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제 외투 주머니에도 무기가 있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제가 꺼내도 좋고,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꺼내 가셔도 좋습니다.”
“…….”
데일과 나는 차 지붕에 손바닥을 붙이고 바짝 엎드린 채로 시선을 나눴다.
내 흐름에 동참한 그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아가씨가 참…….”
할머니가 내 옆구리 쪽으로 다가섰다.
“난 딱 봐도 아가씨가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걸 알겠는데, 저 양반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아가씨가 이해해 줘요?”
“네.”
할머니가 내 오른쪽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앞치마에 수놓인 꽃자수가 알록달록 아기자기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됐어요?”
“남자는 내가 하지.”
할아버지가 자리를 옮겨 데일 쪽으로 건너갔다.
데일은 자신이 말한 대로, 차 지붕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데일의 외투를 뒤지는 할아버지와 데일 사이에서 가시지 않은 긴장감이 흘렀지만 다행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일의 총과 단검을 챙긴 할아버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
이제 무기도 모두 빼 갔으니 그만 우리를 향해 겨눠진 총을 내려주었으면 했는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의심이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힘을 풀지 않은 눈으로 입을 씰룩이며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때.
“월월! 월!”
아까 전 할머니가 온 방향에서 월월 짖으며 나타난 것은 커다란 말라뮤트 한 마리였다.
촉촉하고 까만 코에 흰 점이 난 말라뮤트는 할아버지에게 한 번, 할머니에게 한 번 다가가 코를 문질렀다.
제 코를 문대는 표정이 여간 신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 우리 몽돌이~ 간식 다 먹고 나왔어? 어디 보자~ 입에 또 잔뜩 묻혔나~”
개의 입과 턱 부근의 털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할머니가 내 권총을 집어넣었던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말라뮤트의 입가를 훔쳤다.
“월월!”
할머니가 만져주자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 난 말라뮤트가 드디어 새로운 인간 둘을 발견했다.
“월?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따라가던 말라뮤트가 탐색 대상으로 먼저 선정한 사람은 데일인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냄새를 맡으며 데일 곁으로 간 개가 데일의 발 근처를 돌며 냄새를 맡았다.
“그래, 몽돌아. 형 나쁜 사람 아닌 거 같지? 알겠다고? 그래~ 아주 영리하구나, 너.”
“킥…….”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할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었기에, 나는 안쪽으로 입술을 말아 넣고 꽉 깨물었다.
“그래~ 나쁜 사람 아닌 거 알았으면 두 분 어르신께도 가서 말 좀 해줄…….”
데일의 흐릿해지는 음성을 따라가니, 앞다리를 들고 선 몽돌이가 데일의 다리 위로 제 앞다리를 얹고 있었다.
그리고 데일의 허벅지를 잡고 붕가붕가를 시전해 버렸다.
“풋…….”
“크흡…….”
이번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나와 할머니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잘 흔드네? 근데 형이 더 잘해.”
“…….”
차 지붕에 엎드린 채로 그가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강아지한테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외설스럽게 흔들어대는 남자의 신난 얼굴을 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런 걸 이기고 싶어 하는 거냐.
나와 눈이 마주친 데일은 민망해하기는커녕 튕기던 골반을 더 요란하게 흔들며 웃었다.
묘한 경쟁심이 날 자극했다.
나도 지고 싶지 않아서, 언제 그 행동을 그만두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놈의 신체 중앙부를 노려봐 주었다.
“크흠, 흠.”
할아버지의 표정은 매우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든다는 표정이었고, 오로지 할머니의 얼굴만이 변화 없이 평화로웠다.
“저거 봐. 우리 몽돌이가 좋아하잖아. 우리 몽돌이가 사람 잘못 본 적 있어? 몽돌이 할머니한테 와~ 손님한테 그럼 어떡해, 응?”
“…….”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가 헥헥거리는 몽돌이를 보며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숙이는 얼굴이 마치 저런 얼빠진 놈들이 무슨 위협이 되겠냐는 표정이었다.
그가 스르륵 엽총을 내려 어깨에 둘러멨다.
“둘 다 저녁은 먹었나?”
“아뇨.”
“아직이요.”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와 데일의 입에서 동시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럼 가서 저녁이나 들지, 따라와.”
앞서가는 노부부를 따라 이동하려는데 새로운 창이 떴다.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완료된 퀘스트 명: 사람이냐 짐승이냐, 그것이 궁금하다 (5/5)
‘위협 감지’ 5명에게 사용해 보기 완.]
[튜토리얼이 종료되어 ‘위협 감지’와 ‘무기화’가 사라집니다.]
[이제부터 모든 판단은 ‘종의 요정’의 몫입니다. 혹독한 추위로 뒤덮인 세계에서 사람과 짐승을 잘 가려내 보세요.]
‘사라진다구? 벌써?’
