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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8)화 (8/108)

8화

재수 없는 놈은 욕실에서 샤워 중이었고, 나는 거실 한가운데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헌터, 종의 요정…….’

기계적으로 머리를 감싼 수건을 짜며, 낮에 일어났던 각성 과정을 곱씹었다.

읽었던 리뷰를 기억해 보면, 이 세계의 헌터란 크게 물리계 헌터와 비물리계 헌터로 구분됐다.

물리계란 특정 무기를 잘 다룬다거나 신체가 강화된 헌터들을 지칭했고, 비물리계란 그 외 나머지였다. 크게 마법 쓰는 놈들이나 정신계 능력을 가진 놈들.

‘그럼 나는 어디에 속한 거지?’

들어본 적 없는 클래스 명이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오늘 어엿한 헌터로 각성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내게 뭔가 클래스에 맞는 능력이 생겼을 텐데.’

하지만 뚜렷이 느껴지는 변화는 찾을 수 없었다. 팔다리를 살펴보면 그 전과 똑같이 비리비리한 것이 신체가 강화된 것 같지도 않았고.

혹시 마력을 운용하게 된 건 아닐까 싶어, 배에 힘을 팍 주고 단전에서 힘을 끌어 올려보았지만 올라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뭐냐 그럼.

“…….”

진짜…… 그건가?

솔직히 말을 하자면 예상가는 게 딱 한 가지 있긴 했다. 실행해 보기가 끔찍이 싫어서 그렇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아무 준비도 없어 생존물 소설로 들어와 버린 운 없는 인간인 것을.

사소한 능력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나는 젖은 머리를 짜는 일은 그만두고 일어나 가죽가방 안을 뒤졌다.

-딸랑.

손에 들린 물건은 나와 함께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린 종이었다. 빨간 패딩 입고 흔들던 그 핸드벨.

‘클래스 이름이 종의 요정이니까 내 무기는 이걸 거야.’

“흐얍!”

“이야압!”

“하!”

“…….”

음.

오른손에 종을 쥐고 가상의 상대를 향해 찌르고 베는 시늉을 해봤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이것도 아닌갑네.

아…… 그럼 진짜 진심 그건가?

부정하고 싶었지만 내가 획득한 히든 클래스 명은 종의 요정이었다. 요정…… 요정이라니.

아니길 바라면서도 나는 종을 든 팔을 높게 치켜들었다.

역시 요정이나 마법 소녀의 구호라면 상큼한 느낌이겠지?

“샤…….”

말하려다 말고 주위를 살폈다.

큰일 날 뻔했네.

남자는 아직 샤워 중인지 인기척이 없었다.

확실히 없군.

멋대로 굳으려 하는 몸과 입 근육을 이완시키며 다시 종을 치켜들었다.

“샤라랑~”

아닌가?

“뾰로롱~”

마법 소녀의 능력 발동은 구호만으로는 부족한 거겠지? 역시 사랑스러운 표정과 디테일한 제스처를 추가해야…….

동작과 동선, 표정을 정한 나는 한 바퀴를 빙 돌아 멈춰 선 후, 수줍고 우렁차게 구호를 소리쳤다.

“샤라랑~ 종의 요정, 등! 장!”

그리고 현타가 찾아왔다.

후…….

나 뭐 하는 거지, 굳이 이래야만 하나.

와버린 현타를 어쩌지 못해 거실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는데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XX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돌아섰더니 상의 탈의를 한 남자가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서 있었다.

남자의 표정은 방금의 내 모습을 보기 전인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정확히 조금 전 현타의 2배치의 현타가 찾아들었다.

그가 은은히 찌푸린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내가 네 근처로 다가가긴 싫고.”

“…….”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약 먹이라고 시키고 싶은데, 없네.”

이익.

“크, 클래스 명이 종의 요, 요정이니까…… 아무래도 이러면 어떨까 싶어서…….”

“혹시 클래스 명이 그냥 종인데 요정은 네가 붙인 건 아니고? 억지로 한다기엔 굉장히 능동적인 표정이던데.”

“아니거든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진심이야.”

“남 연습하는 데 방해 말고 저리 꺼져요!”

난 민망하면 입이 거칠어지는 타입이다.

꺼지라는 말에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한 손을 높이 들더니 “샤라랑~ 뿅!”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 나갔다.

XX.

밥은 각자의 공간에서 따로 먹었다.

그는 나눠주기 싫은데 정말 억지로 준다는 표정으로 고기 통조림과 야채 통조림 두 캔을 휙 던지고 제 공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꽤 만족스러웠다.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모두 챙겨줄 줄이야. 그는 생각보다 섬세한 놈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점점 바닥을 보이는 통조림을 다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절대 배가 불러서는 아니었다. 통조림 두 캔이 오늘의 첫 식사이자 마지막 식사였으니까.

중간에 입맛이 뚝 떨어진 건,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식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일요일 늦은 점심이었다.

