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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1)화 (11/108)

11화

소설은 역하렘 키워드를 달고 있던 만큼, 작품소개에서 꽤나 자세하게 남주들의 프로필을 다뤘다.

낮부터 의심했고,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나는 이 남자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놈 옆에 붙어 있자.’

최후의 낙원을 발견하기 전에 죽긴 하지만, 어쨌거나 네 명의 남주 중 한 명인 진남주는 낙원의 문 앞까지는 가니까.

이 남자가 진남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남자 없이는 지금 내 목숨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기도 하고.

소설 리뷰에 있던 스포를 끝까지 읽고 올 걸 그랬다. 마지막에 여주랑 진남주랑 한다는 것만 알고 그게 누군지는 모르니 원.

네 명 중 진남주를 알기 전까지는 어쨌든 이놈을 잘 케어하고 구슬려서…….

“흠…….”

나는 흘러내린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아프면 안 되는데 계속 끙끙대네. 이불만으론 부족한가?

그럴 만도 한 게 남자는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잠들어 있었는데, 놈이 입은 옷의 계절감은 아무리 봐도 가을이었다.

나는 내가 입은 기능성 패딩을 살폈다.

너무나도 대조되는 옷차림이었다.

‘내 걸 벗어줄 수도 없고.’

가진 옷이 저것밖에 없나? 저런 차림으로 지금까지 동사 안 하고 버틴 게 용한데.

그때, 남자의 머리 위로 별 모양 커서가 반짝였다.

이어서 시스템 상태창이 떴다.

[당신은 종의 요정, 이제 당신이 도울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종료.]

그러자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별 모양 커서의 색상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불우이웃을 발견하였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불우이웃에게 희망의 종소리를 울려주세요.

탐색된 불우이웃: 데일 캐드]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방에서 종을 꺼내 들었다.

종 손잡이를 양손에 쥐고 누워 있는 남자의 머리를 향해 조준했다.

‘뭐든 좋으니까 나와봐. 어떤 능력인지 확인 좀 해보자.’

아래를 향해 가볍게 손목을 내려그었다. 그러자.

-딸랑.

[스킬 ‘연민(Lv.1)’이 발동합니다.]

금빛으로 물결치는 빛줄기들이 나타나 남자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모양이 마치 황금 번데기 같다는 생각이 스칠 무렵, 나는 눈을 아리게 할 만큼 거세진 빛 때문에 눈을 감아야 했다.

‘끝난 건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강한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락은 다시 새벽빛에 휩싸여 있었다.

재빨리 남자를 살피자.

‘이건…….’

내가 덮어준 이불 안으로, 잠든 남자는 한 겹의 옷을 더 입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그 옷은 바로 내 패딩이었다.

‘물건을 복제해 냈어?’

덮었던 이불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남자가 입은 패딩을 앞뒤로 살폈다.

차이점이라곤 남자의 몸 사이즈에 맞게 크기가 커졌다는 것뿐이었다.

남자가 조언하길, 마법 계열 말고 무조건 물리 계열을 선택하라 했는데, 이건 영락없는 마법 계열이었다.

‘근데 왜 마법 계열은 하지 말라 했던 거지? 이건 너무 좋은 능력 아닌가?’

똑같은 물건이 한 개에서 두 개가 됐다고! 그렇다는 건…….

번개 치듯 떠올라 버린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시야의 구석에 생성되어 있던 작은 시스템 창을 발견했다.

폰 화면을 터치하듯 끌어서 중앙으로 가져와 확인하니, 그것은 옵션창이었다.

[외형 변경을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를 누르자 다른 선택창이 이어졌다. 외형 변경이라고 해서 크게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옵션은 색상 변경이 다였다.

나는 다양한 색상표를 눈에 담았다.

‘근본은 블랙이지.’

요란한 색상 말고 무난하게 블랙을 선택하려던 나는 선택창 뒤로 잠든 남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자는 지금 내 원래 패딩 색과 같은 빨간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깨끗한 피부에 은발이니 하얀 패딩도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하얀색이 잘 받겠는데?

나는 색상표 가장 구석에 있는 하얀 칸을 터치했다.

데일이 정신을 차린 건 해가 산등성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였다.

‘왜 덥지?’

목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열기로 후끈했다. 빙하기가 닥치고 8개월 동안 이런 열기를 느낀 것은 장작불이 타는 난로 앞에서뿐이었다.

‘설마 여자가 춥다고 장작이라도 땠나?’

그랬다면 정말 등신 중에 상등신이 따로 없었다. 층고가 낮고 밀폐된 이런 다락에서 아무리 추워도 누가 불을 지핀단 말인가.

그는 뜨기 싫은 눈을 그대로 감고 있다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

다락은 은은한 햇빛만이 비쳐 들어올 뿐, 그가 상상했던 장작불도 연기도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데일은 문뜩 고개를 숙여 자신을 내려다봤다.

“??”

자신이 여자의 외투와 같은 모양의 외투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핫소스를 한 통 다 들이부은 것 같은 경악스러운 붉은색 대신 단정하고 세련된 하얀 색상으로 바뀐 점만 빼고는 모양이 완전히 일치했다.

데일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벅지의 반을 덮는 완벽한 기장감.

