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거짓말하면 뒤진다, 너.”
닿을락 말락 하던 남자의 코끝이 내 콧대에 닿은 순간, 그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사실을 말해.”
“거짓말한 게 있어야 사실을 말하죠.”
나는 턱을 위로 쳐들었다.
그 바람에 놈의 코끝이 내 콧대를 타고 미끄러지며 이번엔 입술이 닿을 듯했다.
“…….”
“…….”
민망해서라도 뒤로 물러날 만한데, 그도 나도 누구 하나 뒷걸음질 치는 이가 없었다.
가까이서 시선이 맞붙었다. 짓누를 듯 내려보는 시선에 맞서, 나도 부러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놈을 노려봐 주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가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네 말이 거짓인지 알려줘?”
“…….”
“마법 쓰는 놈들은 다 멸종한 세상이니까.”
그가 탁자로 가 포크 한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남자가 무얼 하려는 건가 집중해서 쳐다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포크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내 능력도 사라졌어.”
“능력이 뭔데요.”
“염력, 특기는 중력 조작. 이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
“…….”
그 후로 짤막한 남자의 설명이 이어졌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대륙에서 전쟁은 일상이라 할 만큼 빈번했고, 때문에 헌터들의 주 무대 역시 전쟁터였다.
군사력은 곧 헌터들의 수였다. 능력 좋은 각성자를 몇 명 보유하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헌터들을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동시에, 힘없는 자신이 그들의 능력에 휘둘리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느리지만 조금씩, 그들은 염원을 이뤄나갔다.
오로지 군사력에 치중한 기술의 발달은 실로 놀라운 전쟁 도구와 무기들을 만들어냈다.
근래에 와서도 기술이 헌터들의 능력을 넘어서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기술은 각성자 의존도를 점점 줄여나갔다.
그로 인해 헌터들에 대한 처우 역시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더 이상 예전만큼 헌터들을 동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물리 계열을 제외한 나머지 헌터들이 동시에 힘을 잃었다.
늘 물리 계열 헌터의 능력을 웃돌던 마법 계열 헌터들의 힘이 그날로부터 죽어버린 것이다.
그날로부터 마법의 힘은, 마법 계열 헌터들이 이전에 만들어 놓은 물건에서밖에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힘을 잃은 마법 계열 헌터 일부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대륙을 떠돌았다.
여기까지가 그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네 클래스는 들어본 적도 없어. 근데 나더러 널 믿으라고?”
“…….”
“버려지기 싫은 건 알겠는데, 무능력보다 거짓말이 더 싫으니까 다신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봐요. 그럼 당신이 입은 그 옷은요?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이건…….”
그가 제 옷을 쭉 훑어봤다.
“잘 입을게. 어떻게 숨기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와…….”
나는 그 뻔뻔함에 기가 차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
차에 기름을 주유하며 남자를 살폈다. 그는 우리가 원래 타고 왔던 차 트렁크에서 짐을 빼내는 중이었다.
새 차 트렁크에 짐을 싣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차 키 줘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꺼낸 차 키를 내 손바닥 위에서 흔들고는 잽싸게 도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뭐 하는 짓이지.
“내가 해.”
“…….”
“가다가 길에 버리려면 내가 운전 중이어야 편하지.”
이익, 그 농담은 이제 그만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반 이상이 진심인 걸 알기에 조용히 조수석에 탑승했다.
운전석에 탄 그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쳐 들었다.
“여기로 갈 거야.”
그가 콕 짚어준 곳은 커다란 대륙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데가 어딘데요?”
“여기가 어딘지도 몰라? 너 진짜 부족민이냐?”
내가 말없이 지도를 구기려는 포즈를 취하자, 그는 입을 가로로 다물더니 재빨리 지도를 빼앗아 들었다.
“여기, 퀸텟. 우린 여기서 위로 쭉 올라갈 거야.”
그러고는 시동을 걸었다.
‘음.’
남자에게서 지도를 넘겨받아 자세히 살폈다.
지도에 그려진 대륙은 마름모꼴 모양으로, 작은 지역은 생략하고 큰 지역 위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이 여기고, 여기까지 간다는 말이지…….
‘가까운데?’
가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대륙의 크기를 모르니 감이 오질 않았다. 물어보려 왼쪽으로 몸을 틀자, 그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요?”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알아요. 그러니까 왜?”
“…….”
“아…….”
뒤늦게 물음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없어요.”
“…….”
“찾아봐야 할 가족 같은 거.”
그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홀가분해서.”
“…….”
“이제 나한테서 너만 떨어지면 되겠어.”
“그만 출발하죠?”
남자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스치듯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 한 가지 더.”
