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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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이 지도에 찍어준 장소는 몇 날 며칠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그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으니 매일매일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마침 우리가 가는 경로엔 작은 마을들이 몇 곳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지금쯤 마을이 보여야 했다.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으니 마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
“어, 저기.”
몇 미터 앞에 이름이 적힌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차로 그 옆을 지나며 표지판을 확인하자.
-로사-
바로 우리가 찾던 마을이었다.
데일이 표지판이 설치된 길목으로 핸들을 꺾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들어가자 조금씩 마을의 실체가 드러났다.
“…….”
폭격이라도 맞은 듯, 건물들은 죄다 무너져 있고 보이는 것이라곤 건물의 폐허와 잔해뿐이었다.
차 타이어가 나무와 돌 잔해 위를 지날 때마다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마을은 너무 멀어.”
데일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지도상에 표시된 다음 마을은, 우리가 온 곳에서 이 마을까지 달린 거리만큼을 또 달려야만 했다.
아마 내일 새벽에나 도착하겠지, 물론 그 마을 역시 어떤 모습일진 알 수 없고.
“차 안에 있어.”
그러나 차에서 내리는 그를 따라 나도 차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를 머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기 중에서는 미약한 폭약 냄새가 났다. 꼭 불꽃놀이 했을 때 맡았던 것 같은.
-파삭.
신발 밑창에 무언가가 밟혔길래 발을 들어보니 그것은.
‘먼지 덩어리?’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무 조각과 핏덩이, 먼지, 머리카락 등이 엉킨 덩어리였다.
“윽.”
속이 매스꺼웠다. 급하게 코와 입을 틀어막고 그 덩어리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혹시라도 저 덩어리의 냄새를 맡게 될까 봐 소름이 끼쳤다.
“있잖아요. 우리 오늘…….”
꼭 여기서 머물러야 해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밤새도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도로를 달리자고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데일은 벌써 직진하고 있었다.
“들어가 보자. 무너지지 않은 집이 한 채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추위를 피할 장소가 필요해.”
“선택지 2, 차에선 잔다. 어때요?”
“너 한겨울에 시동 끈 차에서 안 자봤구나?”
“보통 없죠.”
여분의 기름통 따윈 없었기에 최대한 기름을 아껴야 했다. 시동 꺼진 차 안의 냉랭한 밤공기를 상상하니 반갑진 않았다.
“어쩔 수 없네.”
가까운 곳에 멀쩡한 건물이 보였다면 차를 두고 조용히 움직였을 텐데, 그러기엔 가야 할 거리가 멀었다.
마을 깊숙한 곳에서 차도 없이 고립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며 그가 운전석에 앉았다.
다시 차에 타, 우리는 천천히 느릿느릿 차를 몰았다.
큰길의 양옆으로 잔뜩 허물어진 건물들이 즐비했다. 해는 더 저물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사위가 죽은 듯 조용했다.
그때였다. 방울 여러 개가 몸을 부대끼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기울여 차 밖을 보니, 소리의 출처는 끈에 연결된 페인트 통이었다.
페인트 통 안에 든 방울들이 몸을 흔드는 소리가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로 요란스레 지나갔다.
“덫이야.”
우리가 탄 차량의 타이어가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덫을 밟은 모양이었다.
데일이 액셀을 밟았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타이어가 제자리에서 공회전할 뿐이었다.
그가 재빨리 내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저격수가 있을지도 몰라.”
차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서 고개만 들어 주변을 살폈다.
저 무너진 건물 어딘가에 몸을 바짝 낮추고 우리의 머리를 저격 중인 스나이퍼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럼 우린 독 안에 든 쥐네요.”
“안타깝게도 정답이야.”
어디지, 어디서 저격 중인 걸까.
이대로 몸을 웅크린 상태면 저격수의 사격 범위 안에 들어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무는데.
-저벅저벅.
차를 향해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행동을 요구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천천히 차에서 나와.”
데일이 몸을 웅크린 채, 패딩의 왼쪽 주머니엔 단검을, 오른쪽 주머니엔 권총을 넣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사용법 기억하지?”
오늘 출발하기 전, 데일은 내게 권총 사용법을 가르쳤다. 내 외투 오른쪽 주머니 속에 권총이 들어 있었다.
“맞출 거란 기대 안 해. 아니, 맞출 생각하지 마. 목표물 근처 바닥을 쏴. 목표물이 놀라는 잠깐이면 충분하니까. 날 주시하다가 내가 신호 주면 그때야. 알겠지?”
긴장으로 고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알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좋아. 상대는 너보다 아무래도 남자인 날 더 신경 쓸 거야. 그러니 네겐 얼마든지 기회가 생겨. 기회는 내가 만들어 줄게.”
-탕!
그때 총성이 울렸다. 약간 더 흥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꾸물대지 말고 나와!”