팔을 굽혔다 펴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저항감 없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몸에 감기는 느낌.

장작불을 뗀 것이라 오해하게 만들었던 극상의 따스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에 쏙 든 것은.

‘깃털처럼 가볍군.’

그는 영하의 날씨에도 조금은 추운 듯한 외투를 선택해 입고 다녔다. 짐승을 잡아 털가죽을 외투로 만들어 두르고 다니면, 보온성이야 끝내주지만 너무 무거워서 기동성이 떨어졌다.

누빔외투는 그나마 덜 무거웠지만 뻣뻣해서 움직이기 불편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도 아니었고,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감이 싫었다.

무엇보다 어디서 누군가가 약탈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항상 몸을 가볍게 유지하고 싶었다.

‘이런 옷이었단 말인가.’

미친 가벼움을 체감하며 데일은 한번 어깨를 들썩여 보았다. 그리고 옷 중앙에 달린 금속 부품을 아래로 쭉 내렸다.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이 열렸다.

‘잠금장치로군.’

그는 옷 안쪽을 들춰보았다. 수납을 위한 다양한 주머니가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꼭 드는 옷이었다.

‘근데 이 옷이 어디서 난 거지?’

그의 기억으로 여자의 짐은 가죽 가방 한 개뿐이었다.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빵빵하게 차 있던 가방은, 이 정도 부피의 옷을 넣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민할 거 있나, 직접 물어보면 되는걸.

그렇게 생각한 데일이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움직이는데,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 어제 직접 깔아준 이불이었다.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있어야 할 이불이 제 발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

“없네.”

그 전날, 남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짐가방을 살폈지만 없었다.

차 트렁크에 여분의 짐이 있던 것 같은데.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나 혼자 잠깐 집 밖을 나가 차에 다녀오면 어떨까.

‘아냐, 혹시 모르니까 얌전히 있자.’

나는 패딩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종을 꺼내 들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종에서 은은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상태창, 내 정보 띄워.”

[클래스: 종의 요정(Lv.1)

스킬:

‘탐색(Lv.1)’

‘연민(Lv.1)’

    하위 분류:

        ‘연민-복제(Lv.1)’

        ❯필요에 따라 대상을 복제한다.]

상태창에 쓰인 정보를 대충 훑어본 후 스킬명을 외쳤다.

“스킬 사용, 연민.”

종을 한 번 흔든 후에 시스템 창에서 보았던 스킬명을 외쳐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서가 틀렸나?

나는 어제 패딩을 복사했던 과정을 곱씹으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불우이웃을 탐색해 봐.”

그러자 어제와 같은 시스템 창이 떴다.

[불우이웃을 찾기 위해 주변 탐색에 들어갑니다.]

[로딩…….]

[없음.]

“???”

왜 없어??

여기 고추장 패딩 입은 내가 안 보여?

“야 종, 다시 찾아봐. 전력을 다해서 찾아.”

[없음.]

아니 이 망할 시스템이 이번엔 로딩도 없이 없다고 하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나 빨간색 패딩 싫다고! 없다고 하지 말고 내 패딩 색도 바꿔달라고!!”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와, 내 옷은 안 되는 거야? 나는 입을 거라고는 고추장색 패딩밖에 없는 스스로를 동정하는데?

“언제까지 고추장 패딩 입고 돌아다녀야 하냐? 야, 종!”

그러자 시스템은 내 부름에 대답하듯 새로운 창을 띄웠다.

[스킬 ‘자기연민’이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연민하는 게 왜 안 되는데. 자신에게 박한 인간이 남에게 마음 쓰는 게 될 것 같냐아!

미친 듯이 종을 흔드는 내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잠에서 깬 남자가 내려와 있었다.

“이봐.”

“…….”

“미쳤…….”

“전 미치지 않았어요.”

“…….”

몹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패딩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날 바라보는 얼굴이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옷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아 그 옷이요?”

짜식 네가 물어볼 줄 알았다. 마음에 드나 봐?

“뿅 하고 만들었죠.”

“음, 그런가.”

그는 누가 가져갈세라 다시 후다닥 패딩을 입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괜찮았다.

“따듯하죠? 좋죠?”

“추위를 안 타는 체질이라 불필요하게 따듯하긴 하지만 나쁘진 않아.”

으이구, 허세는.

그래, 귀엽게 봐주자 싶었다. 통조림을 내려주는 내 동아줄이신데.

“근데 이 옷 어디서 난 거야?”

“아 그거, 내가 만들었다니까.”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는 간혹 미간을 약간씩 찌푸리면서도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법 계열 선택하지 말라 해서 별 볼 일 없는 건 줄 알았는데 완전 좋은데요? 왜 선택하지 말라 했던 거예요?”

그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팔짱을 끼고 날 내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 한 바퀴 돌아봐.”

“제자리에서요?”

“…….”

어려울 것 있나?

나는 그의 말대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

돌고.

“이제 반대로.”

또 돌았다.

남자는 파란 눈을 찌푸리며 염려스럽다는 듯 턱을 매만지다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네가 왜 이러는 걸까.”

“아, 왜 자꾸 돌라고 시키는데요?”

지가 돌라고 시켜놓고 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더니, 그가 한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코끝이 내 콧대에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가 무서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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