“…….”
“네 이름.”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요. 좀 있으면 길바닥에 버릴 사람을.”
“아, 맞다. 그랬지? 고맙네. 그 계획을 잊고 있었는데 기억나게 해줘서.”
“이씨.”
“안 알려주면 대충 내가 알아서 부른다.”
“뭐라고 부르려고…….”
“출발하게 창문 닫아라. 핫소스.”
“핫소……?”
입고 있던 빨간 패딩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의 입에서 터지듯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원래 내 이름을 말하면 또 어디 원시 부족민 같네 뭐네 놀리겠지. 누군가한테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낯설어하고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겪는 것도 별로였다.
이참에 이 세계에 걸맞은 이름을 하나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벨. 벨이라고 불러요.”
“벨? 아무리 봐도 핫소스가 더 나은데. 핫소스로 해 그냥.”
“야.”
“데일. 데일이라고 불러.”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
-우우우웅.
한적하다 못해 우리밖에 없는 도로 위, 차 달리는 소음이 낮게 깔렸다.
보이는 건 눈 쌓인 자연경관과 들리는 건 규칙적인 차 소음뿐이니,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건 당연했다.
몇 번 눈을 끔뻑거린 나는 급하게 차 내부의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 해.”
“음악 듣게요.”
남자는 음악을 들으려 한다는 그 말이 뭐가 그리 이상한지 또 어디 부족민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내게 깨달음을 줬다.
차 내부를 아무리 봐도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가 보이지 않았다. 블루투스는 기대도 안 했지만 카세트테이프는 있을 줄 알았지.
설마 라디오도? 무전기는 있었잖아.
“라디오는 어떻게 켜요?”
“라디오를 왜 차 안에서 찾아.”
아…….
기운이 빠져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댔다가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대로 계속 심심할 순 없어, 음악 없는 드라이브라니. 지옥이야?
즐겨듣는 K팝은 부르기가 어려웠고 때마침 부르기 편한 팝송이 한 곡이 떠올라, 나는 조수석 앞 대시보드를 손바닥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쿠궁, 쿠궁 쿠궁 쿠쿠쿠 쿠궁 쿠궁…….
이내 백색소음만 들리던 차 내부가 흥얼거리는 내 목소리로 가득해졌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날 언제까지 이대로 둘 셈이야.
와서 가져가.
와서 가져가.
나를 봐줘.
나를 봐줘.
너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그리고 너도 나를 봐줬으면 해.
내 손을 잡아줘.
와서 가져가.
와서 가져가.
내 곁에 있어줘.”
미국 록 밴드의 유명한 팝송이었다. 들떠서 흥얼거리는 내 노랫소리에 맞춰 남자가 턱을 까딱거렸다.
그는 내가 신기한지 자꾸 쳐다보면서 킥킥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따라 해봐요.”
“어?”
“가사요. 제대로 발음해 줄 테니까 따라 해보라구요. 나 혼자 신나기 좀 미안해서.”
나는 한 자 한 자 영어로 된 가사를 천천히 씹어 발음해 줬다.
“너 머리가 어떻게.”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된 거 아냐?”
“이어서,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제법 잘 따라 하네.
영어 가사라 뜻도 모를 텐데, 남자는 알려주는 족족 잘 따라 했다.
“무슨 뜻이야?”
“어…….”
가사 내용이 사랑 노래라 뜻까지 알려주긴 싫었다.
혹시라도 제 몸과 얼굴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진 듯한 저 남자가 아주 조오금의 오해라도 할까 봐.
내가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사랑 노래를 부른 것으로 말이다.
절대 싫지.
“가사가 무슨 뜻이냐면.”
“…….”
“네 못생김이 나를 불쾌하게 하네. 그러니까 저 멀리 떠나줘. 이거요.”
“다음 구절은?”
“어이 이봐, 다가오기만 해봐.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거야. 넌 정말 겁이 없군.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 이거예요.”
“음, 마음에 들어.”
어째서 마음에 드는 걸까.
남자는 노래의 내용은 별 상관없는 듯했다.
그가 계속 내가 알려준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잘 따라 부르는 그가 기특해 차 대시보드를 때리며 박자를 맞춰줬다.
그 역시 조금은 흥겨워진 듯했다.
나를 봐줘.
나를 봐줘.
너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그리고 너도 나를 봐줬으면 해.
나보다 한 키 낮춰 부르는 남자의 흥얼거림이 싫지 않았다. 어쩐지 나도 신이 나버려서 어설픈 그의 팝송을 들으며 몸을 흔들었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넓고 긴 도로에 차는 한 대뿐이었다.
그 안에서 나와 데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