저기요, 시스템 씨. 전 아직 덜 컸다고요! 나 아껴줘! 불쌍히 여겨 달라고 XX!
황당해 속으로 외치는데 맨 아래, 확인 안 한 창이 남아 있었다.
[‘위협 감지’ 없이 상대를 신뢰해 보세요.]
[당신의 ‘첫 번째 신뢰’를 응원합니다.]
❅
노부부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우리는 곧 폐허들 사이에서 비교적 멀쩡하게 서 있는 집을 만날 수 있었다.
“들어와요.”
살갑게 손짓하는 할머니를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손때 묻은 살림들이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겼다.
“춥죠? 저 양반이 밖에 오래 세워두는 바람에 두 사람 다 코가 빨개졌네?”
할머니의 친절한 웃음에 나 역시 수줍게 웃음 지었다.
그녀가 데일과 나를 장작불 앞으로 이끌어 앉혔고, 말없이 다가온 할아버지는 장작 한 개를 벽난로 안으로 집어 던졌다.
새 불쏘시개를 받아먹은 장작불이 화르르 타올랐다.
‘따듯해…….’
“자, 덮어요.”
벽난로 앞에 앉아 꼬물거리는 내게로 할머니가 담요를 건네주었다.
할아버지는 장작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도록 불쏘시개를 뒤적이는 중이었고, 할머니는 자꾸 나와 데일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좀 전까지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던 이들이 이분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자아~ 이건 홍차. 찻잎을 이제 막 넣었으니까 잠깐 기다립시다~”
테이블 위로 찻주전자와 잔을 담은 트레이가 올라왔다.
트레이에 담긴 잔은 총 네 잔이었다. 나와 데일 앞자리에 앉아, 은은한 미소로 찻잎이 우러나길 기다리던 할머니가 이내 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르륵.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불 소리, 주전자의 물줄기가 찻잔으로 떨어지는 소리들이 내 마음을 안정케 했다.
나는 건네받은 찻잔을 입안으로 기울였다.
‘아, 떫어.’
홍차가 참 떫었다. 어찌나 떫은지 어깨가 흔들리는 맛이었다.
옆에 앉은 데일을 쓱 보니 그에게서도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그는 비교적 티를 내지 않고 홍차를 들이켰다.
사선에 앉은 할아버지만이 세상 평온한 표정으로 홍차를 홀홀 드시고 계셨다.
‘다들 대단하네.’
그래도 일부러 차를 우려주신 거니 잔을 내려놓지는 말고, 손을 데우는 용도로 들고 있자 싶었다.
“홍차가 좀 떫죠?”
할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티, 티 났나 봐.
“아, 아뇨 그게…….”
“원래라면 밀크티를 해줬을 텐데, 요즘 같은 때엔 우유를 구하는 게 금덩이를 구하는 일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 입맛엔 홍차가 좀 떫을 거예요. 다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목만 살짝 축이고 내려놔요, 호호.”
“아…… 네.”
나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오렌지색 홍차 위로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도 따듯해서 좋아요. 할머니.”
말을 내뱉고서 살짝 당황했다. 이 세계에선 할머니가 아니라 무슨 무슨 부인이라고 불러야 예의에 맞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털털하게 웃어주셨다.
“아이구~ 우리 손녀뻘 되는 사람이 할머니~ 하고 불러주니까 참 마음이 따듯해지고 좋네. 혹시 내가 아가씨한테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얼마든지 좋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옆에 이 영감탱이한테도 할아버지라고 한 번만 불러줄래요?”
그 말에 할아버지가 마시던 홍차를 잘못 삼켰는지 잔기침을 콜록거리셨다.
별말 아닌데 시켜서 하니까 거 되게 쑥스럽네.
“할아……버지.”
“남편 이름이 세바스찬이에요.”
“세바스찬 할아버지…….”
그러자 할아버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 속에 파묻힌 귀가 빨개졌다.
“어머~ 이 영감탱이가 할아버지라고 불렸다고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어휴~ 징그럽다. 그렇죠? 보자마자 얼굴에 총구를 들이댔으면서.”
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놀리는 재미로 사시는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홍차를 다 비우곤 손수건으로 입가를 정리하고 계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나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짓은 당장 죽고 싶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난 미안할 게 없네.”
“이해해요, 할아버지.”
“이해합니다, 어르신.”
“…….”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말이 없어진 세 사람을 앞에 두고 다시 말을 꺼낸 이는 할머니였다.
“맨날 쪼글쪼글한 영감탱이 얼굴만 보다가 젊은 사람들 보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호호호호~”
“호, 호호…… 호호호.”
할머니,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
플로라 할머니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눈길로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다시 우리를 향해 말을 걸었다.
“둘은 부부인가?”
“아…….”
아니요. 절대 그런 사이 아닙니다. 할아버지, 라고 대답하려는데.
-쪽.
갑자기 내 왼쪽 볼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남자의 입술 감촉 때문에 하려던 대답이 저세상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