩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데일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자, 그는 당최 의미를 알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럼 부부가 그런 걸 허락받고 하나?”

“그, 러, 니, 까 우리는 부부가 아니…….”

데일이 내 말을 싹둑 자르며 들어왔다.

“나랑 부부라고 하고 한방 쓸래, 아니면 만난 지 이틀 된 사람이라고 하고 각방 쓸래. 오늘 밤 네 방에 누가 침입해도 난 옆방에 있으면 몰라.”

“…….”

“혼자서 싸울 힘 하나 없는데, 침입자가 들어와 공격하면 네가 뭘 할 수 있어. 누구든 들어오면 네 입부터 틀어막겠지. 네가 낯선 침입자를 보고 놀라서 소리쳐봤자 안 들린다고. 그럼 네가 아무리 악을 써봤자 소리는 네 목구멍으로 들어가 버리지. 난 옆방에서 계속 잘 자고 있을 거고, 그럼 너는 세상 하직…….”

“쉿! 쉿!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해대는 끔찍한 소리를 듣다 못 해 귀를 틀어막자, 데일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그쳤다.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가 정말 얄밉기 짝이 없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돼요?”

파스타 면을 끓는 물에 넣으며 플로라 할머니가 물어왔다.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네, 저는…….”

“이름은 핫, 성은 소스입니다. 어르신.”

할아버지가 식탁 반대편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기에, 나는 애써 웃으며 남자의 옆구리를 퍽 쳤다.

“어른들 상대로 뭐 하는 거예요. 장난치지 말아요.”

“남편이 장난꾸러기네.”

“하하…… 제, 제 남편이 조금……. 저는 벨이라고 불러주세요. 남편은 데일이구요.”

할머니는 “벨이라고 하는구나, 벨…….” 이라고 이름을 되새기며 수프가 담긴 냄비를 휘저었다. 옆에 앉아 할머니 쪽을 유심히 보던 데일이 번쩍 몸을 일으켰다.

“부인,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어머? 할 줄 알아요?”

“힘쓰는 건 다 할 줄 압니다. 파스타도 할 줄 알고요.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죠.”

할머니가 준비해 주신 저녁 메뉴는 간단한 빵과 파스타, 토마토 수프였다. 빵은 오븐에서 크기를 부풀려가고 있었고, 제일 먼저 준비한 수프는 냄비 안에서 팔팔 끓고 있었기에 남은 건 파스타뿐이었다.

할머니와 자리를 바꾼 데일이 능숙하게 부엌 정리를 시작했다.

‘저런 면도 있네.’

껄렁대고 비꼬는 모습만 보다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남자의 등을 보니 영 어색했다.

등이 참 넓고 광활하긴 하다. 광야가 있다면 저런 곳일까?

“아유~ 사이가 참 좋아 보이네. 이제 8개월이랬나?”

어느새 옆에 와, 데일이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한 할머니가 날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고 계셨다.

“아? 아! 네네……. 8, 8개월이죠.”

“둘이 정말 서로 좋아하는 부부 사이인 게 눈에 보여요. 남편 등을 보는 부인 눈에서 아주 꿀이 떨어지네.”

“컥, 쿨럭…….”

그러자 그가 홱 뒤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만족과 비웃음이 가득 서려 있었다.

XX.

“좋다~ 이렇게 손님맞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친구들 초대해서 저녁 먹던 예전이 생각나지 않아?”

할머니의 말에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보통 통조림 식사인데, 오늘은 특별하니까.”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특히 빵이 정말 기대돼요.”

“벨은 빵을 좋아하는구나? 더 넉넉히 구울 걸 그랬네?”

“아뇨, 아뇨. 충분한걸요. 한 입만 먹어도 바로 기분 좋아질 거예요.”

“그래요? 호호호호.”

“벨.”

플로라 할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데일이 나를 불렀다.

“이리 와줄래?”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자 옆에서 파스타 면이 팔팔 끓고 있었다.

“왜 불러요?”

바로 옆으로 가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묻자, 비스듬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그가 제법 거칠게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 X친 샠.”

“부부 사이 아닌 거 들통나고 싶어서 그래?”

거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그 말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노부부의 흐뭇한 시선이 등에 꽂혀 있었다.

“자기 없이 혼자 정리하니까 너무 심심해서 그러지.”

이중인격자 같은 새끼.

나는 다정한 얼굴로 그의 귓속에 속삭였다.

“도대체 왜 이래요? 들키는 게 싫으면 조심해서 행동하면 될 거 아니에요. 허리에 이 손부터 떼요, 좀.”