데일이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 그는 먼저 차 문 위로 상대에게 제 빈손부터 노출되도록 손을 들었다.
나는 차 문 뒤로 조심스레 일어서는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르신, 저는 아무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추위를 피할 장소를 찾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건 내가 판단한다.”
데일이 어르신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상대는 아무래도 나이가 지긋한 사람인듯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서 꼬장꼬장한 성미가 느껴졌다.
“나머지 한 명은 언제 얼굴을 보여줄 셈이지? 친구 얼굴에 구멍이 나는 꼴을 봐야 나올 생각인가?”
역시 상대는 이쪽의 인원을 다 파악한 상태였다.
데일이 나를 곁눈질했다. 괜찮으니 천천히 일어나라는 의미였다.
“나, 나가요!”
데일이 한 것처럼, 차 문을 방패 삼아 그 뒤로 천천히 일어섰다.
상대방은 뒤로 깨끗하게 빗어 넘긴 올백 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목소리가 젊어 예상치 못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매서운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백이 대단했다.
당장에라도 데일과 나를 향해 연달아 총알을 갈길 것만 같아 다리가 후들거렸다. 노인의 머리 위로 주황 글씨가 떴다.
[타인과 마주쳤습니다. 위협 감지 중……]
[감지 완료: 위협 수준 〘중〙]
‘위협 수준 중이면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데일을 곁눈질했다.
언제냐, 언제 쏘면 되냐.
‘꿀꺽.’
“기다려.”
데일이 상대방은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속닥대는 거냐. 입 닥쳐라.”
우리를 향해 으르렁거린 노인이 시선은 우리에게 고정한 채, 누군가를 불렀다.
“플로라. 플로라……. 아, 플로라!”
“가요, 가요!”
그러자 폐허 뒷골목에서 종종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건 키가 매우 작고 소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할머니였다.
“대체 뭐 하느라 이제 와?”
“아니, 그게 여보, 우리 몽돌이가 방울 소리를 들으면 좀 흥분해요? 나오려는데 같이 나오겠다고 치마를 붙들고 늘어져서 올 수가 있어야지.”
“으이…….”
우리를 앞에 두고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고 나와 데일의 시선이 교차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던 노인이 홱 이쪽을 돌아보았다.
“너희! 손 위로 들고 차에 엎드려.”
우리는 순순히 노인의 말을 따랐다.
“플로라, 내가 겨누고 있을 테니까 가서 주머니 확인해. 프, 플로라?”
노인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플로라라는 이름의 아담한 할머니는 이미 내 곁으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플로라…… 플로라, 허튼짓하지 마, 제발.”
“아유, 이 양반아! 애기들한테 총 들이밀지 말아요!”
“…….”
“보면 몰라요? 아주 애기들이구만!”
종종 다가온 할머니가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긴장한 채로 손을 높이 들고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여보…….”
“왜? 왜? 왜 무슨 일인데 그래?”
할머니가 말끝을 흐리자, 할아버지는 좀 더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한층 더 사나워진 눈빛으로 할아버지가 데일을 향해 겨눴던 총구를 내게로 옮기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이 아가씨 얼굴이 꼭.”
“…….”
“우리 세나를 닮았어.”
세나라는 말에 다가오는 할아버지의 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이내 할머니의 등 뒤로 다가온 할아버지가 가까이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얼굴을 확인하고 난 할아버지의 까만 눈동자가 순간 작게 일렁였다.
[상대의 위협 수준이 변화합니다.]
[재감지 완료: 위협 수준 〘하〙]
“…….”
“맞지?”
“……플로라, 닮았어도 이 아가씬 우리 세나가 아냐. 아직 이자들이 가진 무기를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방심하지 말고 어서…….”
그가 다시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사냥할 때 쓰는 총열이 긴 엽총이었다.
잠시 흐트러진 듯 보였던 감정이 돌아와 있었다.
“으이구!! 빨리 그 총 못 내려요!?”
“플로라, 내 말대로…….”
“하, 할아버지 할머니!”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놀란 둘이 나를 쳐다보았다. 놀란 건 데일도 마찬가지였는지 차 건너편에 선 그의 눈썹이 살짝 들려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위협 수준이 감소한 걸 보면 이 사람들 완전한 악인으로 보이진 않아. 이쪽에서 먼저 협상의 여지를 준다면…….’
나는 손을 들고 차에 엎드린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에는요. 할머니 말씀도 맞지만, 할아버지 말씀도 맞아요. 저기 그러니까…… 할머니 말씀처럼 저희는 누군가를 해칠 의도가 없어요. 정말이에요.”
“…….”
“근데 또 모르는 일이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속으로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처럼 경계하는 게 당연하죠. 제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권총이 한 개 있어요. 그것부터 빼 가세요. 그리고 의심을 거둬주세요. 부탁…… 드려요.”
그때 건너편에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데일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