저녁에 구세군 봉사활동을 앞두었던 그날, 해가 다 뜨고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일어나자마자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엄마가 점심 먹어야 하지 않냐며 뭐 해줄까 물었지만 컴퓨터 게임을 하던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 아무거나~”

무성의한 내 대답에도 얼마 후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의 손에는 막 튀긴 돈까스가 들려 있었다.

돈까스 진짜 맛있었는데.

그러나 내가 돈까스를 먹다 말고 엄마에게 한 말은 맛있다는 말이 아니었다.

“엄마, 나 바짝 튀긴 거 좋아하는 거 알면서, 이거 좀 덜 튀겨졌는데?”

엄마는 앉아서 먹기만 하는 놈이 말도 많다며 대꾸했지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다음번엔 아주 싹 태워서 준다, 내가.”

라며 농담했다.

돈까스 정말 맛있다고 말할 걸 그랬다. 엄마가 해준 돈까스가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고 말하고 올걸. 덜 튀겨졌다는 덜떨어진 소리는 하지 말 걸 그랬다.

다 먹지 못한 통조림을 포크로 휘젓고 있는데,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남자가 서 있었다.

“왜 남겨.”

“…….”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이게 제대로 된 식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네가 먹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엔 없어.”

이 남자는 말이다, 사람 속을 어떻게 하면 잘 뒤집어 놓을 수 있는지 정말 잘 아는 것 같다.

이 사람도 헌터라고 했지. 클래스 명이 뒤집개 뭐 이런 거 아닐까.

“누가…….”

“…….”

“누가 안 먹는대?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거 몰라요? 무슨 샤워도 빨리하고 밥도 빨리 먹고 아주 별로야 당신. 사람이 왜 그렇게 급해요?”

“…….”

내 뿌루퉁한 대답에도 남자는 묵묵부답으로 바닥에 고정된 기다란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아, 맞다. 잊고 있었네.

얘는 지가 대답하고 싶을 때만 대답하는 놈이었지.

“…….”

근데 따져보면 맞는 말이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제대로 차려진 식사 같은 건 다 끝나버린 세상이지 않나.

음식을 구하지 못할 때도 있을 텐데, 먹을 수 있을 때 한 입이라도 더 먹어두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내게 음식을 나눠줘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 이 음식은 그저 이 사람이 내게 베푼 선의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베푼 선의를 다 먹지도 않고 뒤적거리고 있던 셈이군.

이 사람 눈에 이런 내 행동이 얼마나 어리광처럼 보였을까.

남자는 여전히 내가 옆에 빼둔 오이를 다 먹기를 기다리는 엄마처럼 옆에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요.”

“…….”

“고마워요.”

“뭐가.”

“통조림이요. 고기 통조림이랑 야채 통조림 둘 다. 배고팠는데 덕분에 잘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나는 엄마에게 미처 못 하고 온 그 말을 남자에게 대신했다.

남자는 알까?

내가 지금 말을 건넨 상대는 둘이라는 걸.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나자, 밥 다 안 먹는다고 쏘아보던 남자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다 먹으면 말해. 올라가게.”

“올라가요? 어딜요?”

그러자 그가 눈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밥을 다 먹은 후 나는, 그의 말대로 물건들을 챙겨 그 앞에 섰다.

“다 챙겼어?”

“네.”

남자가 2층 천장을 향해 긴 막대기를 뻗었다. 자세히 보니 천장엔 작은 고리가 한 개 달려 있었다.

끝이 갈고리로 된 막대를 고리에 걸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향해 문이 열렸다.

그가 다시 한번 막대를 움직이자, 이번엔 나무 계단이 쪼르륵 내려왔다.

“아……. 다락이 있구나?”

“어. 1, 2층에서 자는 것보다 다락이 안전할 거야.”

남자가 비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을 허리를 굽힌 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그 자세가 영 불편해 보였다. 덩치가 커서 불편하겠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우리 저녁 따로 먹었어요? 혹시 난 두 캔 주고 본인은 세 캔 먹은 거 아니죠? 에이~ 아니겠지.”

그러자 남자가 불편해 보이는 자세에서 힐끔 뒤를 돌았다.

“내가 너랑 사이좋게 마주 보고 앉아서 먹어야 해?”

“와…….”

말문이 턱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앞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말이었지만 뒤는 농담이었다.

야, 내 대사는 말이야, 분위기를 좀 좋게 풀어보려는 노력의 시도였어, 이 개자식아.

“아뇨. 그럴 필요가 있나. 안 그래도 없는 밥맛 더 떨어지게.”

“그럼 대답이 됐겠지?”

“네~ 아주 잘 됐네요.”

그가 쌩하니 고개를 돌려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아…….

저 새끼 엉덩이 확 찔러버릴까?

“뭐 해. 문 닫게 올라와. 멍 때리지 말고.”

“아, 예~”

나는 이불을 들고 서서, 올라가는 남자의 엉덩이를 한참 바라보다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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