그러나 그가 이어서 한 행동은 허리에서 손을 떼기는커녕, 숨 막힐 듯 허리를 더 꽉 끌어당기는 일이었다.

남자가 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이 머저리야. 네가 덜 떨어진 표정으로 다 풀려서 헤실거리고 있으니까 내가 정신 차리게 해주려고 부른 거 아냐.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

내가 도대체 뭘 헤실거리고 있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자, 그가 다시 빠르게 말을 속삭였다.

“식칼이 모조리 없어.”

“???”

그가 눈짓을 준 방향엔 텅 빈 칼꽂이가 있었다.

“왜 부엌에 칼이 하나도 없겠어요. 다른 데 있겠죠.”

“대충 다 훑어봤어. 없어.”

“…….”

“부엌 수납장을 열어봤는데 칼이 한 자루도 없어. 있어야 할 칼들이 지금 어디 있겠어. 저들이 아직 우리 무기를 돌려주지 않았단 사실을 잊은 건 아니지?”

“…….”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노부부를 살펴보려다 행동을 멈췄다.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저들이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단 소리야. 그러니까 웬만하면 내 옆에, 내 눈길이 닿는 곳에 있어. 알겠어?”

조심해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이해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유, 정말 사이가 좋아 보이네. 남편이 장난기가 많은가 봐. 그게 다 아내가 예뻐서 그런 거지? 그렇지, 여보?”

“…….”

“예, 어르신. 보면 장난을 안 치고는 못 견딜 정도로 제가 아내를 좋아합니다.”

등 뒤에서 호호호 웃는 플로라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편을 돕는다는 구실로 파스타가 만들어질 때까지 내내 그의 옆에 붙어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노부부가 우리에게 내어준 방은 2층 안쪽 방이었다. 자신들은 밤에는 지하에 마련해 놓은 대피소에 머문다는 말도 전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걸터앉아 무언갈 만지작거리던 데일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무기 가지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저쪽은 보호할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우린 빈손으로 있으라고?”

“…….”

사실 데일의 말이나 행동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나는 방에 딸린 욕실 앞에 서서, 플로라 할머니가 들려준 수건을 쥐고 우물쭈물했다.

내가 긴장을 풀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동안,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어쩐지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표정이 어두워지는 건데.”

“…….”

“잠들어 있다가 깨어보니 어제라며. 넌 아직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잖아. 그럼 그럴 수 있어. 근데 언제까지고 그렇게 헬레레는 안 돼.”

“…….”

“알겠으면 씻어. 뭘 멀뚱히 서 있어.”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짐승처럼 변했다면서 당신은? 당신은 어떤데? 라는 질문을 속으로 던지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데일이 쥐고 있던 단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일어났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하루 이틀 놀고 나면 던져버릴 새 장난감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너 머리는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데 눈은 멀쩡하네. 그렇게 뜨거운 눈길로 날 쳐다보는 걸 보면.”

다가와 선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노려봐 주자 그 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뭐…… 네, 얼굴 반반은 하세요.”

“하…….”

그는 흥미로워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데일이 내 귓가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원하면 얼마든지 같이 씻어줄 수도…….”

“우웩.”

“우웩?”

내 말을 따라 하며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트렸다.

얼굴을 맞추려고 던진 수건을 데일은 가볍게 잡아챘다.

“수건 그거 써요. 할머니가 두 장 주셨으니까.”

제 손에 들린 수건을 움켜쥐며 그는 애틋한 눈길로 수건을 바라봤다.

“오, 수건아. 저 나사 빠진 여자 대신 네가 형이랑 씻는 영광을 누리게 됐구나. 이리 오렴. 오, 너는 살결이 퍽 거칠구나. 제대로 씻겨줘야겠는걸?”

저 자식, 저거 진짜 미X놈 진짜.

데일은 아직 씻지도 않은 제 얼굴을 수건에 비벼대고 있었다.

“이봐요.”

“…….”

“수건 한 장밖에 없어요. 아직 씻지도 않은 얼굴을 그렇게…… 아, 됐다. 알아서 해요.”

제 몸 제가 알아서 하겠지.

그대로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날 불러세웠다.

“야.”

“??”

그가 손에 들린 수건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난 너랑 씻고 싶다고 했지 얘랑 씻고 싶다는 말은 안 했다?”

“아, 꺼져요, 좀.”

“욕실에 침입자가 들어가도 난 모른다.”

“그냥 죽고 말래요.”

남자가 뭐라고 하든 말든 어서 빨리 씻고 싶었다.

닫히는 욕실 문 뒤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데일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